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고개의 산신령이 용하다는 말에 노부부가 소원을 빌러 찾아온다. 부디 딸 하나만 점지해 달라는 것인데, 999년 도를 닦아 온 꼬리 여덟 개의 여우 요괴가 부부의 소원을 듣게 된다. 1년만 더 기다리면 축생의 연을 끊어 인간이 될 수 있으나 부부가 가련하기도 했고 자신도 더는 기다리기 싫었던 여우는 직접 부부의 자식으로 태어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부부의 집에 막내딸로 태어나게 된 ‘은혜’는 눈에 띄게 총명하고 예쁜 아이로 자란다. 딸을 갈망하던 부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던 삼신이 뒤늦게 어린 은혜의 앞에 나타나 그녀를 꾸짖는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삼신의 고전적인 대사가 앞뒤 꽉 막힌 것처럼 보일 정도로 삼신의 말에 꼬박꼬박 받아치는 은혜의 거침없는 대꾸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법도를 지키고 측은지심을 지키면 인간도 부처가 될 수 있고, 짐승도 인간이 될 수 있다.’ 비록 1000년을 채우지 못해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은혜는 바로 이런 마음으로 어질게 인간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하지만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인간보다 더 선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어 했던 은혜에게, 하늘의 섭리는 너무도 가혹했다. 글이 전개될수록 각각의 인물들에게 각각의 이야기가 주어지는 탓에, 이 비극을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독자들은 그저 어찌하여 하늘의 섭리란 이토록 가혹한 것인지 하늘에 물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