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벗어나지 못할 향기가

  • 장르: SF, 호러
  • 평점×30 | 분량: 88매 | 성향:
  • 소개: 숲에 간다면 나무들을 유심히 보세요. 가짜가 숨어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더보기

실족(失足), 실종(失踪) 감상

리뷰어: cedrus, 11월 12일, 조회 40

○ 담장 [어디선가 벗어나지 못할 향기가]

○ 다니엘 켈만 [너는 갔어야 했다] (임정희 역, 민음사 출판)

 

이번 리뷰에서는 두 편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볼까 합니다. 결말을 포함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독서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어디선가 벗어나지 못할 향기가] [너는 갔어야 했다]는 다루고 있는 테마, 서술 방식 등에서 재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이야기를 독창적으로 만드는 요소들도 따로 존재하고요. 두 편 모두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이며, 여기서 같이 다루는 이유도 어디까지나 애정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어떤 점에서 어느 이야기가 더 잘 쓰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두 이야기를 나란히 두고 생각할 때 더 깊이, 재밌게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어지는 내용은 제가 두 편의 작품을 감상하며 느낀 것들을 다듬은 결과물입니다. 다소 두서없는 부분도 있고, 어디까지나 제 상상에 불과한 내용도 있어요. 읽으며 상상하셨던 것과 다르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읽고 상상하고 다시 읽으면서 정말 즐거웠어요. 다른 분들이 읽으면서 재밌게 느꼈던 부분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기쁠 것 같아요.

소제목 겸 사용한 문장들은 본편, [어디선가 벗어나지 못할 향기가]를 인용해 기울임체로 작성하였습니다. [너는 갔어야 했다]의 문장들은 쪽수와 함께 밑줄을 그어 표시했어요.

 

상담에 관한 기록은 일체 이루어지지 않으며 상담 내용은 비밀로 유지됩니다

[어디선가 벗어나지 못할 향기가] (이하 [향기]) [너는 갔어야 했다] (이하 [갔어야 했다])는 낯선 세계를 조우한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기록이지요. ‘낯선이란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완전히 다른 규칙으로 움직이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세상을 목격한 인물들이 남긴 기록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향기]의 시작이자 첫 번째 기록에서, 제아는 소연에게 상담 기록은 일체 남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이미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해요. 상담 기록이 남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건 뭘까요?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제아의 말과 달리 실제로는 기록이 남았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상담에 관한 기록은 일체 이루어지지 않으며 상담 내용은 비밀로 유지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기록은 이와 같은 제아의 대사와 함께 시작됩니다. 재밌는 점은, 기록4에서 제아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인사도 없었고, 그저 다시 상담을 진행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소연은 ‘상담 내용은 기록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라고 묻지요. 기록이 거듭될수록, 물리학자였던 소연은 스스로가 식물학자였다고 말하기도 하고 사건의 세부 사항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기록을 읽는 것을 방해하는 노이즈가 차츰 강하게 생겨나고 있어요.

 

우리가 그들은 본다면 아주 기이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향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건, xyz,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이 아닌 다른 축을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인지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느끼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지요. 우리가 공간을 자유롭게 다니지만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면, 그들은 z축 대신 시간이라는 t축을 오갈 수 있다고 해요. 대신 공간축에 해당하는 z축을 오갈 수 없고요. 그들은 처음에 점유한 자리를 계속해서 유지하되 우리가 과거나 미래라 부르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보지 못한, 경험할 수 없는 감각이라 전적으로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향기]는 그것을 마주했을 때의 감각적 경험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상상을 보조합니다.

산은 말할 수 없이 거대했고, 내가 본 어떤 심연보다 골이 깊었다. 바닥에 닿기까지 몇 시간이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절벽을 지나고, 더 많은 절벽과 틈새와 뾰족한 바위 봉우리들과 더 깊은 틈새와 점점 더 많은 암석을 지나, 모든 것이 현기증 날 만큼 깊은 저 아래로 사라졌다. (58쪽)

[갔어야 했다]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감각적 경험이 활용됩니다. [향기]에서는 편백나무 향으로, [갔어야 했다]에서는 현기증으로 묘사됩니다.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감각으로 다가오는지 우회해 표현하는 것이지요. 작가는 그러한 감각을 묘사하고, 읽는 사람은 묘사를 충실히 따라 상상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이야기 속에 자연스레 빠져들게 됩니다. 맡아본 적 없는 향기. 그리고 산 위의 서늘한 공기. 편백나무 향 같지만 진짜는 아닌 것 같다는 위화감. 계곡 아래를 내려다볼 때의 아찔한, 그러나 단순히 높은 곳에서 느끼는 감각과는 다른 이질감. [향기] [갔어야 했다]의 인물들은 부자연스러운 무언가를 감지합니다. 혹은 상상하거나요.

