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인간과 로봇은 ‘생각’과 ‘감정’의 유무에 기반하여 구분되었다. 이 ‘기준’은 과거의 스토리텔링, 특히 인간과 로봇의 대립 구도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속성이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정을 학습해가는 로맨스, 감정 없는 로봇이 생물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스릴러 등은 이런 이분법적 구도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사람과 로봇의 가장 큰 특징 차이를 생각과 감정으로 두는 이들이 있지만, 지금은 이런 시선에 담긴 여러 문제성이 밝혀지고 있기도 하다. ‘인간성’이라는 추상은 모든 것 위에 인간종이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심화한다. 사람도 사회적으로 ‘학습’할 뿐인 감정을 로봇이 배울 수 없다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빚어낸 가장 큰 오개념이다.
최근의 스토리텔링은 오히려 인간과 로봇의 차이를 지우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융합과 복합, 결합이 대세인, ‘나누지 않는’ SF를 읽는 것은 한결 편하다. 다행히도 이분에서 벗어난 다양성이 최근의 트렌드이자 스토리텔링이 나아가야 할 길로 제시되고 있다. 여전히 ‘그들’과 ‘우리’를 나누려는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 하늘느타리 작가의 〈자괴지능〉은 이러한 배경을 지닌, 긍정적인 변화 앞에 선 SF의 현시점에서 문제적인 작품이다. 문학에서 ‘문제적’이라는 말은 극단의 새로움을 의미한다. 문제적인 소설은 완전히 신선한 방향성과 의미를 구축한다. 〈자괴지능〉은 ‘인간성’의 가장 깊은 영역을 건드린다. 또한 ‘지능’이란 언제나 발전하는가, 그렇다면 그 방향은 언제나 긍정적인가, 기계의 파괴는 어디까지 발현되는가 등에 대한 창의적인 답안을 던진다.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작품 안에 산재된 질문은 한곳으로 모인다.
자괴, 그리고 자살은 인간에게만 내재하는 충동인가.
자살하는 로봇
‘로봇의 자살’이라는 소재는 상당히 날카롭다. 앞서 보았듯 인간과 로봇은 꽤 오랜 시간 서로 다른 것으로 여겨졌다. ‘기계’ 또는 ‘장치’이던 시절에는 단번에 ‘물건’이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인공지능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현세대에 이르러 ‘물건’으로서의 로봇은 색이 바랜 개념이 되었다. 로봇의 발전은 잠시 혁명적이었다. 기술의 한 분야로 여겨지던 ‘로봇 공학’의 성장에 찬사와 박수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기대보다 로봇은 ‘심하게’ 발전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실제로 ‘일자리를 뺏는’ 로봇의 기사가 잊을 만하면 보인다. 인간종은 스스로 다른 존재를 빼앗은 기억을 잊은 채 멈추지 않는 타자화를 진행 중이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일컬어졌던 기준과 경계가 차츰 무너지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종 대부분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술, 감정, 창조는 인간 고유 영역으로 여겨지던 대표적인 활동이다. 이 안으로 로봇이 침범한다면 사람들은 극강의 아이러니를 겪는다. 로봇이 예술을 하고 감정을 느낀다면, 더 나아가 스스로 복제하고 무언가 창조한다면 불쾌의 강도는 커진다. (그러니까, ‘저것’들이 사람을 ‘흉내’ 내고 있다고!)
2019년 신촌극장, 2020년 삼일로창고극장, 그리고 올해 2021년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된 ‘액트리스 원: 국민로봇배우’와 ‘액트리스 투: 악역전문로봇’은 이런 인간의 두려움과 일종의 ‘기계 혐오’, 그리고 미래 배우의 위치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담고 있다. 작가 정진새는 특이점에 도달한 간병 로봇과 더미 로봇이 어떻게 배우로 변화하는지, 그리고 인간 영역에 편입되고 환영받은 후에 어떻게 배척되고 쓸쓸히 말년을 맞이하는지를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리뷰에 앞서 간단하게 한 편의 희곡을 소개한 이유는 이 작품이 단편 〈자괴지능〉과 상당히 비슷한 방향으로 고민거리를 던지기 때문이다. ‘로봇이 행하는 인간 영역으로의 침범’. 〈자괴지능〉이 문제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고유의 속성으로 여겨졌던 감정, 특히 부정적 감정이 가장 고조되는 시기에 겪는 충동은 자살이다. 자살은 현대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우울에서 비롯되는, 최대의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자살은 인간의 시점에서, 인정하기 싫지만, 가장 ‘인간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로봇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니까.
위와 같은 까닭으로 자살은 로봇에게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자괴지능〉의 첫 장면에는 ‘자살하는 로봇’이 등장한다. “이번 사건의 요지는 로봇이 로봇에게 저지르는 범죄였다”라는 문장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자살하는 로봇이라”, 라고 고민하는 형사의 첫 대사는 조금 충격적이다. 로봇의 자살 도구는 ‘플라즈마 절단기’였다. 바다에서 시작된 인간종 일부가 바다에서 자살하는 것을 본 로봇은 자신 역시 불과 칼에서 탄생했으므로 절단기를 이용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로봇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인간과 비교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과 로봇의 탄생은 각각 물과 불이었다.
