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제목인지라 일단 공동 생산, 공동 분배, 등등 유명하지만 내 입으론 분명히 설명 못 하는 ‘마르크스 주의’를 찾아 인터넷 사전을 뒤적이곤 단편을 읽기 시작했다.
근데 주인공 이름이 유소유라니. 시작부터 ‘마르크스 주의’를 스윽 비껴가는 느낌이다.
어느 날 자신의 몸을 보관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은 유소유.
사정인즉슨 그는 맑시스트로서 열심히 살아온 이상을 실현코자 조기 은퇴했지만, 실제 맞닥뜨린 건 그를 떠나버린 반려인과 맑시스트의 멸종이었다.
실패한 인생이라 생각한 그는 생을 마감하려 하는데 그 순간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이 정도로 맑시즘에 진심이었건만… 쯪.-
그것은 공정과 평등을 위한 신체 교환이었고, 그는 돈을 받고 몸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의 볼품 없던 몸을 빌려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빌려 쓴 지금의 몸을 반환해야 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 노동이 아닌, 섬세하게 단련된 현재의 귀족적 몸을 포기하기 싫어진 그에게 또 다른 제안이 들어오는데…..
“세상은 평등을 향해 진보하지만, 몸은 쾌락을 향해 진화합니다. 그게 자본주의의 미래지요. 회원님의 몸도 차근차근 진화를 거치는 중입니다. 맑시스트에서 부르주아로, 데카당스로.“ -글 중에서
나름 철저한 맑시스트였던 유소유가 다른 몸을 빌려 살게 되면서 원래 몸이 아닌 새 몸을 실소유하기 위해 돈을 벌어 빚을 갚으려 노력하며 겪는 일련의 상황은 집을 사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모습과 일정 부분 닮아있어 상당히 씁쓸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유하는 건 너무 너무 어렵다는 점까지.
물론 소유는 집이 아닌 몸을 갖고 싶어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의문인 건 성별을 뛰어넘는 마치 고양이나 포켓몬의 ‘뮤츠’가 생각나는 묘체 링고의 등장이었다. 심지어 묘체에는 이전과 달리 가상 뇌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묘체에 들어간 인간은 몸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꼬리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대중이 좋아하니까.
작가는 주인공의 삶을 맑시스트에서 부르주아, 뒤이어 이어지는 일련의 발전 혹은 퇴락의 과정을 거쳐 꼬리가 있는 형태로 귀결되는 ‘링고를 사면 링고로 산다’는 색다르지만, 으스스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꼬리를 위하여 이름이 있다 없어지고,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며 무수한 자아이지만 하나인 ‘링고’로, 그의 또 하나의 정보가 되어 간다.
인간이 원숭이와 갈라진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 꼬리의 소멸임을 생각할 때 꼬리와 소유와의 관계는 어떻게 된 걸까. 다 같이 하나가 되는 건 기술 발전이 이루낸 진화의 당연한 수순일까, 아니면 역행일까.
이야기는 끝났는데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진다. 마치 작가가 준비한 미궁의 함정에 빠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