 

편백나무 향을 교묘하게 따라한 진짜 같은 가짜 향기가 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갔어야 했다]에서 작가([갔어야 했다]의 주인공은 시나리오 작가입니다)가 마주한 것은 거대한 공간, 세상과 세상 사이의 틈입니다. 그 아득한 공간에 어느새 발이 미끄러져 굴러 떨어진 것이죠. 깊은 계곡 속으로 빠진 사람들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아무리 걸어도 집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민 중 한 사람인 애걸리 한스는 보리수 농장 주인인데 그 사람 말로는, 개미로서는 여기가 대성당인지, 발전소인지, 화산인지 전혀 모른다는 거요. (65쪽)

작가는 어느새 개미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우리가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우리의 을 벗어난 곳에 발을 들여요. 여기서 공간과 공간의 축이 교차했다면, [향기]의 편백나무 숲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시간이란 축과 교차하는 장소입니다.

아직 집이 익숙지 않아서 우리는 침실로 가다가 잠깐 길을 헤맸고,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는 세탁실로 잘못 들어섰다. (12쪽)

이상하게도 나는 다시 길을 잃었고, 느닷없이 복도가 더 길게 느껴졌다. 고작 와인 한 잔 마신 것뿐인데 말이다. (19쪽)

수도꼭지를 잡으려는 순간, 수도꼭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도꼭지는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더 뒤로 가 있었다. (36쪽)

그런데 [향기]의 축을 떠올리면 이런 상상도 가능합니다. 작가는 별장처럼 보이는 공간에 갇혔고, 그곳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거대한 공간이었죠. 만약 이곳이 여러 시간이 중첩된 공간이라면 어떨까요. 그래서 문을 열고 나와도 문을 닫고 들어선 순간으로 돌아가 버린다거나, 지금부터 이어질 미래가 이미 지나온 과거로 연결되어 버린다거나. 한 공간에 있지만 시간은 여러 갈래로 존재해서 인물이 길을 잃은 건 아닐까 하고요. 실제로 과거에 사라졌거나 미래에 사라질 사람들의 형상을, 작가는 목격하지 않았던가요? 시간 안에서 길을 잃었으나 우리는 시간 안에서 움직인다는 감각을 모르므로, 거대한 공간 안에 갇힌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시간축 위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좌표화하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향기]의 경우에도 시간을 오가는 나무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소연을 사로잡았지요. 이들이 영향을 미치는 방법은 시간과 관련 있으나, 소연과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몰라요. 그래서 편백나무 숲으로부터 도망치는, 공간을 토대로 한 상상만 가능했지요. 애초에 그것이 나무의 형태를 취했다는 것 또한 우리의 상상일지도 모릅니다. 숲이라는 공간에 걸맞은 형태로 그것을 인식한 건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알아볼 수 없는 존재이며 숲 속에는 당연히 나무가 있을 것으로 기대할 테니까요.

 

너무 부자연스러웠어요. 그 자리에 붙박인 채로 이상한, 이상한 움직임을 하고는

시간이란 축을 오간다는 건 무엇을 경험하는 걸까요?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른다는 전제가 필요할지를 고민하기도 했어요. 우리가 한 걸음 앞으로 가거나 두 걸음 옆으로 가는 것처럼 이동할 수 있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우리의 작은 선택이 누적되어 달라진 결과/미래를 그들은 동시에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연스레 아는 것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테지요. 이렇게 저렇게 상상해보는 건 가능하겠지만 어느 것도 제대로 들어맞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애초에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경험할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현상을 그리려고 할수록 아득함만 느껴집니다. 어둠 속에서 허공에 발을 딛기라도 하는 기분이에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질적인 향기라는 감각을 경유해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향기]의 주요한 전달법이라고 했었지요. 앞서 말했듯 [갔어야 했다]에서는 현기증이 그렇고요. 두 작품의 작가는 자신들이 상상한 무한성의 감각을, 우리에게 친숙한 것에 빗대 전달합니다. 그들의 주인공이 그러했던 것처럼요.

