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글을 쓰는 사람들에 관해 말하고 싶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누군가는 ‘정말 아름다웠어.’에서 그치겠지만 또 다른 이는 ‘아 이걸 조금 더 보완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개 후자가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작가들마다 잘하는 것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른 만큼 닿고자 하는 목표가 다른데, 이는 단순히 쓸 수 있는 최고치가 어느 정도인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 또한 포함한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건 길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많은 사람들 중 ‘이야기 속에서 아쉬운 점을 포착하는 데 능한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고,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완벽한 세상을 보고 있을까!
이외님은 내게 그런 사람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는 건 나의 지향점을 타인의 도움으로 찾아가는 것에 가깝다. 가는 길 전부를 동행할 수는 없지만 이따금씩 내가 가야만 하지만 보지 못했던 길을 먼저 뚫고 있는 걸 보면 어디로 발을 옮겨야 할지 감이 잡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시야를 모조리 읽고 싶었다.
글이라는 건 그림이나 음악과 달리 글자라는 직접적인 도구를 통해 인식된다. 따라서 누군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방법은 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쓴 여러 이야기를 모조리 읽으면, 서로 다른 글들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이외님의 경우에는 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대상’이 목적이 아니라 ‘이해’ 자체가 목적이다.
이 둘은 다르다. 예를 들어 사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사과가 어떻게 자라는지, 사과의 성분에 대해 이해하려는 A라는 사람이 있다. B라는 사람은 사과 자체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이해하는 것에 흥미를 갖고 있다. 내 눈에 비친 이외님은 B에 해당한다.
거기서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인간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들 속에서 어딘가 붕 뜬 채 살아가는 것 같았고, 혼자 있을 때도 내가 느끼는 대부분이 한 겹의 막으로 분리된 현실감 없는 사건들로 점철된 것만 같았다. 아주 가끔, 몇 년에 한 번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 소름끼칠 정도로 현실감이 돌아오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럴 때는 오히려 기억력 자체가 감퇴해버리고 불과 며칠 전에 했던 일도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사람들이 다 나처럼 느끼는 줄 알았는데 나만 그런 거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외딴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행동 방식이나 사고방식, 심리 등을 하나씩 뜯어보기로 했다. 나는 무언가를 분석하는 데는 충분히 품을 들이는 편이었다.1 타인을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는 건 그런 것들뿐이기에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데이터 베이스는 많을수록 좋았다. 지나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졌는지 긍정적인 감정을 가졌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오로지 ‘왜’라는 물음만이 중요했다. 내 장기 중의 장기는 무언가를 꾸준히 들여다보는 것이었으므로 시간을 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외님은 불완전한 이해 사이를 들여다본다. 우리는 완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함에도 소통할 수 있는가? 정답은 ‘그렇다’이다. 타인과 나는 서로 다른 행성에 산다. 그래서 우리는 망원경을 통해 멀찍이 떨어진 서로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 완벽한 이해란 없다. 애초부터 그렇게 우리는 설계되었다. 우리가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완전함을 두려워하는 존재라 무언가를 끊임없이 들여다 보고 정의하길 원한다.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걸 애정이라 말한다. 대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더라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는 애정에 속한다. 인생의 일부를 할애해서 자신이 사전에 세세함을 적는 행위니까.
그러니까 이해는 사랑이다. 거창한 게 아니라, 특정한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생물에게도, 생물에게도, 행위에도. 시간을 할애하여 이해하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건 누군가를 수용한다는 것과 동의어다. 사랑하기에 이해를 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이해하려다 사랑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작중에서 청은 녹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완전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소통은 가능하다. 동그라미, 화살표, 물음표, 느낌표, 너, 나, 우리, 좋다, 싫다. 한정적인 몇 가지 단어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청은 언제 만들어졌을지 모르는 낡은 몸을 이끌고 폐행성을 지킨다. 물품을 운반하고, 정리하고. 기계적이고(실제로도 기계지만) 반복적인 나날들의 연속 속에서 청은 닳아졌던 걸까, 아니면 태생부터 감각에 둔하도록 설계된 것일까. 감정이 탑재되지 않았지만 지성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가?
