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선

  • 장르: 판타지, 기타 | 태그: #선과선 #이수현 #이웃집슈퍼히어로 #레드스파크 #민영화 #경찰
  • 분량: 95매
  • 소개: “부패한 정부는 모든 것을 민영화한다.” 슈퍼히어로가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시대가 온다면 그런 사회는 과연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더보기

선과 선

미리보기

1

지훈은 경찰에게 쫓기고 있었다.

다이어트 약, 잠 안 오는 약, 공부 잘하는 약 등으로 이름붙인 암페타민 화합물을 대규모로 유통하던 조직의 창고를 알아낸 날이었다. 지훈의 원래 계획은 몰래 숨어 들어가서 창고에 쌓인 증거를 확인하고, 안에 있던 조직원 몇 명을 두들겨패서 잡아 묶은 후에 경찰을 부르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고로 쓰이던 문 닫은 시장 건물에 잠입하자마자 경찰이 도착해서 조명탄을 쏘아댔고, 지훈은 혼란에 빠진 조직원들과 엉켜서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지훈은 일단 공기총을 들고 나오던 덩치 큰 남자를 때려눕히고, 벽을 타고 3층 높이까지 기어 올라가다가 멀찍이 떨어진 건물로 건너뛰고 다시 그 뒤에 있는 건물로 건너간 다음 아래 골목으로 내려갔다. 서울은 모든 건물이 촘촘히 붙어 있어서, 조금만 훈련을 하면 건물 위를 뛰어다니기가 어렵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앞에서 달려가던 그림자가 갑자기 위로 솟아오르거나 아래로 꺼지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사실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위와 아래를 잘 보지도 않았다. 낡은 건물 벽을 타고 몇 층 높이로 올라가서 숨을 죽이고 있으면, 대개 올려다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경찰은 어쨌든 경찰이었고, 보통 사람들만큼 따돌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임 형사가 끼어 있으면 더 그랬다. 임 형사는 지훈을 몇 번이나 추적했고, 실패하면서 경험을 축적했다. 그는 추적조를 여러 명으로 구성해서 사각을 없애고, 위와 아래를 모두 보라고 닦달했다. 게다가 오늘은 특히 인원이 많았다. 검거 작전이 대규모로 펼쳐지고 있었다.

뒤쪽에서 들려오던 발소리는 멀어졌지만, 사이렌 소리가 가까이에서 울렸다. 어디로 갈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사이렌 소리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훈은 잠시 멈췄다가, 판단을 달리 내리고 방향을 바꿨다. 그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접근해서 다시 건물 벽을 타고 올랐다.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라 가스 배관선과 전선이 난잡하게 붙어 있었다.

올라가서 모퉁이 너머로 내려다보니, 경찰차 두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좁은 길을 오가고 있었다. 타고 있는 경찰도 각각 두 명씩이었다. 순간 대규모 인원 배치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그림자 속에 차가 몇 대 더 있었다.

이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면 작은 상가 건물 밀집 지역이 끝나고, 좁은 골목길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버려진 공사 자재와 쓰레기가 가득한 공터로 이어졌다. 그 공터만 지나면 버려진 아파트 단지였다. 산비탈에 위협적인 그림자를 세우고, 노숙자와 피난자와 정체 모를 범죄자들의 집이 되어주는 유령 도시.

대규모 급습 작전이라도 세우지 않고서야, 경찰이 뛰어들기에도 꺼려지는 장소였다. 상당한 인원을 이쪽에 배치한 것도 그래서였다. 공터를 넘어서 도망치는 사람이 없도록 여기에 진을 치고, 반대쪽에서부터 그물을 조일 작정이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건물을 건너뛰어서, 불 꺼진 옥탑방 옆에 내려앉았다. 잠시 아예 여기 사는 사람인 척하고 경찰을 따돌릴까 생각도 했지만, 귀를 기울여보니 방 안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사이렌 소리는 물론이고 여기저기에서 호루라기 소리, 고함 소리, 툭탁거리는 육박전 소리가 울리고 있으니 언제 일어날지 몰랐다.

아래 골목길에 경찰이 몇 명 더 나타났다. 이젠 다른 건물로 건너뛰기가 더 힘들어졌다. 지훈은 슬그머니 빨랫줄에 걸린 후드티를 하나 낚아채어 겹쳐 입고 평상에 앉았다. 옆 건물에서 창을 드르륵 열고 누군가가 밖을 내다보더니 짜증 섞인 말을 중얼거리면서 다시 닫았다.

그때였다. 지훈은 옆 건물 2층 복도 창으로 얼굴 하나가 잠깐 나왔다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어둠 속에 반 이상 가려져 있었지만, 그곳에 숨은 게 동네 주민이 아닌 건 분명했다.

지금 잡히지 않으려면 외면해야 하나. 지훈은 잠시 갈등하다가 던질 만한 물건을 찾았다. 누구에게 무슨 피해를 끼칠지 모르는데,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그는 마침 방 주인이 계단 옆에 놓아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더듬어 잡고 정확하게 조준하여, 던졌다.