나는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냥 제쳐 놓을 수가 없는 것이, 이게 그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것이. (58쪽)

말. 말은 실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 (78쪽)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히 감지할 수 있는 현상 앞에서, 작가는 계속해서 썼어요. 다른 방법을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거듭해 신호를 보냈지요. 가버려, 라고요. 그런가 하면 소연은 제아를 만들었어요. (혹은 의사가 소연과 제아를 만들었지요.) 그들이 목격한 것을 우리가 사는 세상의 규칙 위에서 재구성하려고요.

 

더욱 끔찍한 점은, 환각 속에선 자신이 누군지도 구분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전개 양상은 명확히 차이가 납니다. [향기]에서는 소연의 목소리를 빌려 나무의 정체를 폭로하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기록이 반복되며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고, 노이즈가 섞이며 기록은 점차 엉망이 됩니다. 그러다 마침내 소연과 제아라는 구분마저 무너지고, 이야기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지요.

[갔어야 했다]에서는 다릅니다. 처음에는 낯선 세계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상한 현상들이 조금씩, 점점 자주 발생하기 시작하지만 이는 작가의 혼란스러운 심리와 섞여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웠어요. 단순히 와인을 마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극도의 긴장으로 인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혼란과 공포가 극에 달한 후에 비로소 낯선 세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향기]에서 한 인물이 남들이 본 적 없는 무언가의 존재를 역설하다 분열되었다면, [갔어야 했다]에서는 한 인물이 기이한 현상과 두려움 속에서 홀로 분투하다가 마침내 진실에 도달하게 됩니다.

개미에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종이에 그려진 존재에 비교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이 존재가 살아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저 종이 위에, 종이의 표면 위에 살고 있다. 이제 종이에 산이 하나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존재가 산 둘레에 원을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면적은 측정이 가능하지만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종이에는 이성이 가늠할 수 있는 원보다 더 많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존재에게는 그저 불가사의한 영역일 뿐이다. (68쪽)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이렇듯 상이하게 흘러갔지만, [향기]의 마지막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면 분명한 공통점도 드러나요. 의사와 작가는,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세상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싱그러운 피톤치드 향이 났어요

두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은 뒤 그대로 화면을 끄거나, 책장을 덮을 수 없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리고 다시 읽으면서 처음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저 정기적으로 받는 일종의 지극히 일상적인 일 중 하나일 뿐이죠.

저는 이 문장을 처음 읽으며, 수식이 좀 많은 편이라고 생각한 채 가볍게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읽을 때는 훨씬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그저, 정기적으로, 일종의, 지극히, 일상적인, , 하나, . 별거 아닌 일이라고,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지는 않나요? 누군가를 설득해 반드시 확신을 심어주기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이것은 소연의 (혹은 의사의)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일 겁니다. 말도 안되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다는 소망.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시도의 발로입니다. 상담사인 제아가 소연을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었을 텐데, 뒤에 가서는 두 사람의 역할이 반전되기까지 합니다. 의사의 존재도 그제야 드러났고요. 스스로를 안심시키고자 납득 가능한 형태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느껴집니다.

[향기]의 마지막 문단은 우리가 지금껏 읽어온 이야기를 단숨에 뒤집어 엎습니다. 우선 상담사 제아와 환자 소연의 상담 기록이라 여겼던 것은, 사실 정소연이란 한 사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애초에 제아와 소연은 같은 인물이었지요. 그렇다면 기록5에서 제아와 소연의 역할이 갑자기 바뀐 것도 이해가 갑니다.

 

나는, 아니, 내가 아닌 나는,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저는 말이죠

[향기]의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의사(혹은 의사의 형상을 한 인물)는 어디선가 전해져 오는 편백나무 향기를 맡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편백나무 숲에 누워있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닐까 하고요. 정소연이란 환자도, 그를 지켜보는 간호사들도, 이 기록을 작성한 의사도, 어떤 인물의 환상 속에서 탄생한 건 아닐까 하고요. 그리고 어쩌면, 이걸 지켜보고 있는 우리야말로 편백나무 숲에 누워있는지도 모릅니다. 편백나무 향기가 나지는 않는지 괜히 코를 킁킁거리고 주위를 살피며, 이 짧은 이야기가 준 몰입감에 감탄했어요. 제가 당연하다 믿으며 읽어왔던 것들이 사실 환각에 불과했다고 해요.

