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이 돌아왔다> <옥상으로 가는 길> 리뷰
어떤 이야기들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분류되기 위해서는 그 장르만의 공통적 특징이 있어야 합니다. 판타지는 현실과 다른 세계의 모습을 통해 오히려 현실을 비추어야 하고, 무협은 무武를 통해 인물들이 받드는 협俠의 가치를 조명해야 하지요. 문파의 스승 밑에서 무공 수련을 하고 기를 모아 장풍을 쏘지만 드래곤볼을 무협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따라서 좀비 아포칼립스(ZA)를 하나의 장르라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ZA를 쓰려는 작가는 이 장르만의 특징을 자기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장르에 꼭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지, 다른 장르와의 차별점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된 장르소설을 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ZA의 특징이란 무엇일까요?
그냥 줄거리에 좀비가 등장한다고 해서 다 ZA 장르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겠으나, 저는 다음 세가지 요소가 ZA 장르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 좀비라는 미지의 존재에 의한 생명의 위협 – 나와 가까운 이들이 좀비로 변하는 공포 –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
그런데 ZA 장르의 특징을 이렇게 정의할 경우 약간 문제가 생깁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려면 이야기의 형태가 상당부분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자력 생존을 위한 자원은 고갈되어야 하고, 정서적 의존의 대상은 좀비로 변해야 하죠. 때문에 언젠가부터 한동안 비슷비슷한 ZA들이 반복적으로 생산되었습니다. 아예 법칙이 생길 지경이었지요. 이런 소위 ‘ZA 클리셰’는 시간이 갈 수록 빠른 속도로 늘어갔습니다. ZA 장르에는 한계가 찾아온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좀비 이야기가 자꾸 뻔해져 가는데도 사람들은 질리지 않고 계속해서 좀비 이야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단, 참신하고 새로운 걸로 말입니다.
그래서 참신한 좀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해법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크게 정공법과 변칙의 두 갈래였습니다. 변칙을 선택한 사람들은 기존 ZA에서 배경, 또는 사건이었던 좀비를 인물로 만든 뒤 다른 장르와 결합시켰습니다. 좀비를 로맨스와 결합시킨 ‘웜바디스’, 미스터리와 결합시킨 ‘아이좀비’ 같은 작품들이 그 예입니다. 좀비가 사라진 뒤를 다루는 포스트 ZA물들도 이에 속한다고 봐야겠지요. 이런 변칙적인 작품들을 통해 분명 좀비 이야기는 그 지평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래서 이 작품들이 기존의 ZA 작품들과 같은 장르냐고 묻느냐면 조금 미묘했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적 재미가 기존의 ZA 장르에서 멀어져 버렸으니까요.
정공법, 즉 앞서 말한 3요소를 지키면서 ZA 장르에 새로움을 부여하려는 시도도 물론 계속되었습니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배경’이었습니다. 어차피 장르 특성상 사건-좀비에게 물리고, 인간끼리 대립하는-에 손을 대기 어려우니 등장인물들이 놓인 장소를 바꿔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배경이 달라지면 사건도 그 모습을 달리하기 마련이니까요. 이제 ZA의 주인공들은 정말 다양한 장소에서 좀비들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학교에서, 군부대에서, 부산가는 KTX에서, 멈춰버린 관람차 안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온갖 장소에서 좀비들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했지요. 저는 그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단순히 인물이 놓인 장소를 바꾸는 것 만으로는 언젠가 한계가 찾아올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ZA 장르가 계속해서 새로움을, 참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옥상으로 가는 길>이 선택한 방법이 인상 깊습니다. 두 작품 모두 고전적인 좀비물의 재미를 살린 정통파 ZA 장르입니다. 그럼 배경이 되는 장소를 볼까요. <슈퍼맨…>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는 병원, <옥상…>의 배경은 요새화된 낡은 빌딩입니다. 진부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독특하고 신선한 장소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 되는 요소를 통해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는 데 성공합니다. 네, 인물입니다.
<슈퍼맨…>의 주인공은 자기가 슈퍼맨이라고 굳게 믿는 망상증 환자입니다. 이 인물 설정 하나로 작가는 작품의 유머와 긴장감, 주제의식을 한 번에 손에 넣었습니다. 망상증 환자인 주인공은 정상적인 사람들-독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태를 파악하기에 독자에게 웃음을 주지요. 당연히 마주치는 사건에 대한 대처도 비상식적이고, 때문에 이야기가 일반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꼬여가 긴장감을 줍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주인공은 스스로 슈퍼맨이라 믿고 있기에 다른 인간들보다 더욱 인간적이고, 이 모순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형성합니다.
<옥상…>의 주인공은 왜소증 환자입니다. 그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통해 권력을 손에 넣으면서 드러내는 적나라한 민낯이 이 작품의 핵심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ZA 장르의 대표적인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사실 이 이야기는 자칫하면 진부해졌을 작품입니다. 생존자 집단에서 힘을 가진 사람이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았으까요. 하지만 그가 원래는 사회적 약자였을 왜소증 환자라는 점 때문에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에 성공합니다. 역시 인물의 승리지요.
인물 설정을 통해 참신함을 이끌어 낸 두 ZA 작품이 모두 환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재미있지 않으신가요? 망상증 환자도, 왜소증 환자도 모두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리고 ZA는 사회의 붕괴지요. ZA가 발생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위치는 변동하고, 작품을 통해 그 과정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그들이 처해 있던 – 즉, 현실의 – 환경과 그들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얻게 됩니다. 두 작품의 작가분들이 이를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회적 약자 주인공과 ZA 장르의 결합은 성공한 듯 합니다. ZA의 고전적 재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재미를 추가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언제까지 살아남을까요? 작품들이 서로 비슷비슷해지기 쉽고, 제약도 많은 장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매력이 있는 장르이기에 독자들의 요구도, 작가들의 연구도 계속되고 있지요. 그 결과 배경, 장소를 거쳐 이제 인물에 집중하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클리셰와 무관하게 독특하고 참신한 재미를 주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슈퍼맨…>과 <옥상…>을 보면, ZA라는 장르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을 비추기 좋은 장르일 가능성도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어쩌면 ZA 장르는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조명이 필요한 약자들이 많고도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