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소설들이 그렇지만, 특히나 SF를 접할 때면 그 시작이 항상 힘겹게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타임리프를 다루는 이야기 같은 경우는 단순히 어떻게 이루어진 세상에서의 일인지에 대한 호기심에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이동하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까지 더해진 상태에서 그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읽어 나가야하는 것이니 힘겨움이 좀 더 크게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작가가 만들어낸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런 어려움(?!)이 없는 소설이라면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거나 그래왔던 세계라는 이야기일 것이고, 그건 곧 전혀 새롭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 그 소설 자체에 금방 흥미를 잃고 말 것이다. 뭐, 어쨌든! 타임리프 소설이라면 그 시작에 있어서부터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떻게 독자를 자연스럽게 그 세계로 끌고 들어가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의 초상>은 ‘채무상환의 의무가 태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성한 의무’ 라는 독특한 설정에서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를 빚을 갚기 위해 ‘시간 이주’라는 이름으로 세대를 이동해가면서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시간 난민’으로 불리고 있는 이들의 문제와 그런 상황에서 이미 해체되어버린 ‘가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빚과 노동으로 엮인 시간 이주’ 라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의 타임리프를 이야기하고 있기에 앞서 언급했듯이 당연히 어려움(?!)이 느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시대의 초상> 은 그 시작이, 아니 시작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참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굳이 어려운 용어를 동원해가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붙이지 않았기에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겠고, 타임리프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오늘날 우리가 놓인 현실과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시간 이동을 이야기하지만, 그 상상 속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빈부격차라는 문제이자 아픔, 애를 가지고 싶어도 키우기가 힘들어 망설일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문제이자 아픔, 그렇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었다’ 는 말밖에 남기지 못하는 문제이자 아픔들이 지금 이 시대의 초상으로 그려진다. 당연히 전체적으로 우울한 느낌일 수밖에 없다. 천년이라는 세대를 이주하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결국에는 어떻게든 살아가는, 어쩔 수 없었다며 그래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우주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슬프면서도 무서운……. 그러기에 더더욱 벗어나야만 할 오늘날의 문제로 인식되어 더 가슴깊이 박히는 이야기가 <어느 시대의 초상> 이 아닌가 생각된다.
단편으로 남기에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 속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할 말을 아직은 제대로 시작도 못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좀 더 확장된 이야기, 아니 꼭 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 아쉬움을 해결해 줄 또 다른 뭔가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