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은 『죽음의 무도』에서 공포 장르의 3요소를 ‘테러’와 ‘호러’ 그리고 ‘우웩’으로 정의한다. 테러는 서사의 힘을 이용해 독자로 하여금 다음 장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고도의 기술이고, 호러는 실감 나는 시각적인 묘사로 공포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웩은 말 그대로 구토를 유발할 만큼 징그럽고 괴기스러운 묘사를 의미한다. 킹은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테러를 가장 상급의 요소로 취급한다. 그렇다고 해서 테러를 잘 구사하는 작가가 우월한 작가이고, 우웩은 단지 저질 삼류 작가의 전유물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 요소 모두 공포 장르를 구성하는 특징적인 기술이고, 각각 수행하는 역할과 기대되는 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흡사 야구에서 투수가 전략과 전황에 따라 구질을 달리하는 것 같은 문제일 뿐이다. 결국 뛰어난 공포 작가라면 세 가지 요소 모두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타 작가의 단편 「여왕이여, 영원하라」는 호러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기한 세 가지 요소 모두를 결여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예상되는 다음 장면이 두려운 상상을 부추기도록 쓰이지 않았으며, 공포심을 자극할 만한 시각적인 묘사, 구토를 유발하는 징그러운 묘사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무섭지 않게 읽혔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이 소설이 호러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성격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해시태그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사회풍자소설’.
물론 소설 속에서 충격적인 장면이 전혀 제시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 한 번, 맨 마지막에 등장하기는 한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주인공의 선택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이다. 주인공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고 전혀 다른 선택지를 고른다면, 그 변화의 요인에 독자는 주목하게 된다. 반대로 주인공이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관철하려 든다면, 독자는 자연히 그의 굳센 신념과 이를 위협하는 외압에 굴복하지 않는 자세를 눈여겨보게 될 것이다. 소설 「여왕이여, 영원하라」의 주인공 지아는 후자의 경우처럼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녀가 걷기로 결심한 길의 실체가 실은 악마적인 유혹과 타락으로 점철된 곳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는 직후이기 때문에 그녀의 이 같은 선택은 독자에게 어떤 불협화음에서 오는 생경함과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대목은 앞서 보다 적극적인 설득이 뒷받침되어야 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 대목이 결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감상은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오, 주인공이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구나. 그런데 도대체 왜?’
작품은 자본주의에 찌든 기성세대가 낳은 악습에 의해 인플루언서나 유행을 민감하게 맹종하는 어린 세대의 모습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 세태에 반감을 표명하고 이것을 거부하고 맞서 싸우는 등의 이야기를 쓰지 않고, 무기력하게 잠식되고 마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결말을 짓는다. 메시지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주인공의 이 같은 결심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밝혀져야 한다. 어떤 내적인 성숙과 고찰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왕관에 매혹돼서 그런 것이라는 설명은 무책임하다. 인플루언서와 유행에 민감한 청소년들에게는 정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뭔가 다른 이야기가 더 있을 것이다.
예전에 문학도 친구와 한국의 등단 제도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나는 등단 제도가 작가지망생들의 데뷔를 고무하기보다 되레 옥죄고 있고, 미등단 작가가 자기 글을 대중에 선뵈는 일을 무슨 불법 무면허 영업인 것처럼 간주하게 한다는 논리를 펼치며 등단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부정했다. 친구는 내 주장이 지닌 비현실성과 자기 연민으로 인한 한계점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일단 등단을 해.” 등단을 한 다음 문단 내 영향력을 키운 뒤에 그런 이야기를 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시스템에 불만이 있더라도 시스템 밖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는 의미였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등단이 좋으면 너나 해라!” 하고 내가 먼저 호통을 친 것이 기억나는 걸 보니 그날의 논쟁은 나의 패배로 마무리된 듯하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등단 제도는 여전히 존재한다. 건재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문단 내 성폭력 문제 등 각종 폐해와 악습이 폭로됐고, 명망 있는 여러 문학상들이 수상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그 권위를 스스로 잃어 버렸다. 반면에 ‘브릿G’와 같은 양질의 자율참여형 창작 플랫폼이 더러 생겨나며 작가지망생들이 자기 글을 대중에 선보일 수 있는 기회는 훨씬 많아졌다. 이 모든 게 문단에 불만을 품고 몸소 적진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어느 당찬 문인의 영향력에 의한 변화인지는 알 수 없다. 시스템에 불만이 있어도 시스템 밖에서는 발언권이 없다는 말이 참인지, 아닌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드러날 문제는 드러나기 마련이며,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겠냐는 말만을 믿을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미타 작가의 「여왕이여, 영원하라」에서 같은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지아는 매년 학교에서 열리는 ‘만월제’에서 ‘여왕’으로 선발되는 것을 꿈꾼다. 일종의 교내 인기 투표로 선발되는 여왕은 이 학교에서 학생이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영예로, 다른 학생들의 동경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는 것은 물론, 연예인으로 데뷔하는 등 전국적인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만월제를 통해 매년 여왕을 배출하는 이 학교의 영향력은 매우 대단해서 교내에서 유행하는 패션 아이템이나 코디 등이 매번 전국적인 유행으로 번질 정도이다. 만월제의 여왕은 그 유행의 최첨단에 서 있는 선두주자인 셈인데, 주인공 지아 역시 자신이 만든 패션 스타일을 다른 학생들이 따라하는 것에 굉장히 자부심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아는 자신을 따라할 줄만 알지 스스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다른 학생들의 “특색 없음에 아주 질려 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을 따라 옷을 입거나 패션 아이템을 코디한 학생을 보며 ‘예쁘다’, ‘잘 어울린다’ 등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또 그녀는 학교 선생님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모범생으로도 아주 유명한데, 속으로는 이 일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그녀의 이 같은 이중적인 모습은 오직 선생님과 학생들의 눈에 들어 만월제 여왕으로 추대되고 싶다는 맹목적인 갈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어느 날 반 친구 하나가 사라지고 친구의 실종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교장으로부터 입막음의 대가로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제안을 받을 때조차 지아는 만월제의 여왕이 되게 해 달라고 청한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로 하여금 뭇 학생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영예에 집착하도록 만든 걸까? 그 이유를 유추하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문장이 눈에 띈다.
