인간성은 어디서 오는가 공모(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사이버펑크는 인공비의 꿈을 꾸는가? – 1 (작가: Clouidy, 작품정보)
리뷰어: BornWriter, 17년 9월, 조회 123

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필립 딕의 고전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왔다는 사실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거 같다. 그렇지만 나는 필립 딕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못하였고, 그래서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와 이 작품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 혹은 제목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게다가 나는 사이버펑크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스팀펑크나 디젤펑크는 들어봤어도 사이버펑크는 처음이다. 또한 Clouidy 님은 매력적인 캐릭터에 대해 조언을 구하셨지만 캐릭터에 대해서는 내 코가 석자다. 많고 많은 취약점 중 캐릭터만큼 글쟁이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없다. 그래서 이 리뷰는 순전히 해당 단편을 읽고 느낀 나의 감상만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1. 선택적 배경

배경은 배경에 불과할 때가 많지만, 가끔 어떤 작품에서는 배경이 캐릭터로 하여금 선택을 강요하게 만든다. 이러한 배경을 나는 ‘선택적 배경’이라고 부르는데, 이 작품에서는 특히 인공 장마가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배경이 거기에 속한다. 단순히 비가 일주일 내리 퍼붓는 것만으로는 캐릭터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없다. 여기에는 특별한 장치 하나가 더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런 날씨에 직접요?”

“응.”

“그럼 사이보그겠네요.”

줄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하긴, 웬만큼 급한 게 아니고서야 이런 날씨에 일반 사람이 나올 리가 없죠.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까.”

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일주일 동안 퍼붓는데, 그게 사람 죽일 정도의 빗줄기다. 사이보그가 아니고서야 감히 나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의 인공 장마. 이게 바로 캐릭터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만드는 주된 장치다. 아직 인간인 주인공은 인공 장마 기간 동안에는 밖에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정해진 날짜를 지나고도 한참동안 비오는 이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일주일 동안 줄리아의 사무실에 갇혀있어서 좀이 쑤신다.

짐은 선택해야 한다. 비오는 날에 제약을 받으면서까지 인간으로 있을 것인가, 사이보그가 되어 제약을 벗어날 것인가. 그리고 이 선택지로부터 재미있는 담론이 시작된다.

 

 

2.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사회라는 단어는 여러 정의로 정의내려지고 있다. 이 리뷰에서 내가 차용하고자 하는 정의는 ‘다수의 인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자크 라캉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내가 자주 듣는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언젠가 그런 방송을 한 적 있다. 한국 사회에서 타인의 외모나 몸매에 대해서 평가질 하는 것이 평가질 받는 쪽의 인생에 어느정도의 영향을 미치는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살을 뺀다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사람들의 눈에 뚱뚱해보이는 것이 싫어서 살을 빼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를 위해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을 빼야 사람들이 돼지로 보지 않으니까, 그 좋(같)은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성형도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눈이 작은 건 사는데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문제가 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친구의 경우에는 속눈썹이 자꾸만 눈을 찔러서 결국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 그렇지만 요즘 사회에는 미용 목적으로 성형 수술을 받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신체발부수지부모 따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질 지를 염려하여 스스로의 몸에 칼을 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뿐이지.

예전에 TV에서 성형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렛 미 인, 이라는 이름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 방송에서는 얼굴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흉측하게 변하거나 원래 그랬던 분들이 나와 자신의 삶의 고충에 대해 토로하고, 가장 우울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을 골라 무료로 성형을 해주었다. 나는 그 방송이 너무 싫었다. 왜 우리 사회는 생김새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이리도 많은 걸까. 프랑스에서는 상대의 외모에 대해 면전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을 ‘연을 끊겠다’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단순히 ‘님 못생김ㅇㅇ’ 말고도 ‘너 살 빠진 거 같다?’ 정도도 해선 안 된다고 한다. (물론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서 뒤에서 수근대는 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앞뒤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상대의 외모를 품평한다. 오래간만에 본 상대에게 인삿말을 대신하여 ‘너 살 빠진 거 같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 나는 내게 살 빠진 거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싫다. 나로하여금 이 사회가 마른 사람을 우대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알려주고자 하는 듯해서. 자꾸만 내게 잊지 말라는 것처럼 들려서.

 

 

3. 인간성은 어디서 오는가

“한 마디 덧붙여 보자면, 기술 발전을 기다리는 것보단 그냥 개조 시술받는 게 훨씬 속 편할 거야. 혹시 그쪽에는 관심 없어? 되게 편할 거 같은데.”