지금 청에게는 가동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필요했다. 언젠가 제대로 기능할 때를 위해 무한히 수명을 연장하는 로봇을, 고독이 천천히 차오르는 물처럼 짓눌렀다.
감각이 배제된 외로움이란 목적의식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걸까. 그럼 그걸 외로움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작중에서 청이 가진 고독은 고독이라 부를 수도 없을만큼 색이 바래져 있었다. 어쩌면 색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오독하고자 하는 가능성도 하나 열어두었다. 청의 외로움은 녹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인식되었을 것이다. 결핍이 있는 자는 자신의 결핍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언어를 잃어버릴 정도로 낡은 로봇이 깜빡깜빡 점멸하며 죽은 듯 살다가 맞이한 예기치 못한 손님이 ‘녹’이라는, 끊임없이 반짝이는 존재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사그라드는 것과 반짝이는 것의 조우라니.
작중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모든 것에 무감각해졌던 청이 녹의 방문을 알아차리기 위해 청각 센서를 늘 켜놓고 지내기 시작했다는 구절이었다. 무채색이었던 세상을 색으로 물들여주는 존재를 만난다는 건 정말 운명이 아닐까? 청은 대화하는 법을 모르고 녹은 청이 사용하는 단어를 몰랐다. 그럼에도 둘은 공명했다.
청이 녹을 받아들인 건 고독 때문이라지만, 녹은 왜 청에게 꾸준히 찾아갔을까? 단순한 연민 때문일까?
그렇기에 청의 이야기에서 녹의 이야기로 전환되는 부분이 정말 좋았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건 녹의 성질이다. 녹의 반짝이는 가루들은 칼날을 지니고 있다. 날카로운 것들의 습성은 저미는 행위고 로봇을 해체하는 건 그의 숙명이다. 감싸안음으로써 사그라지게 만든다는 건 모순적인 일이다. 녹에게 닿는 것들은 족족 흐트러졌고 가루가 되었으니, 지성을 가진 이상 서러움을 아는 게 당연했다.
설령 녹이 로봇의 존엄사를 외치는 협회의 가장 열정적인 우수 직원일지라도. 그는 빗겨나가지 못했다.
중간까지 읽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글을 이외님이 써서 정말 다행이다.’
내가 만약에 이런 글을 썼다면 분명 청이 녹을 친근함의 표시로 포옹하고, 결국 녹의 날카로운 파편에 의해 파스스 사라져버려 의도치 않은 청의 죽음에 녹이 괴로워하는 이야기를 썼을테니까.
그리고 스크롤을 내려보니 이 작가도 비스무리한 짓을 하고 있었다. 망할.
동족이었다.
아! 이건 정말 이상한 로봇이다.
녹은 이 로봇을 생각할 때마다 어딘가 누전된 듯 따끔했다.
결국 해체 명령이 떨어지고 녹은 청의 정수만이라도 데려가기로 한다. 그가 껴안는 순간 청은 가루가 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은 청의 영혼이 담긴 부품을 둥글게 말아 우주를 횡단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무정함을 미덕으로 삼는 이곳에서 녹은 이상 징후를 느꼈다. 그래서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었다. 칭찬도 보수도 그에게 더는 기쁨을 주지 않았다. 위안을 주는 건 오로지 그가 찾아갈 때마다 잠에 들어 있는 오래되고 못생긴 로봇밖에 없으니까.
청의 부품은 점멸하다 마지막으로 밝게 반짝였다. 그리고 완전히 사그라졌다.
‘영혼이라는 걸 믿니, 멍청하게.’ 녹은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저리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미는 것이 숙명인 삶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