“만월제의 여왕만 되면 더 이상 선생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
선생님들의 심부름과 부탁을 들어줘야만 높은 품행 점수를 받을 수 있고, 그 부당하고 불합리한 처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만월제의 여왕이 되는 것뿐이라는 믿음. 제도권과 맞서기 위해선 제도권의 정점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아이러니한 논리.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그녀의 강박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학교의 여왕이 되기 위해 애쓰면서도 학교가 지닌 가식과 모순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다. 그것은 단지 여왕이 되는 데 필요한 호감을 얻기 위해 거짓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자신의 형편에 대한 자조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거짓과 가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과 가식에 스스로 뛰어들기로 결심하는 그녀의 강단이다. 그녀는 주체적인 성격으로, 유행에 무작정 따르기보다 유행을 선도하며 개성을 표출하는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매년 여왕을 뽑고, 여왕을 닮고 싶어 하는 모두가 똑같은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는 천편일률적인 시스템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이 다르다고 느낀다.
“난 처음부터 유행을 만들어 내는 유일한 존재였어. (…) 나는 누군가를 따라하는 사람이 아니야.”
사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학교와 만월제라는 시스템에 함몰되고 싶어 하지 않은 인물일지 모른다. 만월제의 여왕이 되기를 갈망한 것은 그것만이 시스템의 통제와 억압을 벗어나 마침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유행을 선도하는 선두주자로서 여왕이 되어 비로소 시스템을 깨부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학생들의 귀감이 되고자 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속된 이유가 아닌 순수하게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초신성의 폭발처럼 환하게 주변을 밝히고 빛나는 존재 말이다.”
마침내 여왕에 등극한 지아가 왕관을 수여받는 대관식의 현장에서, 실종됐던 선대 여왕 나래 선배가 나타나 학교의 비리를 폭로한다. 그녀는 지아와 다른 방식으로 시스템에 거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의 농성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녀는 시스템 밖에 있는 것이다. 왕관을 거부하고 도망쳤던 나래 선배는 선생님들에게 붙잡혀 얻어맞고 기절한다. 그 모습을 보며 지아는 자신은 나래 선배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실패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왕관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시스템을 거부하기 위해 시스템에 몸을 내맡긴다.
“선택은 적어도 나만의 자유이며, 아무도 나를 통제할 수 없었다.”
작가는 그녀의 선택이 야기할 결과를 독자의 판단에 맡김으로써,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이어질지 그렇지 않을지 누구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 소설이 낳는 불안한 감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이토록 치열하게 온갖 제약을 감수하면서도 시스템에 동화되는 척, 시스템을 거부하려 들었던 주인공의 노력이 과연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지, 우리는 모르는 것이다. 이 소설은 학교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철저하게 학교가 요구하는 대로 살아간 한 개인의 비밀스러운 투쟁기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염세주의적이고 비관적인 비극일 수도 있다.
소설은 이렇게나 필사적으로, 혐오스런 거짓과 가식을 스스로 자처하면서까지 발버둥쳐야만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을까 말까 할 만큼 강력한 지배력을 지닌 시스템의 위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 지아의 머리를 집어삼키려고 아가리를 쩍 벌리는 왕관의 이미지처럼 시스템은 개인을 말 그대로 집어삼킨다. 그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고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이상 호러 소설로서의 정체성은 다소 불안해 보이지만, 적어도 사회 풍자라는 기능적 측면에서만큼은 일부 간담을 서늘케 하는 소설, 미타 작가의 「여왕이여, 영원하라」 리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