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장난

  • 장르: 호러, 추리/스릴러 | 태그: #밀실스릴러
  • 분량: 267매 | 성향:
  • 소개: 믿을 수 없어. 내가 여기에 앉아 있다니. 난 그저 영화를 보러 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내가 내 방으로 갑자기 찾아 들어왔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모든 것을.... 더보기

악마의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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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떨린다.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다. 펜을 쥐고 벌써 몇 시간이 지났지만 정리되고 체계적인 것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왔는지 모르겠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공간이 나를 마구 옥죄고 짓누른다. 가슴이 답답하다. 난 한순간도 나를 이 공간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종이가 충분할지 모르겠다. 종이를 더 달라고 하면 줄지 모르겠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 모조리 꿈이고 악몽인 것만 같다. 이 종이에 그 일들을 채워 넣을 생각이다. 볼펜을 받아서 다행이다. 연필이었으면 힘 조절이 안 돼 부러뜨렸을 것 같다. 횡설수설이라도 이해 바란다. 뭐라도 써야만 글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종이를 낭비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마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처음부터 써야 한다. 이 모든 일을 설명하려면.

살인마들의 시대였다. 텔레비전 뉴스마다 살인마가 판쳤다. 나는 색깔 없는 겨울 코트 속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주인아저씨 뒤에 놓인 텔레비전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난날 근방 일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연쇄 살인마. 그자의 공소시효가 오늘로 부쩍 다가왔다는 소식이 나왔다. 점잖은 남성 아나운서의 표정이 심각했다. 화면 하단으로 지나가는 뉴스 헤드라인이 그 전설적인 도끼 살인마를 추종하는 숱한 모방의 역사를 상기시켰다. 나는 그걸 보면서 그냥 춥다는 생각밖에 안 했다.

“여자친구 데려올 생각은 없냐?”

비디오방 아저씨가 살랑살랑 웃으며 물었다. 나는 성인 코너에서 가져온 영화 비디오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설령 만든다 해도 아저씨한테는 못 보여줘요.”

“하긴, 그때는 여기도 졸업해야지.”

체구가 큰 사내였고 품이 넓어 보이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가볍게 비아냥거릴 때 양팔을 들어 ‘여기’를 지시해 보였었다. 노상 하던 것처럼 나를 놀리는 짓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슬슬 접어야 할 자기 장사까지 에둘러 깠던 것 같다. 이 중의적인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무척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일상에 젖어 있던 나 자신의 모습이 지금 돌아보기엔 너무나 기괴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저씨와 두어 마디 더 나누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대신 앞으로 벌어질 일의 배경이 될 이 장소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곳은 물론 망측한 커플들의 관광명소였다. 그렇지만 세간의 선입견처럼 한눈에 불건전하게 보인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외관상 그곳은 멀끔한 카페였고, 실제로 처음 아이디어도 그랬다. 1층에 바리스타가 서 있고 2층에는 TV를 하나씩 들인 방이 몇 개 나뉘어 있는 곳. 일종의 고급 룸카페였던 것이다.

이 창업 아이템이 야릇한 분위기를 띠게 된 건 집값 때문에 대학로에서 밀려나 골목 안쪽으로 으슥하게 비집고 들어간 탓도 있을 것이고, 본래 이 자리에 들어서 있던 진짜 비디오방의 상품들을 인수할 때 같이 사들인 탓도 있을 것이다. 당초 계획은 만화방까지 겸할 생각이었단다. 그런데 돈이 부족해서 마침 끼워 판 비디오로 때워 보려 했단 거였다. 결과적으로 그 결정은 ‘비디오 룸카페’라는 해괴한 간판을 내걸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곧 유익하지 못한 딱지가 붙었다. 아저씨는 패착을 무르기는커녕 아예 유리창에 ‘방음완비’라는 종이를 프린트해 붙여서 주 고객층을 바꿔 버렸다.

뉴스가 끝난 텔레비전 화면 한편에 자막이 떠 있었다. 방송국 주관으로 제작된 특집 프로그램이 밤에 방송된다는 내용이었다. 도끼 그림이 배경이었고 ‘우리 사회에 남긴 자국.’ 문구는 대충 그랬다. 나는 그것을 뒤로 하고 2층으로 올라가 방을 골랐다. 그날은 평일이었고 더구나 오전이라 모두 비어 있었다. 오해를 막기 위해 쓰는데 나는 백수건달이 아니다. 평범한 대학생이고 그날 시간표가 오전 첫 타임 이후 오후까지 쭉 공강이었을 뿐이다. 하나씩 방문을 열어보고 가장 깨끗해 보이는 처음 방에 들어갔다.

문가에 뭔지 모를 화초 화분 하나가 있었다. 그것 말고는 3인용 소파 하나, 벽걸이 텔레비전 하나, 탁자 하나, 탁자에 딸린 의자가 네 개 정도였다. 나는 자리만 잡은 뒤 담배 한 개비 피고 올 생각으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그러나 남아 있던 게 한 개비뿐이었다. 나중에 새로 한 갑 사려니까 쪼들리는 지갑 사정이 기억났다. 잠깐 고민하다 혀를 차고 코트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가방을 대충 소파 위에 던져 놓고 TV를 켠 뒤 비디오를 재생 장치에 삽입했다.

