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은 스무 살 무렵에 실수로 고라니를 치어 죽이고 길가에 내버린 적이 있는 나. 명문대를 나와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던 내게 그 기억은 이십 년이 지나도록 생생히 각인되어 있었고, 친구의 권유로 자격증을 취득하여 화물차 운전 기사가 된 이후에는 매일매일 꿈에 고라니가 등장한다. 앞서 가는 화물차를 추월하는 ‘놀이’에 나는 금세 흥미를 잃어 버리는데…
짧은 분량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상향등」은 처음 제 손으로 죽인 생명에 대한 기억에 쫓기는 화물차 운전 기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리긴 하지만 평범하고 특별히 악한 인물로 그려지지는 않던 화자가, 첫 살생의 기억을 반추하며 자신만의 ‘놀이’로 이행하는 흐름이 무척 자연스러우면서도 섬뜩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