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아름다워라

  • 장르: SF, 로맨스 | 태그: #4월의실종 #안드로이드 #휴머노이드 #AI #로봇 #포스트아포칼립스
  • 평점×34 | 분량: 20매 | 성향:
  • 소개: 4개월 전부터 아침 뉴스에서는 실종된 성인聖人을 찾는다는 방송이 대중가요의 후렴구처럼 흘러나왔다. 도시의 모든 거주민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한 곳에 접속되어 있으... 더보기

실로 아름답고 질긴 추도의 노래를 감상 브릿G추천

리뷰어: 이외, 1월 27일, 조회 49

‘천실로는 왜 천실로일까.’ 그런 생각을 가장 먼저 했습니다.

 

 

저는 좋은 리뷰어는 아닙니다. 글을 읽을 때마다 작품이 이끄는대로 속절없이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울어! 하면 네! 하고 우는 독자가 바로 접니다. 어느 한 곳에 꽂히면 그 부분을 끝없이 곱씹기까지 합니다. 이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시간을 위해서입니다. 이 리뷰는 오직 즐겁게 읽은 글을 구체적으로 돌아보기 위해서 쓰였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논리 전개가 조금 과할 수도 있겠습니다. 쓰인 의도와 다를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렇게 읽는 사람도 있겠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좀 길어졌는데, 작가님이 좀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가볍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무엇부터 말할까요.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노래와 같은 운율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겠고, 휴머노이드들이 느끼는 감정의 출처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나 대상화에 대해서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며 종교에 가까운 숭배란 무엇인지 고민할 수도 있겠네요. 놓아주는 사랑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이 모든 점에 대해 조금씩 말하게 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이렇게 시작해 봅시다. 천실로는 왜 자살하지 않았을까요. 죽음 이후의 소비를 두려워하는 그가 실종으로 신원을 불분명하게 만든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알고자 하는 건 ‘왜 그렇게까지 버텼는가’ 입니다. 마지막 남은 인류로서 그는 무엇을 지키려고 했을까요?

 

 

휴머노이드의 감정

인간에 어설프게 가까운 인공물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일러 불쾌한 골짜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불쾌한 골짜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외형은 극복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외형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처럼 행동하고 사고하며 감정까지 느끼는 인위적인 개체를 불쾌하게 느끼지 않으면서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비인간의 감정에 대해서는 논의된 바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정의 발원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중요한건 감정이 내게서 시작되어 내게로 돌아오기 때문이죠. 말과 행동에 담긴 감정을 분류하고 감정하는건 ‘나’입니다. 아무리 감정이 담겼다고 해도 내가 믿지 않기로 하면 그건 전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상대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요.

이 지구의 휴머노이드는 완벽하게 인간적이고,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며, 인간들이 하는 행동을 답습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의 사회는 인간의 사회와 완전히 닮아있지요. 텔레비전도 보고, 예술을 하며 추모까지 하지 않습니까. 외형도 인간을 빼닮았을겁니다. 휴머노이드니까요. 내외적으로 인간과 다를 바 없는게 이 지구의 로봇입니다. 불쾌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이유가 없습니다. 이 정도로 고도화된 휴머노이드라면,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설계되고 제작 되었을 거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걸 만든 천실로는 최소한 휴머노이드가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사색한 바 있겠죠. 휴머노이드의 감정을 부정했으면 애초에 이렇게 인간에 가깝게 기능하는 피조물이 탄생하지도 않았을겁니다. 그런데 천실로는 그들의 감정을 온 힘을 다해 부정하고 있습니다. 연인이 로봇에게 사랑을 심었다는게 그 이유입니다.

글쎄요….. 정말 그랬을까요.

