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판타지에서 살아남는 법 공모(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공모채택

리뷰어: 휴락, 22년 3월, 조회 133

‘판타지’라는 장르 하면 생각나는 몇 가지 설정들이 있습니다. 존재감 흐릿한 중앙과 기세등등한 지역 영주들, 현명하고 강력한 마법사, 폼 나는 기사와 모험가,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거대한 암시/예언, 드래곤 등을 위시한 가공할 적들, 아름다운 공주님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워낙에 단단히 고정된 공식이라 식상하다 싶으면서도 또 없으면 허전한 것들입니다. 표절 걱정 없이 간편한 도구이기까지 하니, 작품에 고민하는 필자 입장에서는 마냥 가까이 하기도 멀리 하기도 힘듭니다. 이 도구를 대하는 입장에서부터, 작품의 큰 줄기 몇 가지가 결정되기 마련입니다.

 

작품으로 들어가 봅시다. 판타지입니다. 소위 봉건제로 대표되는 중세 서유럽보다는 중근세 동아시아에 가까운 배경 아래, 단국은 역성혁명으로 새 깃발을 세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까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듯 보입니다. 단국 중앙정부에서는 지방관과 병사를 내려 보내고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만, 정작 비랑도에 숨어든 위국 잔당이나 그와 결탁한 성주(지역 토호들), 해적들에 까지는 영향이 미치지 못합니다. 위국 입장도 녹록치 않습니다. 나라 잃고 숨어 사는 입장도 입장이거니와, 유약한 지도자 천성과 그를 노리는 야심가 천환, 관료들 간의 알력다툼으로 어지럽기로는 남부럽지 않습니다.

그런 그들을 그나마 강하게 묶어주는 틀은 바로 상존 신앙과 천손, 계시라는 뿌리입니다. 천성과 위국의 중추들에게 이는 막연한 동시에 잘 알 수 없기에 두렵습니다. 그런 막연함과 두려움을 형상화한 붉은 별과 신비로운 힘을 지닌 단성주는 조력자라기보다 시험하고 관찰하는 자로서 불안을 증폭시킵니다. 단국 측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 호기심과 야심을 품은 셋째 공주를 파견해옵니다.

본 작품은 ‘판타지’라는 토양에서 동일하게 시작하되 방향성은 다릅니다. 서유럽 봉건제 사회와 같이 느슨한 국가결속력을 바탕으로 모험담을 펼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기사나 용사, 그에 수반되는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앙집권적이지만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바탕으로 정치극을, 때로는 심리극에 가까운 이야기를 펼쳐 나갑니다.

또한 단독 주인공은 없으나 크고 작은 비중의 주역들은 존재하는 군상극인 본 작품 특성상, 각자에게는 각자 나름의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미약한 비랑도의 위국 입장에서는 거대한 본토의 단국이, 이성을 중시하는 단국 입장에서는 괴력난신에 가까울 위국이 꼭 드래곤 같은 가공할 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정리해서, ‘판타지’의 공식이란 것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딱 정립해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법한 것입니다. 입증되고 편리하지만 식상하고 뻔합니다. 이 지점은 작품에 애착을 갖고, 나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고민하는 모든 필자들의 고민거리일 겁니다.

본 작품은 그 지점에서 고민한 결과, 공식을 차용하되 변주를 주는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주 영악한 방식인데요, 일반적인 공식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낯선 감정을 느끼게 하면서도 어쩐지 낯익은 감상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더불어 일반적인 독자 이외에도, 기성 작품과는 다른 별난 요소를 바라는 소위 ‘힙스터’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 독자층을 누구로 설정하느냐 또한 필자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보통의 경우 일반 공식과, 양측을 모두 끌어안고 싶은 필자의 야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맙니다만(그렇다고 그게 실패란 뜻은 아닙니다. 재밌는 건 어쨌든 재밌으니까요), 본 작품은 그 중간점을 잘 잡은 것 같습니다.

 

판타지도 이제 나름 연차가 쌓인 장르입니다. 마냥 익숙한 것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고, 그에 따라 다루는 배경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동양, 나아가 동아시아의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은 그리 흔하다 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일까를 고민해보니, 특히 동아시아는 일찍이 중앙집권적인 관료제 사회를 구축해 발전시킨 터라 가벼운 모험담을 펼치기엔 복잡하고 답답한 배경이라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야기의 운신의 폭이 제한되는 것은 치명적이죠. 그런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곧잘 나라가 망하는 등의 재난이나 전쟁 같은 혼란을 부여해 숨통을 틔우는 꼼수를 쓰곤 합니다만, 본 작품은 나라는 이미 망해 다른 나라가 그 자리를 차지했죠.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고, 짧은 객기로 끝날지 더 큰 혼란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고요. 1부와 2부 현재까지 제한된 공간에서도 이야기를 끈끈하게 끌고 온 필자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2부는 갓 시작된 참이고, 아직 3부까지 예정된 만큼 갈 길은 멉니다. 정리된 공간에 혼란이 부여되었으니 통제하기 힘든 부분들이 생겨날 겁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영리하게 공식과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해온 필자이니만큼 앞으로도 잘 묘기를 보여주리라 여깁니다. 지난한 한 달의 휴재도 곧 끝나는 만큼 이어질 이야기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