주인아저씨가 볼썽사납게 놀리긴 했어도 내가 그때 보려던 영화는 포르노가 아니었다. 스릴러물이었다. 평범한 스릴러물이다. 적당히 야하고 적당히 폭력적인. 그리고 대중적으로 꽤 유명한 작품이다. 아까 그 도끼 살인마 이야기를 각색한 내용이긴 했지만 호평 일색이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이 작품을 선정하는 데 나는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갖지 않았음을 여기서 밝혀 둔다. 아무튼 내가 영화가 잘 나오는지 확인한 뒤 똑바로 닫지 않은 문을 잠그려고 돌아설 때였다.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것은 빨간 등산점퍼를 입은 남자였다. 뜻밖의 사태에 난 동작을 멈췄다. 불의 고리를 뛰어넘듯 몸을 웅크리고 잽싸게 문설주를 통과한 불청객은 얼핏 작달막해 보였으나, 방 안에 들어와서 몸을 완전히 펴자 의외로 키가 훨씬 커졌다. 얼굴이 까무잡잡했고 나이를 꽤 먹어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히는 중년의 사내였다. M자 탈모의 시작을 의심케 하는 머리카락의 형태와 굵은 눈썹의 인상적인 대비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약간 쇳내가 풍겼다. 외국인처럼 생기진 않았었는데 잘 모르겠다. 손에 검은색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성급히 달싹이고 있어 완고한데다 거친 인상을 주었다. 그는 씨근덕거리는 입술을 좌우로 한 번씩 당기고 날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내 존재를 발견했다는 듯 극적으로 입을 벌렸다. 이어서 씩 웃었다. 하지만 그건 멋쩍은 웃음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오.”

그러면서도 사내는 자기 어깨에 걸고 있던 스포츠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제 방인 양 자연스럽게 문을 닫았다. 깔끔한 금속음이 났다. 나는 당혹스러워서 아무런 항의도 못하고 있었다.

“앉아. 편하게 있어.”

사내의 목소리는 신사적으로 들렸으나 내가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누구세요?”

“한 가지 재밌는 게임이 있어. 그걸 해 보자고.”

사내가 대답 대신 지껄였다. 나 역시 정말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에 돌려줄 “여긴 제가 빌린 방인데요.”가 목구멍에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사람이 있는 줄 알면서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사내는 스포츠백을 질질 끌어 방 한쪽에 놓인 탁자까지 옮긴 뒤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것의 지퍼를 끄르며 재차 권했다.

“자, 맞은편에 앉으라니까. 시작이 빠를수록 좋다고.”

나는 그의 부름에 침묵으로 응답했다. 그리고 고집스럽게 그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 두 눈은 휘둥그레졌고 뒤통수 한가운데를 망치로 맞은 듯한 기습적 충격이 찾아왔다.

놈은 가방에서 새까만 권총을 빼 들고 나를 겨누며 말했다.

“앉으라니까. 저기 의자 있잖아.”

내가 이 사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권총이다. 이 나라에서 만날 기회라곤 영화 속밖에 없는, 경찰이나 갱스터가 들고 다니던 검은색 네모반듯한 플라스틱제 권총이다. 충격에 반응하는 뇌가 시간을 두고 감각 정보를 천천히 실감한다는 상식이 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 내 뇌는 초장부터 공포에 질렸다. 이를테면 온몸이 싸늘해지는 걸 느끼는 작업 말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때 놈의 목소리가 유난히 친절하게 들린 기억이 난다. 내 머릿속은 이미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고 얼간이처럼 눈알만 뒤룩뒤룩 굴려댔기에, 빨간 점퍼 사내는 내가 자기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지 몇 번이나 재확인해야 했다.

“알겠어? 스무고개 같은 거라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 정답을 구체화하는 논리 추론 게임이야. 갑자기 무례한 요구하는 것 같아도 이해해. 친구들과 내기를 하나 했거든. 스무고개 어떻게 하는지는 잘 알지? 그래, 자, 그럼 이 이야기를 들어 봐. 한 산장이 있어. 사람들에게 방을 주고 숙소를 제공하는 곳이야. 한데 어느 날 그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어. 소리를 듣고 산장 주인이 허겁지겁 달려가 방문을 열었지. 눈에 들어온 것은 두 남자였어. 한 남자는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어. 그 옆에 내팽개쳐진 권총이 하나 떨어져 있었지. 그리고 다른 남자는,”

그가 내 표정을 살피며 뭉뚝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빨간 등산점퍼를 입고 그 곁에 서 있었어. 내 말 알아듣겠어?”

그 비유는 너무나 직관적이고 명확해서 다른 의미라곤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내 풍선처럼 팽창하는 것 같은 머리통을 들고 있기가 힘들어졌다. 떨리는 머리를 처박고 탁자 위에 대 놓은 권총만 쳐다보고 있으니, 사내는 주목하라는 듯 총구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이게 주어진 상황이야. 그리고 넌…… 그래, 스무 가지 질문을 통해 이 남자의 살인 행위를 증명해야 해.”

그가 몹시 흥분된다는 듯 작은 눈을 반짝였다. 어딘가 과장된 것이 틀림없는 듯한 열기가 붉은 얼굴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무척 강렬한 공기가 방을 휩쌌다.

“실패하면 널 죽일 테니.”

그것이 놈의 선언이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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