[갔어야 했다]의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은 그야말로 충격적입니다.

그제야 나는 (83쪽)

이것으로 끝입니다. 마침표도 없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끝맺지 않은 문장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의 기록이 여기서 끝났다는 걸 알게 되는 겁니다. 끝나지 않았기에 끝났음을 알게 되는 순간,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첫 문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향기]에서 그랬듯 말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이들이 갇힌 곳을 간접적으로, 매우 축소된 형태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켈만의 [너는 갔어야 했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인물의 기록입니다. 맨 처음에, 이 기록은 작가의 작업 노트였습니다. 새로운 작업 환경에서 새로운 노트를 시작했다며 의욕을 다지는 장면이 있었지요. 그러나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는데, 작가는 자신의 작업 뿐 아니라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마치 누군가에게 보고하듯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의도가 드러납니다.

수잔나, 당신이 이 글을 읽는다면, 당신이 내 일에 별로 관심이 없으니 이 글을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읽는다면 내 말이 사실임을 알아줘. (19쪽)

작가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훗날 누군가 읽게 될 것을 대비해서요. 수신자가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수잔나, 그러니까 아내조차도 이 글을 읽게 되리라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어요. 누구에게 전해질지도 모르는 채로, 누군가에게 전달하려고 부단히 쓰고 있는 거예요.

소연은 제아와 상담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위화감을 강하게 느꼈지요. 제아를 의심하며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고 과격한 행동을 하지요. 글 자체는 시각적으로 표현된 노이즈를 통해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하고요. 그에 비해 [갔어야 했다]에서는 인물의 의식의 흐름과 행동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서술을 통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정서를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기다란 탁자에 앉아 있고, 바깥은 어두워지고, 유리창에 방이 아주 또렷이 비친다. 냉장고, 레인지, 조리대, 복도로 향한 문, 평면 텔레비전, 나지막한 회녹색 소파, 탁자 위를 비추는 전등, 탁자 자체, 그 앞의 의자. 비닐 봉투도 보이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물건이 들어 있던 비닐 봉투는 구겨진 채 조리대 위에 놓여 있다. 구겨진 비닐 봉투 옆으로 빈 유리잔이 보인다, 여기 방에서, 저기 유리창에 비친 모습에서.

하지만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에 비친 거실에는 아무도 없다. (31-32쪽)

이 장면에서 작가는 강박적이라 느껴질 만큼 눈에 보이는 요소들을 샅샅이 살피고 있어요. 당연히 초조하겠지요. 무서울 테고요. 곁에 있는 사람은 어린 딸, 막 다투고 난 후의 아내 뿐입니다. 차를 타고 한참을 내려가야 찾을 수 있는 가게에서도 마을 사람들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어요.

[향기]의 인물이 분열되어 갔다면, [갔어야 했다]의 인물은 철저히 고립됩니다. 분명 가족과의 즐거운 휴가여야 했을 여정이, 날카로운 긴장감 속에서 홀로 고립되는 두려운 경험으로 변질되고 말아요. 거기에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 주변 사람들에게 느끼는 열등감이 크게 기여하고 있어요. [향기]에서 이른바 악역이라 부를 만한 존재가 있었기에,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았던 점과는 비교해 생각해볼 만하지요. [향기]에서는 미지의 생물이 다른 생물을 포식하기 위해 편백나무 향을 이용하고, 인물들은 이미 환각 속에 누워있습니다. 이들 개개인의 특성이 부각될 필요가 적지요.

나는 스스로 미친 건 아닌지 심각한 의문이 들었다. 근데 그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내가 미친 게 아닐까 의문을 갖는다는 게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64쪽)

그에 비해 [갔어야 했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등 속에서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지만 그래서 오히려 위험 신호를 발견하지 못하고, 벗어날 기회를 놓치게 돼요. 그 때문에 결말부에서 인물의 절규는 더더욱 처절하게 다가오지요.

 

나는 환각 속의 환각을 보고 있던 걸까요?