인간에 준하는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성체가 사회를 일굴 정도로 기능하면서 단 한가지, 정언적인 명령을 따르는건 자못 비약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들도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천실로를 향한 감정과 태도가 광신에 가깝지만, 인간 광신도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신을 믿고 숭배합니다. 로봇 원칙처럼 절대적인 명령을 내릴 수야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원칙이지 감정이 아니지 않습니까. 감정은 수학이 아니므로 답을 정할 수 없고, 조작할 수 없습니다. 최초의 감정을 심었다고 쳐도 그걸 유지하는건 지성체 본인의 의지고 행동의 결과라는게 제 고민의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저는 휴머노이드들의 감정이 조작된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모든 개체가 천실로를 사랑한다는걸 누가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개체도 있지 않았을까요? 인간이 창조자를 상정하고 만든 종교가 있듯, 휴머노이드들에게 천실로는 하나의 현상이지 명령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건 어떻습니까? 

만약 사실이 이러하고, 천실로가 이것을 알고 있다면 왜 휴머노이드의 사랑을 부정할까요. 이건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감정의 진실됨이 아니라 대상화의 문제죠. 천실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증오하든 말든 그들은 자신을 사랑할 것이고, 자신의 감정은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걸요. 이건 그들이 ‘프로그래밍 되어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냥 중요하지 않은거죠. 인간도 대상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지 않습니까. 하물며 종교의 경지에 이른 ‘천실로 숭배자’들이 그들의 창조자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신의 감정을 배려하는 인간도 있던가요?

그러므로 천실로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할건 아닙니다. 휴머노이드의 감정이 진실이라고 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사랑-숭배하며 집착하는건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공포스러울 겁니다. 그들의 감정을 부정하고 고독 속에 파묻히는게 차라리 낫겠죠.

 

 

공포의 근원: 개인의 붕괴

천실로는 내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서 분노하거나 슬퍼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감정들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U는 천실로가 휴머노이드의 불변성과 영원함을 질투한다고 표현했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이 감정들은 질투에서 비롯된게 아니라, 살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로 읽혔습니다.

먼저, 그의 두려움은 아래 세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날 떠나간 세계와 함께 바래질 거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름답게 빛나는 동시에 홀로 까맣게 사그라드는 그 기분을. 

나는 언젠가 사라질 텐데 남아있는 너희는 영원히 날 바라볼까 봐, 죽음까지 그 울렁거리는 사랑 속에서 관찰 당할까봐 두려워. 

천실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죽음을 원하며, 닳아가기 싫어하면서 닳고 싶어합니다. 이 모순에서 비롯된 잡음이 천실로를 연명하게 했습니다. ‘날 떠나간 세계’-모종의 이유로 이주한 인류  를 그리워하고,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이질감을 느끼며, 결국 영원히 타자로 남을까 두려워하는게 제가 이해한 천실로의 공포입니다. 불안과 분노의 근원이죠.

불편한 감정을 천실로는 U에게 풀어냅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지만 U는 묵묵히 그걸 받아주지요.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본인도 그게 옳지 않다는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속 모르는 소리를 해볼까요. 그렇게 고독하고 외로우면 눈 딱 감고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새롭게 재편된 사회에 녹아들어보거나, 제작자로서 그들을 다시 프로그래밍 하면 됩니다. 뭐가 그를 그러지 못하게 만든건가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건 우울이지만, 방법이 있는데도 하지 않는건 부정이자 회피이며 거기엔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정과 회피는 자기self를 지키기 위해 일어납니다. 천실로는 무엇인가요? 인간입니다. 인간 개인인 동시에 유일한 인류이기도 합니다. 이 두가지 정체성이 천실로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원하게 합니다. 천실로가 자기를 지키는 방법은 휴머노이드들을 인류로 받아들이지 않는 길 뿐입니다. 천실로는 휴머노이드들과 자기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너희는 나와 다르며, 너희의 감정은 진짜가 아니다. 천실로는 이렇게 주장하며 인류와 휴머노이드를 구분 짓습니다. 꽤 필사적으로요. 이 부정은 천실로의 존재 근간을 마련하지만 고독과 외로움을 덤으로 얹습니다. 당연합니다. 동등한 개체로 인정하는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독과 외로움은 혼자서 견뎌내기 어렵죠. U가 있지만 U도 휴머노이드이므로 천실로의 진정한 의지처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지독한 고독과 자처한 고립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 뿐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현실을 뒤바꿀 힘이나, 의지가 그에게는 지금 없으니까요. ‘죽은 후에도 관찰 당할 것이 두려워’ 죽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글쎄요, 살아서 대상화를 당하나 죽어서 대상화를 당하나.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천실로는 죽지 않기를 선택하고, 마지막까지 죽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찾으러 간다고 말했죠. 그게 아무리 가망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요. 제게는 그게 어떤 생존 의지로 읽혔습니다. 애초에 감각하고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살고자 하는 의지 아니겠습니까.