퍽! 터지는 소리가 나고 냄새나는 쓰레기에 뒤덮였을 누군가가 기겁해서 욕설을 뱉었다. 소리를 들은 경찰이 우르르 옆 건물로 뛰어올라갔다.

지훈은 눈에 익은 중년 남자가 아래 골목길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긴장을 더 굳혔다. 이제 경찰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건물마다 뒤질 터였다. 지훈이 이미 빠져나갔다고 믿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뭔가는 희생해야 했다. 지훈은 일반 쓰레기봉투를 잡고 잘 조준한 다음 있는 힘껏 던졌다.

강한 어깨 힘 덕분에 그 봉투는 공터까지 날아가서 떨어졌고, 봉투에 붙여둔 자동 조종 스위치가 눌렸다. 지훈에게 ‘레드스파크’라는 별명을 붙여준 바이크가 잠시 빨간 불빛을 반짝이더니, 시동을 걸고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찰차가 공터로 방향을 틀고 바이크를 뒤쫓았다.

지훈은 소동을 구경하는 주민처럼 옥탑 평상에 앉아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다렸다. 상가 반대쪽에서 뛰어다니던 형사와 나머지 경찰관들이 공터 쪽으로 모여들고, 한동안 주위를 뒤지다가 공터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건장한 사복형사 두 명이 제일 멀리까지 걸어가서 유령 도시를 올려다보고 서 있다가 결국 몸을 돌려 돌아오는 모습도 보았다. 경찰이 바이크를 싣고 천천히 철수하는 모습은 특히 아픈 마음으로 보았다.

임 형사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어쨌든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경찰은 그를 잡지 못했고, 그는 무사히 빠져나와 높은 곳에서 저 아래에 서 있는 형사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형사의 깊이 숙인 고개와 허리를 짚은 손, 호흡을 회복하려 들썩이면서도 무겁게 늘어뜨린 어깨를 보고 승리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바이크를 잃어서만은 아니었다.

마침내 철수하는 마지막 경찰차와 함께 아드레날린이 가라앉으면서 뒤늦게 분노가 치솟았다.

대체 저 아저씨는 뭐가 문제일까? 왜 더 위험하고, 중요하고, 나쁜 놈들을 쫓아다녀야 할 시간에 지훈을 잡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걸까? 지훈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정말로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도 여전히 그가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도저히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문제라도 있나?

처음에는 경찰이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잡으려고 드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경찰이란 기존의 틀을 수호하는 존재니까.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되뇌었다.

나는 경찰이 나쁜 사람만 잡는다고 믿는 순진한 어린아이가 아니고,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쯤은 각오하고 있었다고, 경찰이나 언론이 그를 받아들이지 못해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꽤 많은 언론이 지훈을 좋게 보게 된 지금도, 경찰 중에서도 상당수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존재를 눈감게 된 지금도 임 형사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게 가끔은 정말 짜증이 났다.

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까지처럼 묵묵히 사람들을 돕는 정도로는 부족한지도 몰랐다. 임 형사를 포함한 모두에게 지훈이 옳은 일을 하고 있으며 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인식시키는 편이 길게 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포석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이지, 지금은 그런 문제까지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지훈은 겨우 분노를 갈무리하고, 천천히 걸어가는 임 형사의 뒷모습에 대고 조롱이 섞인 경례를 붙였다.

2

서울지방경찰청 수사부 형사과 강력계 소속의 임준오 경사는 그날 간신히 제 시간에 출근했고, 자리에 앉자마자 피곤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면서 컴퓨터를 켜고 뉴스 네트워크를 열었다.

신뢰와 성실. 강력계 20년 경력의 탐정 다수 포진!

준오는 문구에 거의 눈길을 두지 않고 바로 광고창을 껐다. 경비업체나 탐정사무소는 흔히 이런 문구를 선전용으로 달고 있었다. 그 문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헤드헌터가 형사에게 연락을 하기도 했다. 옛날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일이라는 한탄도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베테랑의 가치를 인정해 준다는 뿌듯함도 없지 않았다. 돈이 정말 필요할 때, 정당한 방법으로 벌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준오는 아직 이직을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은 스스로도 구닥다리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경찰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완벽한 조직은 아니라 해도 사명감 없이 할 일은 아니었다. 당장 이겨내야 할 지겨운 서류작성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준오가 각오를 다지고 서류 작성에 뛰어들려는 순간, 막 들어온 윤철이 어깨를 툭 쳤다.

“형님, 계장실로 좀 오시라는데요.”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준오는 끙 소리만 내고 어깨에 힘을 확 넣었다가 빼며 일어났다.

“너 어제 뭐했냐?”

10년 넘게 같이 일한 상사이자 동료는 단도직입적이었다. 준오는 대답하지 않고 천장만 보았다. 쉬는 날이었으니 쉬었다는 거짓말이 나올 뻔했지만,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한다는 건 같은 경찰끼리 예의가 아니었다.