소연과 제아의 대화는 마치 처음 있는 일인 것처럼 반복되었어요. 소연의 입장에서는 그랬고, 제아는 아마 상담이 반복되고 있단 걸 알았겠지만요. 제아가 상담을 시작하면 소연은 답했습니다. 매번 조금씩 달라진 대답을 내어놓으면서요. 그리고 언젠가 의아해합니다. 이런 대화가 정말 처음인가 하고요.

이들의 기록을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평행우주나 타임루프를 다루는 장르들이요. 한 사람의 행동이 완전히 다른 미래를 불러오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행동을 해도 같은 결과로 수렴하기도 하지요. 나무를 닮은 것들이 시간을 오가는 존재라면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그들이 본 것을 소연과 제아에게 (그리고 의사에게) 보여주고 있다면, 정보의 공유를 통해 그들이 먹이를 사로잡을 수도 있을까요?

소연의 삶이 이렇게 흘러갔다면, 또는 저렇게 흘러갔다면. 소연이 경험한 시간에 더해 그가 겪을 가능성에 불과했던 과거와 미래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고 상상해봅시다. 소연은 결코 알 수 없었을 정보들이 마구 밀려올 때, 불가해한 것을 나름대로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상담 기록으로 표현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여러 판본이 존재해야만 했던 것이지요. 나무는 소연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인식할 것이고, 현재의 소연 뿐 아니라 소연이었거나 소연이 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포함할 것입니다. 소연은 물리학자일 수도, 식물학자일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현재의 소연은 단 한 사람이므로, 이 모든 정보를 이해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하려 했어요. 소연이란 인간은 지금 제아라는 안드로이드 앞에서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는 상황을 설정하면서요.

기록해, 그래야 기억을 하게 되고, 그래야 결코 그냥 망상이었다고 주장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벌써 나는 망상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33쪽)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을 차리자. 글 쓰는 게 도움이 된다. (47쪽)

내가 모든 걸 기록해 두었으니, 이 노트를 발견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될 것이다. (68쪽)

[갔어야 했다]의 작가도 비슷한 시도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자아가 여러 개로 분열되지는 않으나, 그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들을 필사적으로 기록했어요. 행동, 생각, 순간적으로 그의 의식을 사로잡는 상념들까지. 어떻게든 작은 실마리라도 잡고 싶었으니까요.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하고 싶었으니까요. 이러한 기록은 그의 작업 노트와 뒤섞인 채 마구잡이로 이어집니다. 그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는 한편, 혼란스러운 구성으로 인해 가버려’라는 말의 의미는 마지막에 가서야 분명해질 수 있었지요. 다른 즉흥적인 발상처럼, 그저 흘러가는 상념이라 여겼던 문장들의 일부는 미래의 그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였어요.

이걸 생각해보면 [향기]의 노이즈 또한 새로운 방향에서 상상하게 되더군요. 노이즈는 시각적 표현을 통해 자연스러운 읽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그런 과정 자체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독특한 방식이 되었어요. 읽는 사람에게 부단한 상상을 요구하니까요. 노이즈는 오염되어 붕괴하기 시작한 정신을 표상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갔어야 했다]의 작가가 그랬듯 환상에서 깨어나고자 의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는 아니었을까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에 불과하지만요.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서도 쉽사리 놓아주지 못하고 이런저런 상상을 해볼 만큼 즐거운 글이었습니다.

또 이런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어요. 소연이 소연과 제아로 분열되었는데, 그걸 지켜보며 이상함을 감지한 건 의사 뿐이었지요. 이제 의사는 재차 의사와 환자로 분열될까요, 아니면 글의 마지막에서 보여주듯, 소연과 제아와 간호사들은 이미 의사로부터 분열된 환상인 걸까요. 무수한 환상 속에서 특정한 행위(예를 들자면 상담)를 반복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어쩌면, [어디선가 벗어나지 못할 향기가]는 기록1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다른 판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기록은 어떤 형태일까요?

 

저는 향을 맡고도 다행히 빠져나왔지만 순전히 행운이었죠

향기, 편백나무 향기와 비슷하다는 어떤 향에 사로잡힌 이후로 한 사람의 의식이 점차 불분명하게 변해갔습니다. 물리학자였던 소연은 향기를 맡은 이후로 스스로를 소연이자 안드로이드 제아로 인식했지요. 소연은 언제부터 소연이자 제아였을까요. 우리가 소연과 제아의 상담 기록이라 여겼던 것은 사실 제삼자, ‘의 관찰 기록이었어요. 그런데 이마저도 끝이 아닙니다. 자아의 경계, 정체성이 모호해집니다. 우리가 읽은 것은 처음부터 의사가 보는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의사가 실제로 의사인지도 우리는 알 수 없겠지요.

