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명 작가의 〈블랙 레몬 소르베〉는 성화여고에 전해오는 하나의 괴담을 배경으로 한다. 학교 괴담치고는 “수능도, 성적도, 귀신도 일절 얽히지 않은” 기묘한 소문은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검은색 편지 봉투에서 시작되었다.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검지만, 그 안에는 상큼함을 숨기고 있는 블랙 레몬 소르베처럼 이 소설은 괴담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 괴담을 이루고 있는 건 복수와 피와 초자연적 현상이 아닌 오직 사랑이다. 겉으로는 오래된 옛날이야기일지라도 현재에 유효한 고등학생의 고백은 상큼한 맛이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이 사랑이 찾아갈 수 있다.
도서관에서 귀퉁이가 낡고 헤진 검정 종이봉투를 발견한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고백하시렵니까
이 단편을 구성하는 인물은 세 명이다. 주인공 소라와 그녀가 사랑하는 바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수현. 말하자면 삼각관계인데 하나의 고리는 나중에 밝혀지는 방식이다. 학창 시절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대부분 한 번쯤 경험하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불도그 같이 칙칙하고 무서운 수학 선생님과 스탠드 책상에서 듣지 않으면 절대 맨정신으로 들을 수 없는 수업 사이에서 하루를 버텨야 하는 학생들에게 사랑은 하나의 윤활유가 된다. 그래도 저 사람을 보면 하루가 살맛 나고, 무엇이든 해치울 것 같고, 역경을 뚫고 나아갈 것 같은 그런 존재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마음도 쌍방으로 오갈 때 최고의 효율을 내는 법. 짝사랑보다는 맞사랑을 위해 오늘도 고백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고백’은 때와 장소, 마음의 표현 방법 등을 신중히 고민해야 하는 과정이다. 비밀을 지키며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야 한다. 모든 것이 잘 맞는 퍼즐처럼 딱딱 아귀가 맞아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다. 하나라도 핀트가 어긋난다면, 결과는 상상하기도 싫다. 고백이란 이토록 고민을 거듭해야 겨우 성공하거나 그마저도 실패하는 일종의 도박인 셈인데 그 ‘복권’을 100퍼센트 당첨되게 해주는 물건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구하고 싶은 심정이 왜 아니겠는가.
성화여고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바로 이 ‘고백’을 통한 사랑의 절대성공을 보장하는 ‘검정 편지 봉투’에 대한 것이다. 편지를 담아서 “교복 안주머니에 품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이루어진다니. 밑질 것도 없고 본전은 건지니까,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아이디어다. 게다가 한 번도, 두 번도 아닌, 열 번, 스무 번, 선배 대대로 성공적 사랑을 보장했던 영험한 봉투가 있다면, 내 인생도 한 번 걸어볼 만하다. 화이트 데이에 문득 사탕을 보면 “걔, 단 거 먹어?”라고 질문하게 되는 누군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소라는 도서관에서 보라는 책은 안 보고 이 전설의 봉투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는 자신이 사랑하는 바다에게 편지를 써 품에 안고 다닌다. 겉옷 안쪽에 깊숙이 묻은 소망은 언젠가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전설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니까. 실패할 리 없으니까.
그런 소라를 보는 수현에게로 시선을 옮겨 보자. 작가는 수현이 소라를 좋아한다는 암시를 작품 안에서 숨기지 않는다. 소라가 바다의 간식 취향을 물어볼 때, 그리고 괜히 역정을 내서 자신과 소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 행동에서도 사실은 수현이 소라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내막이 드러난다. 수현의 사랑은 더욱 슬프다. 소라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현에게는 행운의 봉투가 없다. 그는 전설의 주인공이 아니다.
여기까지 알고 있는 독자들은 당연히 소라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전설의 가호를 받은 소라가 사랑을 쟁취하는 전개를 기다린다. 그러나 내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작품의 흐름을 바꾸는 반전이 숨어있다.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의 신이 보우하사 웬 남학생이 여고 교문을 넘어 들어갈 용기를 낸 것이다. 그 학생이 곧장 걸어가 만난 사람은 바다였다. 게다가 바다는 그 남학생을 거절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전설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말일까. 소라에게는 허무하게 뒤로 돌아서는 선택지만 남은 걸까.
아니다. 이때 불현듯 떠올라야 하는 사랑의 작대기가 또 하나 있다. 수현이 소라를 사랑했던 것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소라가 검은 편지 봉투를 찢으려 했을 때 “찢기엔 역부족”이었던 이유는 “종이가 겹겹이 뭉쳐”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등장하는 수현은 비로소 봉투가 진짜 연결해야 했던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너 좋아하는 것도 일이다 일.”이라고 무심하게 말한 수현은 소라의 옆에 앉는다. 그리고는 레몬 사탕을 꺼낸다.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소라의 말에 수현은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밝혀진다. 아무튼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봉투는 다시 전설을 증명했다. 독자들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작품을 덮는다. 은은하고 따스한 사랑이 소용돌이침을 느끼면서. (이것 봐, 전설은 거짓이 아니야!)
짝사랑이 일방적이라는 괴담의 진실
그리하여 우리의 검정 편지 봉투는 또 하나의 사랑을 이루었다. 블랙이고 레몬인 소르베는 겉과 속이 사실 다르지 않다. 검정에서 나는 상큼함은 의외이기에 더욱 강하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과정이 이렇게 신선해도 되는 것일까. 하늘이 돕고 레몬 사탕이 도운, 누군가의 사랑이 지금도 어딘가에선 연결되고 있다.
짝사랑은 일방적이라는 낭설은 돌고 돌아 쌍방의 사랑을 만들었다. 〈블랙 레몬 소르베〉는 반대 방향을 가리키던 화살표가 점점 방향을 틀어 서로를 가리키는 과정을 신비한 전설과 함께 표현해낸 작품이다. 수천 개의 학교에 수만 개의 전설이 있고 그 전설은 저마다 다른 갈래의 이야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학교 괴담이라는 하나의 서사적 원형이 과거부터 현대까지 각 시대에 걸맞는 문학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곁가지에 곁가지에 곁가지가 돋아나면 나무가 풍성해지는 것처럼 스토리텔링 역시 그러하다.
작가가 제목으로 택한 소르베라는 이국적인 달콤함은 학생들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화이트데이에 사탕은 좀 뻔하고 아이스크림은 바스스 부서지는 느낌이 적으니 소르베가 적당하다. 언제든 입안 가득 특유의 질감을 선물해주는 소르베처럼 이 소설은 간단히 읽기에 좋은 달콤한 부서짐이다.
별안간 끝을 맺는 작품이지만, 우리는 수현과 소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그들은 갑자기 시작된 사랑을 계속할 것이다. 은은한 레몬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것처럼 한동안 마음이 작품에 남는다.
오늘은 한 스쿱의 소르베가 절실한 날이다. 화이트데이가 아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