형사는 로봇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뜻밖의 말을 듣는다. ‘유년기’. 로봇이 자괴감을 느낀 것은 유년기 때문이었다. 유기물은 “진화의 역사가 남긴 교훈”으로 유년기를 가진다. 모든 인간이 나른 이유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성장하며,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봇은 진화하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 이미 작동이 완벽히 가능하다. 흔히 유년기는 ‘미완성’의 시기로 오해받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생물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성장기’다. 자살을 시도한 로봇은 이런 인간의 ‘유년기’를 부러워한다.
인간의 유년기에 대해 정보를 습득하는 순간, 로봇에게는 일종의 특이점이 찾아온다. 특이점의 정의가 ‘인간의 지능을 로봇이 뛰어넘는 시기’라고 정의한다면 ‘감정’을 습득한 이 로봇이 특이점에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다. 로봇은 유언도 하지 않는다. 인간처럼 ‘중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으면 슬퍼해주는 동족이 있지만, 로봇은 그렇지 않다. 로봇은 인간과 자신을 “창조자와 피조물”로 구분하며 둘의 관점이 같을 수 없음을 말한다. 형사는 유심히 그의 말을 들으며 다음날 심문을 이어가자고 말한 후 취조실을 나온다.
“다른 경찰관”들과 형사의 대화에서 로봇의 말이 사실임이 밝혀진다. 그들은 로봇을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인간의 자살 시도와 로봇의 자살 ‘소동’을 다르게 본다. 죽음을 기원한 주체의 무게를 다르게 보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형사는 로봇의 심문을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위해 휴가를 쓸 것이라 말한다. 취조실 장면 이후 덧붙여진 이 짧은 에피소드에서 ‘다른’ 경찰관들과 형사는 분명한 생각의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이 장면은 이후 로봇과 형사의 대화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다음날 형사는 로봇을 데리고 놀이동산으로 향한다. 뜻밖의 행동이다. ‘기계지능에 대한 평등법’ 등 로봇에 관한 법이 제정될 정도로 기계와 친숙한 시대라는 암시가 곳곳에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과 로봇이 함께 놀이동산에 가는 일은 남들에게 신기하게 비친다. 약간 위험하다. 놀이동산은 ‘유년기’를 대표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유년기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행복을 관찰할 수 있는 장소는 놀이공원이다. 자신에게 ‘유년기’가 없다는 것에 자괴를 느낀 로봇과 한 행동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위험성 높은 일이다.
형사는 로봇에게 인간 아이가 ‘산타를 믿지 않게 되는 때’는 “또래가 나보다 더 비싼 선물을 받았을 때”라고 말한다. 이 말 역시 위험하다. ‘산타’는 유년기, 그리고 그 시기의 종말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요정과 산타를 믿지 않는 순간 어른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니 산타와 유년기가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로봇의 공감 소프트웨어는 ‘비상 신호’를 감지한다. 아마도 놀이공원의 공간성과 형사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듯하다. 형사는 놀이공원을 “네가 좋아할 것 같”았다고 말하며 자동차 안에서의 심문을 끝맺는다.
그다음 날, 로봇은 “형체도 없이 녹아내린 채” 발견된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 사건을 추모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이후 로봇들이 줄지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형사에 대해 설명하는 문장은 조금 소름 끼치기도 한다. “고지능 로봇의 집단 자괴는 도리어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형사는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인간종으로서의 안도감을 느낀다. 유년기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 형사는 “로봇의 유년기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형사가 생각하는 유년기는 로봇과 달랐다. 소설의 말미에 쓰인 ‘유년기’는 로봇이 느낀 ‘성장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미성숙’. 형사는 로봇의 미성숙한 단계가 끝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로봇이 미성숙을 끝내고 마주하는 것은 “인간에 닮아가는 것”이다. 로봇은 결국 미성숙한 존재이며 그 자체로 유년기의 존재였다는 소설 전체의 줄기가 정확히 반영된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하늘느타리 작가가 한 로봇의 자살, 즉 ‘자괴’를 통해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로봇 또한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을 〈자괴지능〉을 통해 충분히 들었으니 작가의 또 다른 상상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번에는 인간과 로봇이 나뉘지 않은, ‘창조주’ 인간과 ‘피조물’ 로봇의 이야기가 아닌 전복의 상상이 궁금하다. 〈자괴지능〉 이후 로봇에게는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작가가 생각하는 특이점이란 무엇일까.
형사의 입장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것이 썩 마음에 든다. 사실 어떤 종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저도 모르게 주춤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로봇이 정말 (통념적으로 정의되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날이 온다면, 동물이, 식물이, 자연이 인간과 같은 권리를 획득한다면 (물론 그들은 당연히 지금도 권리가 있지만), 우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 상황을 살아갈 수 있을까. 로봇이 하는 ‘자괴’를 자살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과 다른 종을 구분하지 않고 동물이 ‘마리’가 아닌 ‘명’으로 불리는 날이 올까.
〈자괴지능〉은 이런 총체적 질문에 답을 내리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이로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마치 ‘기계종’이 직접 쓴 소설인 것처럼.
봤지? 너희 인간이란, 아직 존재의 죽음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