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선비
어느 선비가 여정 중에 낯선 집에 짐을 풀었다. 신세를 진 그 부잣집에는 거위와 어린아이도 하나 있었다. 집안 어른이 멀리 외출을 하고, 아이는 구슬치기를 하던 밤이었다. 잠든 선비의 방문 앞에 하인들이 몰려와 그를 끌어냈다. 집안에 내려오는 귀한 진주를 아이가 몰래 꺼내 구슬치기를 했는데, 그것이 없어진 것이었다. 하인들은 선비에게 훔쳐 간 진주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지만, 선비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뿐이었다. 결국, 선비는 다음날 관아에 끌고 가겠다는 그들의 손에 이끌려 집안 기둥에 묶였다. 아침이 되고, 외출했던 집 주인이 돌아와 깜짝 놀라자 선비는 연유를 설명하고는 거위의 배설물을 확인해보라고 청했다. 거기에 진주가 있었다. 사람들은 선비에게, 어째서 거위가 진주를 삼키는 모습을 보고도 어제 미리 말을 하여 고초를 피하지 않았느냐 물었다. 선비는 답했다. 그랬다면 하인들이 거위의 배를 갈랐을 터라고.
씹선비질. 언젠가부터 인터넷 댓글 창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표현이다. 이들이 말하는 ‘선비질’이 무엇인가 들여다보면, 실상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고상한 체, 젠체하며 남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쯤을 칭하는 듯하다. 양심을 따라 싸우며 살아온 사람들이 오랜 세월 거쳐 쌓아온 언어를 지독하게 오염시키려는 시도는 끝이 없다. 민주화와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변질되었는가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선비질이라는 기묘한 신조어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조선의 선비 문화는 왜의 사무라이 문화와 대비된다. 일본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사무라이 민담은 상술한 선비 이야기와 아주 다른 결을 갖는다. 아들이 떡을 훔쳐먹었다는 누명을 쓰자 분노한 사무라이가, 그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제 아들의 배를 칼로 가르고 이어서 떡장수의 목도 베었다는 것이다. 사무라이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 이들의 세계는 칼의 세계다.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나의 안위를 위해서, 집단을 위해서는 나와 남의 배를 사정없이 가른다. 반면 선비는 어떠한가. 비록 남에게 신세를 지는 어려운 처지여도, 자신의 수치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작은 생명을 지키고 살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이를 우리는 선비라 불렀다. 자신이 사는 땅의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여 공부하고 시를 쓰고, 아주 천천히 걸으며 꽃향기를 맡은 이들을.
선비의 땅
유권조 작가의 연작 소설 <진달래 선비>는, 진달래 피는 계절에 돌아오는 선비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보고 겪은 짤막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소제목부터 글의 한 줄 한 줄에, 자신이 다루는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깊고 섬세한 시선이 묻어난다. 이야기 속 모든 살아있는 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리하여 진달래 선비의 것과 닮아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환상적인 요소로 가득 찬 이 소설에는 온갖 기이한 존재들과 무서운 일들이 나온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현실 바깥 ‘이세계’가 아닌,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만 같다. 낯선 그들을 이 세계와 잇는 것은 진달래 선비다. 그가 여정 중에 만나는 세계는 때로 무자비하고, 때로 모순적이고, 자주 슬프다. 그러나 그런 풍경과 마주친 경험은 결코 세상을 증오하거나 염세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모든 것을 뚜렷이 바라보고, 싸우고, 어루만진 선비는 진달래가 흐드러지면 자신의 낡은 집에 묵묵히 돌아올 뿐이다. 거기서 다시 선비의 한 세계가 시작된다.
문학은 때로 어떤 낱말의 잊힌 아름다움을 깊은 우물에서 끌어올린다. <진달래 선비>가 그렇다. 선비가 느리게 걷고 낮게 말하는 것은 으스대려는 까닭도 아니요, 현실과 유리된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도 아니다. 그 걸음의 모양은 사무라이의 날쌘 칼 놀림처럼 단숨에 눈길을 빼앗지 않는다. 그렇게 걷다가 선비는 가납사니를 만난다. 입과 귀의 자리가 뒤바뀌어 남의 말을 듣지도, 남에게 말하지도 않는 괴물. 선비를 앞에 두고서 자신의 귀에 대고 말하고 자신의 말만 듣는 가납사니에게 다가가, 선비는 손을 잡는다. 그제야 가납사니는 ‘입으로 듣고 귀로 말한다’.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또 작가로서 나아가고 싶은 지점은 결국 거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발견하고 어떻게 공명해 소통할 것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테다. 오염된 언어를 천천히 조심스레 닦아내고, 잊혀버린 오랜 아름다움을 복권하는 일도 썩 괜찮을 것 같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선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심상이 진달래 흐드러진 언덕 밑에서 텃밭을 가꾸며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이의 모습이면 좋겠다고, 진달래 피는 봄에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