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
낭만으로 가득찬 기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노라면 가끔 현대에도 기사단이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든다. 뱁새 기사단은 현대에 존재하는 기사들의 이야기다.
정확하게 말하면 뱁새 기사단의 주인공은 아직 기사(보)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사단 소속이니까 기사라고 생각할거다. 주인공 보람이 등장하자마자 타이치와 주고받는 작지만 소소하게 웃음을 주는 만담과 폭발에 휘말려 실컷 구른 다음 내뱉는
“씨발, 좇같아서 못해먹겠네”
라는 말은 초반부터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해 보인다. 나도 보람이 ‘좆같다’고 느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해서 다음 편으로 후딱 넘어간 사람 중 하나니까.
보람은 기사보를 관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는데, 그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좆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련없이 걷어차고 나오는 행동력은 나한테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서 살기보다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편이라 이렇게 거침없이 행동하는 인물들을 보면 내가 괜히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이마에 뿔을 가진 사람들이 남을 해치고 자신도 뿔을 터뜨려-사실 뿔이 멋대로 터지는 것이긴 하지만-더 큰 피해를 입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 활동하던 보람은 오랜만에 고향에서 푹 쉬는데, 그 다음날 자신의 이마에 뿔이 자라 있는 걸 발견하고 패닉에 빠진다.
자수를 해야 하는지 도망가서 숨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던 와중, 보람의 뿔은 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뿔이 생겼으면 끝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사라질 수가 있다고? 아니 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보람도 자기의 뿔이 왜 사라졌는지 모르고, 나도 모른다. 현상을 설명하기 전 일단 배가 고프니 밥을 먹기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 보람은 기사의 습격(?)을 받는다. 그리고 혜진과 뱁새 기사단이 등장해 보람을 구출하면서 이야기는 또다른 전환점을 맞는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기사단이 사실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처럼 정의로운 곳이 아니라, 사실은 무자비하게 인체실험을 하고 뿔을 만들어낸 당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람은 충격을 받는다. 히어로 집단인줄 알았던 전 직장이 사실은 나쁜놈들이었습니다! 라고 하면 누가 놀라지 않겠어? 그 와중에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뱁새 기사단에게 연봉 협상을 제의하는 보람의 모습은 비현실적인 와중에 얼마나 현실적이었는지 모른다. 아무렴. 연봉과 근무조건은 직장을 고를 때 중요하게 봐야 하는 포인트 아니겠어?
자신이 뿔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능력이 있다는 말에 보람은 기겁한다. 자기도 모르는 능력이 자신한테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해. 나같아도 놀라겠다. 그 와중에 다시 보람의 전 직장에서 뱁새 기사단을 체포하러 습격하고, 보람은 혼란을 느낀다. 뱁새 기사단이 기도회 소속 기사단이랑 대립한다고는 하지만 거기도 그렇게까지 선한 단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얌전히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보람은 기도회 소속 기사를 때려눕히고, 뱁새 기사단에 입단하기로 결정한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보람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것밖에 없어보였다.
뱁새 기사단에 입단한 보람이 지하에서 살아가기 전 자기에게 밥을 맛있게 해줬던 식당 주인을 스카웃하러 찾아오는 걸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렇지. 사내 복지 중요하고 그 중에서도 밥은 더 중요하지.
이 와중에 뱁새 기사단이 정의의 편을 자처하지 않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상대방을 무조건 악당으로 몰고, 자신은 무조건 선한 영웅이라고 나누는 평면적인 이분법은 쉽게 질린다. 자신들이 모자랄 수도 있고,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훨씬 더 인간다워 보여 호감이 갔다. 세상에 무조건적으로 착한 일과 나쁜 일만 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지하로 숨어들어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일 보람과 뱁새 기사단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과연 그들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기도회와 소속 기사단처럼 타락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황새가 되겠다고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뱁새 기사단과 보람이 뱁새로 남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다 갑자기 일어난 한 사건 때문에 삶이 180도로 뒤바뀐 보람의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 지겹다면 스펙터클한 직장으로 이직한 보람과 함께 여행을 떠나보는 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