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다. 그는 일관된 사람이다. 많은 것들을 ‘쓸모있느냐, 없느냐’로 나눈다는 점에서, 그는 매우 한결같다.
그 남자가 ‘쓸모있고 없고’의 기준을 들이미는 대상은 다양하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본가 자기 방에 쌓여있는 잡동사니들부터 넓게는 연인과 다툼후에 치뤄야 하는 감정적 대립, 특이하게도 시간까지. ‘쓸모’의 기준으로 그는 자기 삶을 재단해 나간다.
쓸모없는 물건은 버리고, 쓸모없는 감정싸움을 해야하는 이성과는 만나지 않고, (대부분은 너무 지루하기 때문인) 쓸모없는 시간들은 건너뛴다.
특히 시간에 대한 그의 효용은 조금은 강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는 헤어지자는 연인을 ‘일어나지 못할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건 바보 같기 때문에’ 잡지 않는다. 함께 낚시를 가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어차피 약속을 정할거라면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날짜를 잡고,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을 보며 ‘시간 아깝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만의 기준은 쉽사리 변하지 않아서, 연인과 헤어진 후 아픔을 감내하고 삭여야 할 시간을 그는 ‘쓸모없는’ 것으로 재단해 건너뛰고 만다.
그렇기에 그가 아버지와 낚시를 가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세월을 낚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낚시의 핵심은 ‘기다림’이다. 그의 기준에서 보자면 ‘쓸모없음’의 총합일 이 행위를, 그는 아버지를 위해 묵묵히 수행한다.
그러나 이것은 효도의 변형된 형태일 뿐 그가 자기만의 기준을 포기하거나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세상을 같은 잣대로 보고 있고, 그런 그를 시험하듯 그의 아버지가 의식불명으로 쓰러지는 일이 발생한다. 낚시보다 더 의미없을 시간들이 흘러간다. 변함없는 아버지, 변화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부활을 기대하며 무력하게 보내야 하는 시간들.
그는 여전히 같은 기준을 들이댄다. 투병시간 건너뛰기. 무의미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건너뛰기를 선택한 그를 맞이하는 건 깨어난 아버지가 아니라 장례식장이다. 그러나 이 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부재에 슬픔을 삭여내는 대신 ‘건너뛰기’로 대응한다.
그러나 어쩌면 좋으랴- ‘쓸모없음’의 기준이 틀렸을 때, 그가 아직 젊은 시선으로 미처 그 이면에 아로 새겨진 ‘쓸모’를 알아차리지 못해 함부로 ‘쓸모없음’으로 재단해 넘겨 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 그는 그 값을 뒤늦게 치르게 된다. 더 절절하고, 힘들고, 아프게.
극단의 효용을 추구하는 이 인물은 여러모로 내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더 빠르게, 더 알차게, 더 효율적으로를 추구하는 사람들. 어쩌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 있는 일면 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이 인물에게서 내 안의 어떤 면을 보았기 때문에, 인물이 맞이하는 결말이 몹시 쓸쓸하고도 마음 아팠다.
‘쓸모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고, ‘쓸모있는’ 인간이 되어야만 살아남는 이 사회에서, [쓸모있음]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애시당초에 ‘쓸모’있고 없고의 기준점 자체가 ‘쓸모’있는 것일까? 인간도 시간도 모두 기계의 부품처럼 효용성 측정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만 같아 씁쓸한 맛이 오래 남았다. 판타지적 소재에서 철학적 질문을 떠올리게 한 좋은 글, [스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