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만의 폭염’, ‘기상 관측 역사 이래 최초’, ‘이상 기온’, ‘예년보다 더운 (혹은 추운) 날씨’.
최근 일기 예보와 각종 기상 관련 뉴스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단어들이다. 일상적이지 않고 평년과 다른, 그러나 해마다 자주 접해 이제는 평범하게 느껴지곤 하는 이상기후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현실과 일상에 깊이 침투하고 있다. 기후변화를 넘어 ‘기후 위기’라는 단어로의 전환이 이미 이루어진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다.
인간이 파괴한 환경을 보전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누군가에겐 ‘타인의 관심사’에 불과하다. 그들은 해마다 조금씩 더워져도 에어컨을 그만큼 강하게 틀면 그만이라고, 극지의 얼음이 녹으면 북극곰의 터전이 없어지는 것일 뿐 자신에게는 큰 피해가 없다고, 몇 나라의 크기에 육박하는 쓰레기 섬이 바다 곳곳에 생겨도 당장 내 앞에 악취를 풍기지 않으니 그저 내버려 두면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 인해 생물종의 90% 이상이 사라졌지만, 아직 우리가 멸종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여긴다. 쓰레기장을 도시에서 격리하고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동물의 살해를 일상과 분리한다. 하지만 재앙이 눈을 가린다고 닥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환경과 기후, 오염과 위기를 스스로 삶과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으로 인한 종말론을 미신적이고도 광신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기후 우울증을 호소하는 젊은 세대의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들은, 어쩌면 ‘기후 우울증’이 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자신의 세대가 인류의 마지막이라는 직감에 몸서리친다. 어쩌면 이 대에서 우리의 행성이 인간을 몰아내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에 조금만 관심을 깊이 가져도, 동물과 환경, 쓰레기와 기후에 관한 책을 단 한 권만 읽어도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파악할 수 있다. 애써 미루어 둔 ‘그것’과 나 사이, 두껍게 그려둔 경계에 바늘 같은 구멍만 내도 순식간에 진실이 터지듯 밀려 들어올 것이다.
다행히 그 진실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일상에서 쓰레기를 줄이려는 노력은 이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소비자의 변화와 기업에게 호소하는 집단, 개인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져 대기업에서도 긍정 마케팅의 하나로 종이 빨대와 컵, 생분해 플라스틱 등으로의 전환과 비건 음식, 동물성 원료 무첨가 화장품 등을 발빠르게 내세우고 있다. 분해되는 데에 500년이나 걸린다고 하니 아직 최초의 플라스틱조차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 시기에 위와 같은 움직임은 어떤 식으로든 우선 환대받아야 한다.
사회의 움직임이 이러하다면 문학은 어떨까. 젊은 작가를 필두로 최근에는 자연스럽게 기후와 동물권, 환경오염 등을 언급하는 문학 작품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 지구를 되게 사랑하시나 봐요.”
단아 : 내가 사는 곳인데 잘 가꾸고 아껴줘야지.”
영화 : 북극곰 후원도 하실 기세네.
단아 : 어? 하고 있어. 돌고래도. 너도 해.
-드라마 《런온》 중
문학은 인간의 반영이다. 그렇기에 작가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이전에는 어렴풋이 감지가 되던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데 그것을 마냥 바라만 보고 있을 작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스갯소리와 농담으로라도 대중에게 환경과 기후의 위기를 끊임없이 경고하는 지금의 흐름에서 담장 작가의 단편 소설 〈파라소찰〉은 자연스럽고도 합당한 시의성을 띤 채 온라인에 공개되었다. 제목부터 아리송한 이 소설은 생명처럼 행동하는 정체불명의 물체 ‘파라소찰’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1. 창조, 분리, 소거된 것들의 회생
“파라소찰은 사선으로 몸을 비틀며 꿀렁거렸다.
미끈한 뱃가죽은 방금 전에 갉아먹은 수정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비틀고 꿀렁거린다’. 파라소찰은 스스로 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개체처럼 보인다. 뱃가줄이라고 불릴 만한 몸통과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생명의 특징이다. 그러나 광물과 수정을 섭취한다는 점,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살았다는 점이 일반적인 동물이나 식물종에 해당하지는 않는 듯하다.
파라소찰에 관한 짧은 언급 이후 등장하는 것은 ‘에스터’라는 이름의 주인공이다. 에스터는 동굴 탐험가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인간’이다. 소설을 조금 더 파악해 들어가면 파라소찰은 인간이 만든 물질, 즉 플라스틱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이와 같은 관계로 판단할 때 둘은 확연한 대립 구조를 이룬다. 파라소찰은 인공물, 에스터는 유기체이며 파라소찰은 무생물, 에스터는 생물이다. 땅을 경계로 파라소찰은 지하에, 에스터는 지상에 거한다는 점도 둘 사이의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스터는 직업 상 땅 아래에 내려갈 일이 많으며, 이는 파라소찰과 그녀의 만남을 가능케 했다.
