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이 리뷰는 소설의 전체 내용과 결말을 포함합니다.
작품을 감상하신 후, 리뷰를 보시길 권합니다.
이 리뷰는 저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 작가의 집필 의도나 다른 독자의 견해와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저 이 사람은 작품을 이런 식으로 보았다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과 내용 면에서 여러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먼저, ‘아닌가 봅니다’라는, 이 소설의 제목에는 ‘아니다’라는 말이 가리키는 명시적인 대상이 없습니다. 과연 뭐가 아니란 걸까요? 타이어 펑크나 나버리라고 전 남편에게 퍼부은 저주가 사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까요? 혹은 아무리 재결합을 고려해 봐도 남편이란 작자가 도무지 같이 살 인간이 ‘아닌가 봅니다’라고 생각했단 걸까요? 저는 이 제목을 주인공 정아가 텔레비전을 끈 마지막 장면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를 태워준 사람이 연쇄살인마는) 아닌가 봅니다’ 라고요.
소설의 결말에서 가장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마도 주인공 정아를 태워준 사람은 사실 택시 운전자가 아니라 택시 운전자를 살해한 연쇄살인범이었고, 연쇄살인범이 정아를 만난 건, 그가 막 살해한 택시 운전자를 트렁크에 집어넣은 직후였다는 내용일 겁니다. 이게 만약에 사실이라면 정아는 연쇄살인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트렁크에 시체를 실은 채 함께 집으로 온 것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위험천만한 상황입니다. 만약 1초라도 빨리 택시에 접근하여 트렁크 안에 넣은 것인지 무엇인지 정아의 눈으로 보았다면 목격자 신세가 되어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사라진 아내 정아를 걱정했지만, 정아는 택시를 얻어 타고 집으로 잘만 왔습니다. 총알택시는 사고도 나지 않고 집으로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더군다나 가족은 이 일을 계기로 재결합까지 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는 이 글을 읽고 자연스레 작가님의 다른 작품인 ‘선의와 악의’를 떠올렸습니다. 두 작품은, ‘살인마(로 보이는 자)가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두 작품 모두 ‘쉽게 단정할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악인과 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의든 선의든 그것은 상황에 따라 출현하는 어떤 특질이며 이를 행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선입견을 품고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요.)
저는 언젠가, 사람들이 호러나 스릴러를 읽는 이유 중 하나가 ‘공포를 간접 체험함으로써,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기 위함’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에서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소설 속의 인물인데도 끔찍한 일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범죄를 직접 목격하지 않고 전해 듣기만 합니다. 사건은 주인공을 해하거나 돌이키기 어려운 내상을 입히는 대신, 안도감을 느끼게 해주는 장치 또는 어떤 문제를 돌이켜볼 수 있는 사유 거리로 소비됩니다. 말하자면 이들을 스쳐 간 끔찍한 일들은 그저 텔레비전을 꺼버리면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호러물’ 같은 역할로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아를 태워다 주며 한 낯선 남자가 한 ‘아무 택시나 타지 말라’는 말은 호러물의 빌런이 화면 밖으로 뛰쳐나와 직접 전해주는 경고처럼 보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극적인 스릴러를 기대하고 보기엔 조금 밋밋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를 보는 게 아니라 ‘큰일 날 뻔했다’에 그치고 마니까요. 하지만, 이런 소설 속의 상황은 사실, 우리의 현실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연쇄살인마를 만나는 일은 좀처럼 겪지 않으며, 어디선가 전해 듣거나 합니다. 그런데 진짜로 연쇄살인이라는 사건을 마주한다고 하면, 오락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 쉽게 감당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닌가 봅니다’라는 제목을, 마지막에 주인공 정아가 텔레비전에 나타난 연쇄살인범을 보고서 한 말이라고 본다면, 그 발언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과 정말로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한 말이라기보다는, 이미 지나가 버린 소름끼치는 사건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일부러 부정하는 회피로 이해됩니다. 여러 추측이 가능하겠습니다만, 제 생각에 정아는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한 발짝 멀어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반복되어 강조한 ‘아이를 잘 키우라’는 말은, 이야기의 말미에 등장한 소품인 ‘쿠션’처럼 험한 세상으로부터 한층 보호해달라는 당부로 들립니다. 마치 우리가 참혹한 일들을 직접 겪는 대신, 한 꺼풀 씌워진 미디어의 바깥에서 접해가며 그 일들에 대한 경고를 수용하거나 뭔가를 배우듯이요. 그리고 그런 일들은 조금 더 커서 보아도 감당하기 어렵고 무서운 것이며 우리가 단순히 즐기고 마는 호러물과 달리, 그 실상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것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