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으로 천 년 단위로 시간 이주가 이뤄지도록 돼 있는 시간여행이 보편화된 시대. 그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사채업자들의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할당량을 끝내야 비로소 이주할 권리를 얻게 된다. 주인공 ‘나’ 역시 사채업자들의 농간으로 이주 중에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다른 세대에 배치된 채 할당량의 노동을 매일 반복하고 있다.
채무자들에게 상환의 의무는 태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성한’ 것이며, 사채업자들은 이윤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특정 구조물을 이식함으로써 채무자들을 다양한 세대로 이주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뿌리를 모르는 책임의 굴레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한 세대에 정착하지 못하고 시간을 떠돌게 된다.
제2회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인 「어느 시대의 초상」은, 규정되지 않은 세대에 체류하는 ‘시간 난민’이라는 설정을 통해 대물림되는 현대 사회의 병폐적 단면을 깊이 있게 통찰하는 작품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사회의 계급 구조와 그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각자의 삶을 조명하는 SF적 상상력은 읽는 이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제 제게 남은 의무는 사채업자들에게 빚을 갚을 의무뿐인 거죠. 남들이라고 다르진 않아요. 하지만 그런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