전날에는 마약수사대와 강력계 연합의 대규모 현장 급습이 있었다. 그리고 준오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게 몇 달짜리 작전이었는지 알기나 해? 몇 달 동안이나 우리가 무능하다는 언론의 폭격을 꾹 참아가면서 추진한 일이야. 몇 사람이 얼마나 고생해서 캐낸 정보인지 알 텐데 그걸 미끼로 쓰겠다고 휙 던져줘? 네 그 망할 집착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그 레드스파크인지 파워레인저인지 하는 새끼가 선수를 쳤다면 우리 꼴이 어떻게 됐을지 생각은 해봤냐? 아니면 우리가 어제 그 새끼 잡으려고 쫓아다니다가 또 놓친 거, 그거라도 언론에 걸렸으면 어떤 꼴 났을지 몰라서 그래?”

준오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많아 피로가 누적된 형사과에 언론의 공격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다들 아닌 척해도 신경이 곤두서서 시비가 붙는 일도 잦아졌고, 일하는 속도는 떨어졌으며, 사소한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일정이 어긋났다. 이 와중에 준비한 대규모 작전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경찰청에 폭탄을 떨어뜨린 꼴이 났을 것이다.

“경찰로서 사명감을 갖고 그놈을 잡으려고 하는 건 좋아. 그런데 원래 해야 할 일에 피해를 주진 말아야 할 거 아니냐.”

그러니까 계장이 한 말은 옳았지만, 준오의 입은 건방진 소리부터 뱉고 있었다.

“영웅놀이나 하는 범법자 잡는 건 우리가 원래 해야 할 일이 아니란 겁니까?”

“이 새끼가 왜 이렇게 삐딱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서 그러냐? 네가 갈수록 집착하니까 그런 거 아냐. 그래. 너 그거 집착이야 인마. 지난번엔 검거도 팽개쳐놓고 그 놈 쫓아가다가 기자한테 걸릴 뻔하고 생쑈를 하더니 어제는 마약 쪽에 물먹일 뻔했지. 이러다가 그 슈퍼히어로보다 네가 먼저 사고치게 생겼어.”

준오는 반박하려다가 참고 입을 다물었다. 계장은 책상을 짚고 일어서서 몸을 내밀고 한참 더 떠들다가, 한숨을 길게 내뱉고 물러나 앉았다.

“다음엔 나도 못 봐준다. 정신차리자, 응?”

“예. 주의하겠습니다.”

준오는 그렇게만 말하고 계장실을 나섰다.

무슨 일인지 알 만한 사람에게는 다 퍼진 모양이었다. 준오가 자리에 돌아가자, 옆에 앉은 윤철이 삐걱 소리가 나도록 의자 등을 젖히며 중얼거렸다.

“난 그놈이 먼저 위험한 데 기어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던데요. 그만큼 우리가 다칠 일은 줄잖아요. 그놈이 아무리 두들겨패도 우리 책임은 아니니 좋고.”

지나치게 솔직한 말을 뱉은 윤철은 준오의 험악한 눈빛을 보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그것도 그렇고, 이젠 꽤 오래 봤잖습니까. 별로 나쁜 놈 같진 않아요.”

준오는 대꾸하려다가 말고, 할 말을 찾다가 또 찾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짧게 말했다.

“난 그 녀석이 알고 보면 나쁜 놈일까 봐 이러는 게 아니야.”

윤철은 설명이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눈으로 준오를 마주보았지만, 준오는 제대로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다들 그의 걱정을, 그 ‘히어로’가 법을 무시하고 행동하다가 사고를 칠 거라고 걱정한다거나, 사실은 다 속임수일 뿐 언젠가 제대로 된 범죄의 길에 빠질 거라고 본다거나, 아니면 심지어는 경찰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한다는 사실에 대한 경쟁심리라고까지 보았다. 그런 게 아니었다.

형사 일은 영웅놀이도 아니고 활극이나 모험이나 게임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회사 업무에 가까웠다. 대부분의 일은 끈기와 성실함으로 해나가야 했고 지겨운 서류작업과 재미없는 조율 작업, 그리고 다른 많은 직장인들이 주기적으로 느낄 좌절감과 짜증과 회의와 지겨움을 동반했다.

만화나 영화 속의 영웅은 위험천만한 활극을 벌이며 범인을 잡아다가 경찰에게 던져주고는 으쓱거리며 언론을 지켜보면 그만이겠지만, 경찰은 적법한 절차를 신경써 가면서 피의자를 체포해야 했고, 범인을 잡은 다음에도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끝없는 증거 수집과 영장 신청과 조사와 또 조사와 검증과 송치와…… 일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는 이 짜증스러운 잡무 대부분이 원래 경찰에게 따라오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절차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걸 다 무시하는 게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잘 풀어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못했지만, 그래서 그는 놈을 잡아야 했다.

준오는 아직도 답을 기다리는 윤철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놈은 범죄자야. 우린 형사고.”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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