파라소찰에게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역사에서 플라스틱이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플라스틱의 발명은 인간에게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것은 유리와 달리 깨지지 않으며, 무게가 매우 가볍고, 나무처럼 젖지 않는다. 유연하고 잘 녹아 모양을 만들기 편하다. 한번 굳으면 충격에 변형이 적고, 무엇보다 잘 썩지 않는다. 20세기 초반 발견된 후로 수십 년 전만 해도 재료로서 플라스틱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썩지 않는다’는 플라스틱의 최대 장점은 대량 생산과 일회용 소비로 인해 외려 큰 문제를 양산했다. 우리 지구에는 이제 플라스틱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생산 초반, 수백 번을 써도 쉽게 마모되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플라스틱은 문구용품이나 어린이들의 장난감, 식기 등 다회용품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형과 가공이 간편하다는 이유로 플라스틱 컵과 빨대, 봉지는 점점 일회용이 되었고 연소 및 가열 시 유해 물질이 발생한다는 것이 드러나 오히려 플라스틱을 재사용하기를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플라스틱은 지금 사회적인 골칫거리다. 이미 편리함을 누려본 인간들은 과거로 돌아가는 법을 잊었다. 사람들은 쓰임을 다한 플라스틱을 외면하기로 했다. 쓰레기를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고 애써 무시하는 중이다. 한반도 7배 크기의 쓰레기 섬이 바다에 떠다닌대도 당장 나에게 불편하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플라스틱은, 정확히 말하면 ‘버려진 플라스틱’은 인간의 눈밖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바다로 가든, 땅에 묻히든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플라스틱이 쓰레기통에 들어간 이후의 과정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최후에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선 그들은 각각의 크고 작은 개체였다. (…) 크기가 인간만 한 것부터 올챙이만 한 것까지, 다양한 모습을 띠고 이었다. 동시에 이들은 하나의 의식으로 연결된 존재들이었다.”
담장 작가는 버려진 플라스틱의 종착지에서 그들에게 ‘의식’을 부여한다. 인간에게 숭배에 가까운 사랑을 받던 플라스틱은 그 수명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찰나에 쓰이고 버려진다. 파라소찰은 그런 플라스틱의 의식 공동체다. 그들에게 원한이라도 쌓인 걸까. “파라소찰은 파라소찰들이기도 하다”. 이 ‘의식 공동체’는 스스로 생각한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물 의식’이라는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 ‘의식’은 인간을 사랑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파라소찰의 모체인 플라스틱을 발명하고 그것에 의지해 기록적인 발전을 이룩했지만, 결국 그것을 외면하고 쉽게 버리고 멀리했다. 인간과 지구의 입장에서 플라스틱은 해로운 면이 있지만, 플라스틱의 입장에서 인간은 그저 자신을 이용하다 버린 존재에 불과하다. 플라스틱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조금 과한 몰입일까. 그렇지 않다. 담장 작가는 그것을 독자에게 자유로이 허용했기 때문이다. 독자로서 플라스틱에 감정을 이입하는 순간, 이 소설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다. 플라스틱과 인간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더욱이 환경오염과 낭비의 주범으로 플라스틱이 대두되는 지금에서는.
잘 생각해보자. 분명히 플라스틱도 환대받을 때가 있었다. 아니, 거의 신처럼 추앙받을 때가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플라스틱은 내구성과 유연함으로 보아 지구상 거의 최고의 물질이다. 그러나 그것을 남용하고 혐오한 것은 인간이다. (또 결국 사람의 잘못인 것이다!) 인류 역사에 선명히 남을 원료의 발명을 인간의 욕심은 (또) 역사상 최악의 발견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렇게 된 물질이 한두 개인가!) 〈파라소찰〉 속 세계에서 인간은 환경오염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는다. 이런 가슴 아픈 역사를 고려할 때, 플라스틱과 인간의 사랑을 시도한 이 단편은 구상의 면에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하다.
