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닥다리 감성이라는 말을 자주 듣긴 하지만 전 꿋꿋이 연식이 쌓인 영화를 즐겨 봅니다. 공포와 스릴러를 사랑하는 제가 찬양해 마지않는 감독 중 한 명인 존 맥티어난이 제작한 ‘붉은 10월 사냥’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프레대터라는 대표작의 임팩트가 세다 보니 잘 언급되지 않는 영화긴 한데 제가 손에 꼽는 수작 밀리터리 스릴러 걸작입니다.
존 맥티어난 감독은 어떤 스타일의 스토리던 스릴러로 만들어버리는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뭘까 생각해봤는데, 제가 찾아낸 비밀은 바로 속도감이었습니다. 그의 영화는 긴 시간을 다루지 않습니다. 항상 빡빡한 시간 제한 속에서 뭔가를 찾고 뭔가에게서 도망쳐야 하죠. 거기에 꽉 짜여진 스토리의 긴박감과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을 더하면 바닷가에서 먹는 해물 짬뽕처럼 맛이 없을 수가 없는 겁니다.
사설이 좀 길었군요. 이 작품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할까 하다가 갑자기 ‘붉은 10월’이 떠오른 이유는 제가 오늘 소개드리려고 하는 이 작품에 반한 이유가 바로 속도감이기 때문입니다. 판타지 소설에서 보통 기대하지 않는 장점이죠.
‘빛의 유지: 비랑도의 별’은 탄탄한 스토리와 스피디한 전개로 몰입도가 매우 높은 장편 판타지 소설입니다. 동양풍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서양 풍의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분들도 거부감 없이 빠져드실 수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 그건 이 작품이 장대한 배경 설명보다는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사건들과 인물 사이의 얽힘으로 이야기를 힘있게 끌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판타지의 중심인 세계관이 빈약하지는 않습니다.
과거 영광을 누리던 위국이 멸망하고 단국이 들어선 대륙, 망국의 왕자와 그를 모시던 충신들은 작은 섬 비랑도에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존이라는 절대신을 섬기며 그가 내려주는 예언의 그 날을 기다리던 위왕의 후예들은 어느 날 , 예언서에 나온 대로 비랑도 근처의 하늘에서 떨어지는 큰 별의 형상을 발견하고 혁명의 때가 왔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강력한 제국을 이룬 단국의 왕 또한 별의 불길한 징조를 보게 되고 야심으로 가득찬 삼녀를 비랑도로 보내게 되는데… 다시 일어서려는 자들과 스스로 일어서려는 자, 어딘가에 기대어 보려는 자들과 전운에 편승하려는 자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의지가 비랑도라는 작은 섬에서 부딪히게 됩니다.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진 ‘그래도 판타지는 용과 엘프가 나와줘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얄팍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생각이 박살나는 데는 3화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작품의 매력이 워낙 많지만 제가 첫 손에 꼽는 장점은 속도감입니다. 비랑도 근처 해안에 커다라 별이 떨어지는 광경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 날 밤의 전개만으로도 몇 화가 훌쩍 넘어가는데, 인물 하나하나의 매력을 살리기에도 빡빡한 분량에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숨막히는 긴장감과 박력을 넣으셨더군요. 특히 대단한 점은 시간의 흐름이 빨라진 후반부에 가서도 그 속도감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새로운 사건과 이야기로 꽉꽉 눌러담겠다는 작가님의 장인정신이 팍팍 느껴집니다. 그 와중에 인물들의 매력 또한 훌륭합니다. 이야기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는 명현량은 최근 여성 독자들이 원하는 차가운 도시남자의 매력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멋진 캐릭터를 만드는 건 쉽지만 수많은 성격과 배경을 가진 캐릭터를 있어야 할 자리에 놓는 건 어렵습니다. 이 작품에서의 인물들은 대부분 그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독자들이 바라는 그 자리에 잘도 들어가 있습니다. 작가님의 오랜 고민이 느껴지는 부분이고 그래서 읽을 수록 작품에 더욱 신뢰가 가는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노골적인 성적 묘사 없이 이야기를 끌어가시는 것도 매력적입니다. 장편 소설의 경우 호흡이 길어지다보면 이야기가 늘어지는 시점에 눈길을 끌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은 과격한 장면을 넣는 작가님들도 계시거든요.
성인 취향의 소설을 쓰시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작가님의 프로 정신에 감탄과 박수를 보냅니다.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전개상 므흣한 장면들이 등장할 때도 있지만 눈쌀을 찌푸리게 하거나 이 시점에 저런 장면이 왜 나오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작가님은 지금까지 공개된 분량이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하셨습니다. 2부와 3부에서도 이런 스피드와 스릴을 가득 담아내실 수 있을 지 걱정보다는 기대가 많이 됩니다.
사실 1부에 어느 정도 중후반부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지 예상이 되는데, 작가님이 독자분들의 예상을 얼마나 멋지게 깨주실 지 궁금하네요. 사실 1부에서 끝맺음을 하셔도 무리가 없을 만큼 현재까지의 완성도가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러다 보니 더 긴 호흡으로 이어가야 할 2부와 3부에서 신선함이 떨어질 수도 있고 현재까지 잘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조금 느슨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조금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야기에 필요한 중요 인물들은 거의 등장했고(남은 건 성국과 종원소 정도려나요?) 이제 이 인물들간의 갈등과 새로운 사건들로 이야기를 끌어가셔야 하는데 2부에서는 어떤 멋진 마법을 부려주실 지 기대가 되네요.
회사에서 눈칫밥 먹어가며 ‘빛의 유지:비랑도의 별(1부)”를 미칠듯한 속도로 집어삼킨 소감을 풀어놓자면
1. 천성이 너 2부부터는 고구마 그만 먹이고 제대로 해라. 지켜보겠다. 우유랑 사이다 준비해놨다.
2. 경의 선주는 순수한 욕망이 담긴 눈은 충분히 봤으니 이제 황위 찬탈을 노릴 정도의 실력을 보여줘라.
3. 도천령은 어찌 보면 바티칸의 교황이나 고대 국가의 제사장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자인데 2부에서는 비실비실 쓰러지지 말고 강한 모습을 보여라.
4. 등장하는 연인들은 키스를 하려면 제대로 해라.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소망입…)
5. 작가님은 쉬지 말고 빨리 2부를…
지금까지도 적지 않았고 앞으로는 더 많은 분량의 이야기가 저와 독자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겠지만 다 읽고나면 후련한 기분과 함께 인생 판타지 중 한 편으로 자리잡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작품입니다.
동양풍 판타지에 대한 선입견을 깨 준 작품이기도 하구요. 분량이 긴 장편은 되도록이면 추천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 작품은 자신있게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100화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