나무를 닮은 그것들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잡아끌어요. 향기로 유혹해 중독시키고, 환상에 갇힌 사람들은 양분 삼아 자라나지요. [향기]는 우리와는 다른 축을 오가는 존재들을 노출시키며 공포를 증폭시킵니다. 이들에 대한 두려움이 글을 추동하는 힘이었어요. 그러나 [갔어야 했다]의 세상에는 아무런 의도가 없어요. 그저 축과 축의 교차점이 있고, 거기에 휘말린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요. 우연히 발을 잘못 들였단 이유 하나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을 영영 헤매고 만다니, 이건 이것대로 공포스러워요. [향기]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형태로 우리를 노리는 위협에 대한 공포를, [갔어야 했다]는 마치 재해처럼 무작위적으로 닥쳐오는 불가해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미지의 세상을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려 했어요. 끝내 실패하고 말 해석을 반복했지요.

 

난 아직도 편백나무 숲에 있구나.”

한 가지 가능성을 또 상상해 볼까요. 만약에, 의사는 정말 의사였고 편백나무 향기에 중독된 것은 소연이었다고 말이에요. 의사는 실제로 숲에 간 적이 없었다고요. 그렇게 상상해보면 의사가 향을 맡기 시작했다는 건 특이한 일입니다. 소연이 경험하고 말로 전달한 향기를 의사는 어떻게 경험한 것일까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어떠한 관념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할까요? 무언가를 인지한 존재의 머릿속에서 점차 그 크기를 키워가는, 감염에 가까운 현상이 일어난다면요?

아마도 이는 지각과 관계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단숨에 강력하게 잡아끌지 않으며, 아마도 어린아이보다는 내게 더 강력하게 작용한 모양이다. (78쪽)

이때 이상함을 감지한 사람만 영향을 받는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의사 말고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간호사들은 제아와 소연을 이상하게만 여길 뿐입니다. 중독된 채 편백나무 숲에 누워있을 뻔한 소연을 기적적으로 구출했다고 상상해보세요. 소연은 아직 회복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임상적 케이스가 되었고 의사들은 그의 경과를 지켜보고 있어요. 그 경우 소연의 증언을 통해 다른 축에서 사는 존재를 상상한 것만으로 의사는 오염되기 시작했다고 상상할 수 있어요. 소연은 숲을 빠져나왔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할 향기때문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지요. 소연의 증언에 유일하게 귀를 기울인 의사 또한 향기에 갇혀버린다는 오싹한 상상이 이어져요. 그동안 향기에 중독된 이들은 편백나무 숲을 빠져나오지 못했다지만, 소연과 의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새로운 전파자가 되어 이들의 세상에 치료할 수 없는 병이 퍼져 나가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에 이르러 읽는 사람은 의사와 비슷한 입장이 됩니다. 그가 이미 마지막 문단에서 제기한 가능성이 있었지요. 숲에 가지도 않았고 향을 직접 맡아 보지도 않은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일순 오싹함을 느끼게 됩니다. 의사가 맡은 향을 우리도 맡게 된다면?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만 일어날 일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우리가 깊이 빠져들어 읽었던 이야기가 우리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끌어낸, 바로 그 상상이 중요하니까요. 소연과 제아의 대화를 지켜본 의사가 경험했을 자각의 순간을, 의사의 이야기를 읽은 우리의 경험으로 다시 그려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며, 이 단편의 묘미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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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벗어나지 못할 향기가] [너는 갔어야 했다]는 짧은 분량으로 순식간에 읽는 사람을 사로잡아요. 다 읽은 후에도 쉽게 놓아주지 않지요. 마지막 문장으로부터 다시 첫 문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미지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두 작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을 그려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식할 수 없는 세상을 상상하도록 만들고, 그로 인한 두려움까지 생생하게 전달했어요. 처음 읽을 때도 좋았지만, 우연한 계기로 다시 읽었을 때도 즐거움은 줄어들지 않았어요.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데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고, 글이 끝나는 순간에도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까요. 저의 애정과 행복이 조금이나마 전해졌기를 바라며, 리뷰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