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도 첫 문장도 참 인상적인 SF 단편입니다. 2024년 12월 한국의 계엄, 내란 시국에 읽으니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인공지능 의원들은 별 탈 없이 투표하러 나온 모양이지요. 뭘 보고 배웠는지…) 침착하단 말을 사전에서 찾으니 “행동이 들뜨지 아니하고 차분하다”는 뜻이네요. 터키 양식 도자기 잔에 차를 마시고 아마도 주기적으로 살충제를 주문하는, 무엇보다 인류 종말의 소식을 듣고도 몸을 씻고 출근하는 혜민에게 참 어울리는 말 같습니다. (하루 두 시간씩 일주일 사흘만 일한다면 저도 기꺼이 그럴 수 있을까 궁금하긴 했습니다. 그 정도면 어머니와의 잔소리 통화보다 업무 전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편안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러고 나온 사무실에서 안드로이드와 인사하고, 직장 동료와 잡담을 나누는 모습은 비장하거나 심각하지 않고 참 일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마도 여느 때처럼) 명확하지도 책임 지지도 않는 사장의 언사도 쓸쓸하고 웃기게 보이고요. 인류에게 억지로 노동을 시키기 위한 것으로 알았지만, 설계 중인 공동묘지는 어쩌면 남아 있게 될까 하는 궁금한 마음에 시청을 찾아가는 마음도 너무 웃기고 짠합니다. 사람이 살아서 뭘 남기나, 누구는 이름을, 누구는 자식을, 누구는 재산이나 빚을 남기기도 하겠지만 인류가 멸종하는 마당이라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시청에서 혜민을 맞은 안드로이드가 커피를 대접하고 화분에 눈풀꽃을 심는 것도 훌륭한 코미디입니다. 그리고 곧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불킥의 순간들…
두 번째 출근에서 혜민은 또다른 동료의 소식과 함께, 사장 마음 속에서 취소된 점심 회식과 함께, 어지러이 받아든 동료의 짐 사이에서 책 한 권을 만나지요. 하지만 상징적으로 느껴지는 책의 내용은 뜬금없이 마무리되어 새로운 마지막 여정의 시작이 됩니다. 이 모든 여정이 묘하게 기운 빠지는 느낌인 것도 재미있어요. 하긴 다음주에 나도 뭣도 없는데 날 기운이 있을리 없겠지요. 우연과 행운이 겹쳐 책을 쓴 안드로이드(처럼 보이지만 같은 기억에 의식은 다르다고 말하는)로부터 뒷이야기를 들은 혜민은 여전히 침착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세상은 종말을 맞습니다.
현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침착한 종말이고 부럽기까지 한데, 내내 재미있으면서도 세상 마지막 순간에 나 스스로를 움직일 만한 것은 뭐가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이 단편은 종종 생각 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