“나를 감싸쥐는 이 허기는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걸까?” 작가는 파라소찰의 ‘허기’를 “누군가에게 닿고 싶다는 열망”이라 해석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파라소찰은 인간에게 철저히 버려진, 공존할 수 없던 플라스틱에서 기원했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도 겪지 못한, 철저한 외면만이 플라스틱의 말년에 남았다. 그렇게 지층에 차곡차곡 쌓여 오랜 시간 의식을 형성한 파라소찰이 무한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 공허의 끝에서 파라소찰에게 다가온 인간 에스터는 ‘그것’과 결합한다. 파라소찰은 자신의 뿌리인 인간을 만나고, 에스터는 파라소찰의 시작점을 환상으로 본다. 말 그대로 ‘환상’이다. 작가는 에스터가 보는 장면을 텍스트와 특수기호로 이미지화한다. 파라소찰은 아주 오래 전의 바닷속 생물부터 인간의 탐욕, 인류가 그 뿌리를 잊기까지의 오랜 세월을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에스터는 파라소찰의 과거를 보고 깨어나 잠시 갈등한다. 지상은 에스터에게 ‘인간’의 소굴이다. 욕심으로 죄 없는 하나의 물질을 끝내 악마화한 종족들. 하지만 그곳은 에스터의 터전이기도 하다. 에스터는 그곳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작가는 그것을 일종의 ‘사명’처럼 에스터에게 부여한다. 조금은 쉬운 결말일 수 있겠으나, 자기가 본 것, 듣고 직접 경험한 파라소찰의 외로움으로 지상의 인간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에스터의 의지, 그리고 인류에게 단 한 번의 기회라도 더 주길 원하는 작가의 소망까지 가볍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2. 로맨스, 한 차원 높은 사랑으로서의 가능성
이 소설은 신선하고 조금은 파격적인 ‘플라스틱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시작되었다. 단편으로서 얼개가 촘촘하고 결말이 완전하다고는 확언할 수 없으나, 그 상상과 묘사의 독특함에서 오는 작가만의 색채가 독자에게 주는 흥미는 문장과 인과에서 보이는 부족함을 크게 상쇄한다. 그렇다고 〈파라소찰〉의 보완점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겠다. 약간의 수정을 통해 이 소설이 더 나은 방향으로 크게 도약할 수 있다면, 사견을 덧붙여도 좋지 않겠는가.
먼저 이 소설의 ‘연대’를 살펴보자. 〈파라소찰〉은 플라스틱이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에서 적어도 수십만 년이 흐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에스터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사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단편은 필요 이상으로 현실을 답습하고 있다. 특별한 연대의 언급이 없다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어느 때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한국의 역사에서 조선과 21세기의 시간이 불과 수백 년 차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그리고 미래를 점치는 수많은 콘텐츠와 과학적 사실, 세상이 변화하는 실제 속도를 생각할 때, “결혼은 여자의 무덤”, “주부가 됨으로써 단절된 경력” 등의 문구가 그 시대에도 유효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읽어도 낡은 어구가 수십만년 후의 사회에도 적용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아포칼립스가 아닐 수 없다.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모호할 수도 있다. 극적인 진화와 외형의 변화가 나타나 인간으로부터 또다른 종이 분화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십만 년 후를 감히 가늠하고자 한 시도는 긍정적이지만, 플라스틱이 열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라면 인간 사회는 최소한 지금과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파라소찰과 에스터의 관계에 집중한 이 소설이 그들이 거주하는 외부 세계의 개연성을 섬세하게 구축할 때 독자에게 큰 의미가 전달될 것은 자명하다. 이 섬세함 안에는 과감함 역시 따라야 한다. 담장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에 기대해 볼 때, 미래의 사회를 그만의 방식으로 묘사함에 있어 능력으로는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에스터가 사는 시대의 사회상과 그 먼 미래에 광물로 굳어져 버린 ‘플라스틱’이라는 물질도 좀 더 살펴보자. 플라스틱을 더 베일에 싸인 신비한 광물로 묘사해 보는 것도 좋다. 미래의 플라스틱이 광물로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에스터가 파라소찰을 만나러 가는 길은 다양해질 수 있다. 지금은 에스터가 파라소찰을 만나는 과정이 너무나 손쉽다. 그 둘의 만남에는 우연과 우연이 거듭한다. 에스터가 학문적으로 플라스틱을 연구함에 갈망이 있고, 그 연구의 끝에서 파라소찰을 만났다면. 그럼 둘의 사랑이 조금 더 애틋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파편적인 자료처럼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도 이 소설과 꽤 잘 어울린다. 상상 속 고고학 사료와 에스터라는 인물, 긴 시간을 견딘 집단의식으로서의 파라소찰,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시작된 지점과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시공간적 배경을 집중력 있는 문장으로 묘사해 간다면 플라스틱과 인간의 대담한 사랑이 더욱 빛나리라고 감히 예상해본다. 그 과정에서 소설이 나아갈 무수한 방향과 줄기를 단단하게 만들 무궁한 재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랑의 모양이 감동적이라 며칠 밤을 샐 독자가 있을 것이다. 에스터의 선택과 의지의 끝에 접촉할 단 하나의 사랑. 그것이 너무도 외로웠던 하나의 물질이라면, ‘또’ 인간에 의해 버려진 어떤 존재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끝내 완성된다면. 가정과 가정의 연쇄 반응이 수십만 년 후의 미래를 내다본다. 인간의 몸으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시간의 뒤에 오직 나를 기다린 익명의 ‘그대’에게 손을 내미는 상상을 해본다. 그대는 나를 무엇으로, 얼마나 반가이 맞을 것인가.
이제는 ‘파라소찰’, 신비로운 이름을 갖게 된 그것은 피조와 창조를 넘어 스스로 존재한다. 단 하나의 외로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