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수당과 더불어 강남의 흑도무림을 양분하며 패권을 다투었던 철검장에는 세 마리의 개라고 불리는 고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름 대신 황구, 백구, 흑구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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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딱 좋은 때로군.
동이 트기 전의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동쪽 산 위로 하늘은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조금 전까지 밤하늘을 짓누르던 검은 구름들도 귀퉁이부터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늘의 변화에 맞추려는 듯 땅에서도 화광이 일어났다. 사실 아까 전부터 불은 사방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것일 뿐. 적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였다.
이번에 철검장은 흑수당에게 완전히 당해버렸다. 지난 10년에 걸친 강남 흑도 무림의 반목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화친의 대화가 오가는 중에 그들 철검장은 정예들을 엄선하여 흑수당의 본거지를 기습했다. 비겁한 짓이었다. 하지만 가장 비겁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이다. 그런 철검장주의 신념을, 그리고 그 신념 위에 세워진 계획을 흑수당은 보기좋게 되받아쳐 버렸다. 철검장의 기습을 예상하고 자신들의 본거지는 비운 채 거꾸로 철검장주와 몇 안 되는 심복들만 남은 철검장을 기습해온 것이다.
전력을 기울여 서로 맞상대 했다면 승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철검장 쪽이 약간 우세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략 대 계략의 싸움에서 비겁함과 비겁함의 겨룸에서 진 것은 그들이었다.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맞서 싸운다는 항전의 기세를 드높이고 뒤로는 철검장주를 호위하여 극히 소수의 심복들만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끝까지 비겁한 한 수였지만 이미 말했듯이 비겁한 것이 강한 것이다.
물론 추격을 막을 대책은 필요했다. 겨우 서너 명에 불과한 도망자들을 수백의 적들이 뒤쫓는다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래서 그가 남은 것이다. 철검장주와 심복들이 탈출로로 삼은 지하도의 입구를 단독으로 지키는 임무를 받고서.
그는 지하도의 입구 옆에 기대어 세워두었던 무기를 잡았다.
무기는 구환도. 휘어진 칼날의 길이가 세 자 다섯 치, 손잡이가 한 자 해서 네 자 다섯 치나 되는 거대한 무기다. 칼날의 폭도 일곱 치나 돼서 얼핏 보면 널판지를 들고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가 지하도를 막고 서서 최후의 퇴로를 지킨다고 했을 때 철검장의 동료들이 못미더워한 것도 바로 이 무기 때문이었다. 그의 용기나 능력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겨우 사람 둘이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그 좁은 지하도에서 그렇게 거대한 무기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만의 방책이 있었다. 구환도는 칼등을 따라 나란히 아홉 개의 구멍이 있고 그 구멍마다 쇠로 만든 고리가 하나 씩 채워져 있다. 그래서 구환도, 아홉 개의 고리가 있는 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통 구환도는 칼을 사용할 때에 칼등에 달아놓은 고리가 칼의 몸체와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마주한 적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 말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 그도 여태까지 넓은 곳에서 적과 싸울 때에는 그 효과를 누려 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좁은 장소에서 구환도의 고리는 또 하나의 용법을 가지고 있다.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은 제일 위의 고리를 잡는 것이다. 그렇게 칼을 품에 안듯이 하고 회전하면서 적을 베는 것이 그만의 구환도 사용법,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비전 절기인 반룡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칼을 휘두르지 않고도 이 좁은 지하도를 꽉 채우듯이 막아선 채로 싸울 수가 있고 적은 회전하는 칼날 앞에 고기처럼 썰려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반룡도법은 전적으로 좁은 공간에서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넓은 공간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 큰 무기를 선택하는 이유는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휘둘러 그 파괴력과 길이로 적을 압도하는 것을 노린 선택인데 반룡도법은 스스로 그 장점을 버리고 약점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기술은 철검장주가 거리의 부랑자로 떠돌던 그를 거두어서 철검장으로 데려왔을 때부터 그에게만 은밀히 전수된 것이다. 그것은 즉 그의 은인인 철검장주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을 알고 이날을 위해 퇴로를 지키는 용도로 그를 길러왔다는 뜻이 된다. 철저히 그는 이용되려 거두어진 것이고 길러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세상에는 이용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생명들이 너무나 많다. 그는 정말로 운이 좋아서 은인에게 이용될 기회를 가졌고 거기에 만족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솔직히 말해 그는 이것 이외의 삶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죽을 것이다.
주인을 위해 싸운다. 그것이 그의 삶이다.
주인을 위해 싸우다 죽는다. 그것이 그가 아는 유일하게 옳은 방식의 죽음이다.
생각은 여기서 끝났다. 화광을 뒤로 하고 흑수당의 무리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싸울 시간이다. 죽을 시간이다. 즐겁게, 적극적으로 죽음을 모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