“관심도 없고 돈도 없어요.”

“돈 정도는 내가 빌려줄 수 있는데. 정말 관심 없어?”

“하려면 선배나 하세요. 비 오는 날 밖에 나갈 수 있다는 점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이게 우리 사회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가 외모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조금 더 인간적으로 성숙한 사회가 언젠가는 올 것이다. 오기는 올 텐데, 기다리다가는 늦다.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걸 기다리는 것보단 그냥 성형 수술받는 게 훨씬 속 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성형에 관심도 없고 돈도 없다. 사람들의 수근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인간성이 나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성이라는 표현이 거북하다면 인격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을 거 같다. 혹은 자존감으로 대치해도 의미는 통한다. 나는 여전히 바닷가나 계곡에 가는 것을 꺼려한다. 물 속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 하고, 벗지 않더라도 옷이 물에 푹 젖으면 몸에 착 달라붙어서 뚱뚱한 것이 가림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닷가나 계곡에 들어가기 위해 지방흡입을 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 그냥 바닷가나 계곡을 안 가면 그만이니까. 백사장에서 근뉵을 뽐내는 엉아들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생겨나는 초라함에서 벗어나고자 성형수술이나 지방흡입을 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4.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 리뷰를 다 쓰고나서야 다른 분들의 이 작품에 대한 리뷰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리뷰를 쓰는 여러 원칙 중 하나인데, 내가 내 목소리에 진실된 리뷰를 쓰기 위해 다른 분들의 리뷰는 되도록 참고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다른 의견이 일단 내 머리에 박혀버리고 나면 그것이 남의 의견인지 나의 의견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모호해져버리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러한 까닭에 리뷰를 다 쓰고나서 다른 분들의 리뷰를 살펴보았다. 내 앞에서 먼저 리뷰를 작성하신 세 분은 이 작품의 ‘프롤로그적인 성격’ 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반은 찬성하고 반은 찬성하기 힘들다. 우선 이 작품이 어느정도 프롤로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인정하는 바이다. 이 작품을 프롤로그로 하는 탐정&조수 장르의 작품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단순히 프롤로그로서 뒷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기능 이상을 못 하는 건 아니다. 그 이상이 여기에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을 두서없이 적어본다면,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있다. 위에서 추측한 현대 사회에 대한 은유로서 완결되어있고, 그래서 사실 사건은 작품의 전개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그저 주제를 꺼내고 소모하는 방식으로서 의뢰인의 존재와 사건이 언급될 뿐이다. 의뢰인의 존재가 사이보그라는 소재를 소모하고, 사건의 등장이 밖에 나갈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의뢰인이 어떻게 사건이 어쩌고는 내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때문에 나는 ‘사이버펑크는 인공비의 꿈을 꾸는가’의 내용이 어떤 장편의 프롤로그여도 좋지만, 그래서 의뢰인의 의뢰에 대해 해결해가는 줄리아&짐의 이야기가 뒤에 연장되어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그 주제가 완결되었기에 (혹은 필요한 수준으로 해소되었기에) 구태여 이후의 이야기를 적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런 생각을 했다.

흠흠, 다른 분들과 내 리뷰가 너무 다른 거 같아서 노파심에 이렇게 한 마디 덧붙였다. (어떻게 셈해봐도 한 마디는 아니지만.)

 

 

 

나는 이 작품이 그런 식의 사회비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비판이 아니라면 자아비판이라 해도 좋다. 어쨌든 개개인의 자아를 비판하는 것이 곧 사회비판으로 가는 첫걸음일 테니까. 너무 겉으로 보이는 것에 집중된 사회, 그리고 그 사회에서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개개인에 대한 비판.

Clouidy 님이 다른 작가 계정 ‘나개싸이코임’ 명의로 올린 단편들도 사회비판적이다. 그러나 두 필명은 사회를 비판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개싸이코 쪽은 은유의 방식이 어느정도 직설적이고, 대체로 폭력적이다. 그에 비해 Clouidy 필명 쪽의 작품은 은유가 정말 은은하다. 그래서 읽히는 대로 술술 읽어내려가다가는 그 작품이 정말로 함유하고 있는 주제 의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넘어가버릴 지도 모른다(혹은 그냥 내가 설레발을 치는 거고 실제로는 이런 주제를 은유할 생각이 전혀 없으셨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두 필명 모두 비슷한 지점에서 사회를 비판한다. 그 점이 참 재미있다.

Clouidy 님의 (나개싸이코임 쪽의 글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여러모로 재미있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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