살고자 하지만 살 수 없게 하는 현실이 그에게 불안과 분노, 그리고 죽음 충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요. 어떻게 자기를 지켜내야 할까요.

 

 

자기모순의 결말: 마지막 인류로 남아

인간의 놀라운 능력 중 하나는 합리화입니다. 자기 방어의 산물이지요. 모순된 논리라도 교묘하게 뒤틀어 자기를 속이는게 바로 합리화입니다. 천실로는 휴머노이드의 감정을 부정해야 그들의 대상화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고 그들의 인간됨을 부정해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으로 충분 했을까요? 아무리 자기 합리화라고 해도 납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근거가 뒷받침 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한번 해봅시다. 천실로는 본인이 인간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의심하지 않을 방법이 있습니까?

분명 천실로보다는 휴머노이드가 더 인간의 자질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하고 행동하며 감각하거나 감정을 느끼는 지성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기까지 한다면 그게 인간 아닌가요. 무엇보다 그들은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천실로는 가지지 못한 것이죠. 이때 천실로와 휴머노이드는 대체 뭐가 다릅니까? 천실로는 언제까지 휴머노이드들의 인간됨을 부정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제작자로서 휴머노이드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인이 만들었으니까요. 그렇다고 기계로 여기기엔 그들은 인간에 너무 가깝습니다. 그들이 인간이 아님을 알지만 인간이 아니라고 증명할 방법이 없는게 현 상황입니다.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그렇다면 조금 자기 합리화를 해보면 어떨까요. 만일 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종족으로서의 정체성 모두를 지킬 수 없다면, 하나만 선택하는겁니다. 마침 휴머노이드들은 휴머노이드들은 천실로를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로 기능합니다. 계속해서 그를 마지막 인류이자 창조자로 떠받들죠. 휴머노이드들을 인류에 준하는 존재로 인정하면, 휴머노이드들의 감정 -대상화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은 실재가 되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면 내면의 목소리와 싸우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주변에서 끝없이 ‘유일하고 완벽한 인간’이라고 칭송하는데요. 그걸 믿기만 하면 됩니다. 쉽죠. 그러므로 자기 모순은 무의식에서 타협점을 찾게 됩니다.

‘죽인다’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U는 자신을 로봇이라고 지칭하며 망가트린다고 표현하지만, 천실로는 그들을 죽이고 싶어했다고 표현됩니다. ‘억센 말’들에 그런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겠죠. 휴머노이드를 죽이지 못하는 천실로가 울 것 같은 눈으로 U를 바라보는 장면은 이렇게 읽혔습니다. 원하지 않는 인정 아래에서야 비로소 개체로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은 슬퍼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요컨대 ‘자기를 지킬것이냐 인간 정체성을 지킬 것이냐’가 천실로에게 주어진 선택지였다면 그는 휴머노이드의 인간성을 일부 인정함으로써 ‘인간 천실로’가 아닌 ‘마지막 남은 인류’가 되는 셈입니다. 여기서 다행인건 U가 있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서술된 바에 의하면 천실로를 ‘인간 천실로’로 봐주는 유일한 존재겠네요.

