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체절명이라 인식한 순간 머리에 떠오른 것은 멀리 두고 온 본가의 고기 굽는 냄새도, 흐지부지 헤어진 남친도, 148번째 자소서의 수정안도, 완결되지 못한 내 존잘님의 작품들도, 그러게 담배 좀 작작 피울걸 하는 반성도 아니라, 같은 시간대에 편의점에서 일하는 알바 선배의 조언대로 부적이라도 마련해서 붙였어야 한다는 후회였다. 그랬다면 저런 흉한 꼴을 한 귀신에게 농락당하며 죽임당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흡연은 발기부전증 개선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더듬어 보자.
첫날, 그것은 내 방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시무룩한 모습을 한 그것은 흰 런닝셔츠에, 희디흰 삼각팬티를 입고 있었다. 팬티의 불룩한 중심부 라인이 굵은 솔기로 강조되고 있었다.
내가 한 개비를 막 꺼내려던 담뱃갑의 경고 이미지와 같은 차림이었다. 경고 이미지에서는 중요 부위가 고개 숙인 담뱃재로 가려져 있어서 흰 팬티 차림인지 아예 벗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으아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대다가 재활용품 수거장에서 주워 온 듀오백 의자로부터 굴러떨어졌다. 그 와중에 쥐고 있던 담뱃대가 부러져 가루를 날렸다.
침입자는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며 반복했다. 음울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나는 그 남자와 별 차이 없는 차림이었다. 노브라에 면 캐미솔. 캐미솔 바지는 하도 주름이 잡혀 자락이 골반까지 말려 올라가 팬티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라. 그런 꼴을 하고서 깊은 밤 혼자 월세방에서 자소서를 수정한답시고 낑낑거리고 있는 여자에게, 중요 부위가 불룩하게 솟아오른 팬티 바람의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갑자기, 정말 부지불식간에 등장했다. 분명 문단속은 했는데. 몰래 문을 따고 들어왔을까? 내 키패드 번호를 어깨너머로 외운 옆집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거실의 베란다에서? 철봉으로 막힌 틈을 벌리고 들어왔나? 아니면 자소서에 몰두하는 동안, 책상 바로 옆의 창문을 통해 들어왔나?
패닉했다. 목숨의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까.
방금 내지른 비명으로 누군가 이변을 알고 달려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잠깐 스쳤으나 바로 폐기되었다. 건조된 지 50년은 되어 보이는 빌라 2층에 자리한 이 방은 창 너머가 바로 유흥가였다. 자칫했으면 홍등가로 불렸음 직한 분위기의 거리다. 창문 없는 ‘다방’과 술집이 즐비하여 밤이면 밤마다 알싸하고 비린 공기가 감도는 그곳에 여성의 비명 따위는 찹찹 뿌린 양념이나 다름없었다. 옆 호의 주민들? 더 나쁘다. 부부싸움하는 소리며 신음소리며 온갖 소리가 다 문간을 넘는 이곳에서는 남의 방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따위는 애초에 무시하도록 조건화되기 마련이다.
안 그래도 어릴 적부터 예민하여 조그만 텔레비전 소음이나 방문 틈으로 비쳐드는 불빛에도 잠을 설치곤 하던 내가 어째서 이런 곳에 셋방을 얻었느냐면, 보증금과 월세가 정말, 말도 안 되게 쌌기 때문이었다. 방 하나에 화장실 하나, 거실 겸 부엌으로 실평수 19평인 빌라의 월세가 거의 고시원 수준이었다. 아무리 밖의 환경이 좋지 않다 해도 지나치게 싸지 않은가 싶어서 망설여졌지만, 계약 당시 나는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본가로부터 원조가 칼같이 끊겨 말 그대로 나 혼자 힘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싼 곳에 입주한 대가로 한동안 불면증을 얻었지만, 진료비와 약값으로 나간 돈을 생각하더라도 남는 장사였다. 들어온 지 6개월이 넘어가는 지금은 거친 밤에 강력한 수면제로 대처하며 나름 잠자는 요령이 생겼다. 아르바이트는 어차피 새벽에서 낮 동안 했고 험악한 저녁 시간에 나돌아다닐 일이 없었다. 안전 문제야 뭐, 불면증과 함께 감당해야 할 리스크라고 생각했었다. 단속만 제대로 하고 다니면 별일이야 있겠어 싶기도 했다.
진짜 안이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당당히 주거 침입을 당해놓고 후회하기엔 너무 늦다.
처음에 나는 남자가 살아있는 인간인 줄만 알았다. 반사회적인 욕망을 풀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짐승 말이다.
뒤늦게 도망치려 했으나 듀오백에서 굴러떨어질 때 이상하게 꺾인 다리가 찌르르 아프기만 하고 잘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이 드니 남자는 딱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면에 깨끗한 팬티의 솔기가 있었다. 나는 다시 꺅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저기, 담배요.”
음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는 가능한 몸을 움츠린 채로 남자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밉지도 곱지도 않은 인상이었지만 어쩐지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긴장이 점점 풀려 갔다. 나는 용기를 내서 침입자의 얼굴을 살폈다. 거기에는 어떤 폭력적인 기색은커녕, 패기라곤 한 조각도 없었다. 비 맞은 잡종 강아지처럼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강하게 나가면 퇴치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직관이 스쳤다. 그리고 괴상한 상황에 대한 분노가 함께 터져버렸다.
“피울 거다, 왜!”
나는 빽 소리쳤다. 그 바람에 흰 팬티의 남자가 주춤 물러났다. 나는 책상 위를 손으로 더듬어 담뱃갑과 라이터를 집은 후, 새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심장이 쿵쿵대는 리듬대로 얕게 빨아들였다가 내뱉자 연기 때문만은 아닌 눈물이 났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아…… 그러니까.”
침입자가 주워섬겼다.
“발기부전이신 분은 흡연하면 증세만 더 심해지는데…… 그러니까 저……”
그는 꼴깍 침을 삼켰다.
“저, 저도 한 대 주실 수 있나요.”
그렇게 말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내 방은 침묵과 담배 연기만으로 싸였다.
“아, 저기.” 침묵을 깬 건 침입자였다. “죄송한데요,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실은 발기부전의 요정이라.”
“뭐라고요?”
“발기부전의 요정입니다.” 패기 없이 움츠리고 있던 그가 가슴을 펴는 시늉을 하다가 말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상황 파악이 안 되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자칭 발기부전의 요정이 “저어,” 하고 이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나는 흠칫 놀라 뒤로 엉덩이를 뺐지만, 벽에 막혀 뒤로 갈 곳이 없었다.
내 눈에 차오르는 게 당혹감 더하기 일종의 절망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챈 듯했다. 발기부전의 요정이 서둘러 손을 거둬들이고, 새삼스럽게 자신의 몰골을 스캔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근데 부디 안심하세요. 저, 발기부전이라서요. 아가씨를 덮치거나 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답니다.”
도대체 어째서인지 자랑스러워하는 기색까지 섞인 아무말이었다.
그때 나는 남자가 방심하고 있다고 느꼈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 위로 책상 끄트머리를 더듬은 나는 분리수거장에서 주워 온 옛날 스타일의 묵직한 유리 재떨이를 찾아냈고, 그것을 남자의 머리를 겨냥해 던졌다.
재떨이는 재와 꽁초를 뿌리며 날아갔다. 그러고는 남자의 머리를 쓱 통과하여 벽에 부딪치곤 떨어져 굴렀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아, 저는 요정이라.”
“으아아아악!”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물고 있던 담배. 펜. 마우스. 박카스 빈병. 머그컵. 스프레이식 살충제. 코 푼 휴지. 존잘님의 완결되지 않은 단행본을 붙잡아 던지기 직전,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모든 기물을 피하지도 않고 통과시킨 자칭 요정의 몸을 자세히 보았다. 아주 살짝, 흰 런닝셔츠 너머로 내 방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요정입니다.”
자칭 요정이 미안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 그러니까, 한 대만……”
나는 그의 요청을 다 듣지 못했다. 졸도해버렸기 때문이다.
다음 날, 엉망이 된 방에서 의자와 벽에 낑긴 채 자다 깨어난 나는 어젯밤 있었던 일을 고약한 꿈으로 생각하고 넘기려 했다. 내가 집어던진 사물들은 거의가 던져진 채 맨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하나를 제외하곤.
방바닥 한가운데 유리 재떨이가 고이 놓여 있었다. 흘러넘쳤던 꽁초와 재를 깔끔하게 담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