U는 천실로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요.

 

 

실로 아름답고 질긴 추도의 노래를, 사랑의 이름으로.

‘천실로는 왜 천실로일까.’ 그런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는 문장으로 글을 열었습니다. ‘천실로는 왜 아직도 천실로일 수 있었을까’, ‘무엇이 천실로를 천실로로 만들었을까’에 가까운 의문이었습니다. 늦었지만 인정해야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보다는 다른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설마 하고 뒤늦게 태그를 보니까 로맨스 맞네요. 네, 이건 U의 사랑이야기죠.  지금껏 펼쳐놓은 흐름은 전부 U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파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천실로란 무엇이며, U는 천실로의 무엇을 사랑했는가.

돌아와서, 다시 질문해봅시다. 천실로는 왜, 어떻게 천실로 일 수 있었을까요. 휴머노이드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끝도 없이 천실로를 다른 무언가로 덧칠했고, 천실로 본인조차 자기의 일부라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일부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길고 지루하게 설명했지만 상술한 내용은 결국 천실로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살기 위해 애썼지만 죽음을 유예했을 뿐 삶을 쟁취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아라는 껍데기를 잃고 와해되지 않을 수 있었던건 U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U는 천실로가 포기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전부 수용하고 보존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천실로가 U에게 만큼은 자기를 열어보였거든요. U는 그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숭배의 대상도, 완벽한 창조자도, 마지막 남은 인류도 아닌 천실로라는 개인을 받아들였습니다. 천실로가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자아의 조각은 U가 간직하고 있었던 겁니다. 쪼개진 천실로의 자아는 U에 의해 통합되게 됩니다. 이해와 존중이 한 존재를 보존한 것이죠. 

분명 신경질적이고 과격하기까지 한 천실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U는 기꺼이 그러기로 했습니다. 천실로를 타자가 아닌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하고, 그를 위해 이해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양보할 수 있을 때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로맨틱한 사랑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습니다.

자기 희생에 가까운 U의 사랑의 동기는 알 수 없지만 그걸 모른다고 해서 이 독백에 담긴 사랑이 흐려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쯤 태양계는 벗어났으려나.

U는 천실로를 기꺼이 보내줍니다. 보답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행동합니다. 그 순수한 이타심이란. 이 모든 것이 천실로를 천실로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연약한 자아를 지탱하며 붕괴하지 않도록 막았죠. 이것들의 동기가 사랑 하나라면 이는 실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누군가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할 때마저 그의 편에 서서 이해하려 하는 행동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긴 시나 노래같은 이 글은 질겼던 생명을 향한 추도의 노래같습니다. 서두의 질문, ‘왜 그렇게 버텼는가’에는 ‘존재하기 위해‘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U의 올곧은 사랑으로 완성되죠. 태양계를 벗어 났을 천실로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높은 확률로 동족에게론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주에서 홀로 죽어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괜찮을겁니다. 지구를 떠난 순간부터 그는 천실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테니까요. U가 지탱해준 자기 자신 말입니다. 낡은 우주선 안에서 그간 덧씌워진 이질적인 자기를 벗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드러진 그리움의 자리에 희망을 채워넣을 수 있을거라 믿고 싶습니다. 자기가 자기일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요.

그 먼 길을 배웅하는 추도의 노래가 어떻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요. 4월의 그가 지구에서보다 자유로워졌길 바랄 뿐입니다. U가 간직한 천실로의 모습이 U를 너무 슬프게 하지는 않기를 개인적으로 소망해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인데 적다보니 중단편 한 편 분량이 되어버렸네요.

여기까지 시간 내어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종종 ‘담담하고 목이 메여도 아무렇지 않은 애도’가 보고싶다는 말을 했었는데, 이 글이 제게 그랬습니다.

오래 찾아 헤매던 글을 만난 것 같네요. 멋진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