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 괴물 대소동

  • 장르: 판타지 | 태그: #어반판타지 #프롤레타리아 #자본주의비판 #사회파 #단편 #판타지 #코믹
  • 분량: 76매
  • 소개: “이토록 유쾌한 혁명이라면” 얼떨결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 갑자기 액체 괴물로 변한 사람들, 아비규환으로 변한 서울의 거리. 그런데 나보고, 그 괴물들을 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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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 괴물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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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던 내가, 지금은 키보드로 괴물 몸뚱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평범한 회사원에서 괴물 잡는 히어로(비슷한 것)로 전직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대충 계산해도 로또 맞을 확률보다 낮거나 그에 버금갔다. 나는 쓸데없는 계산을 멈추고 눈앞의 검고 말랑한 몸체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제대로 피격당한 녀석은 괴랄한 소리를 내며 순두부처럼 터졌다. 하얀 사무실 바닥 위로 검은 형체가 후두둑, 흩어졌다.

“연화 님, 청소기요.”

“아, 여기요.”

내가 손을 까닥이며 청소기를 가져다달라 말하자, 연화가 사무실 구석에 놓여 있던 진공청소기를 끌고 왔다. 못 쓰게 됐구만, 이거. 나는 연화가 끌고 온 진공청소기를 한 손에 잡으며 혀를 찼다. 곧 박살 난 점액질의 검은 얼룩이 코하쿠토처럼 반짝이는 결정체로 변했다. 나는 잽싸게 청소기의 전원을 켜고 그것들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결정들이 청소기 목구녕으로 꾸역꾸역 넘어갔다. 청소기 몸체의 LCD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Excellent! ><]

꼴에 먹여 준 밥이 맛있었는지, 기계 주제에 웃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실소를 한 번 터뜨리고는 무전을 연결했다.

"태성 IT 타워 12층, D구역. 완료했습니다."

-수고했어요, 곧 올라가겠습니다.

"네."

무전기 너머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건조한 말투였다. 대화할 때마다 AI와 말하는 것 같아서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요즘 AI 스피커도 이보다 친절하지 싶다. 나는 괜히 오싹해져서 어깨를 한 번 떨었다.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게 등 뒤가 싸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렸다.

"현장 상태는 좀 어때요?"

"아, 동장님."

곧 올라오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동장님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동장님은 나와 연화 옆으로 다가와 엉망이 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의자고 화분이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데도 크게 이상 없다 판단했는지 그가 이번엔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형체가 흩어져 있던 자리에 이제 거대한 액체 괴물 대신 웬 남자가 누워 있었다.

"완전히 못 쓰게 됐구만, 이거."

나와 똑같은 감상을 늘어놓은 동장님이 손에 들고 있던 직원 명단을 넘겼다. 그러고는 발끝으로 엎어져 있는 남자를 툭툭 쳐서 그 몸을 뒤집었다.

"콘텐츠 기획팀 강영준 부장."

동장님은 들고 있던 명단과 누워 있는 남자를 대조하며 그렇게 말했다. 눈을 까뒤집고 있어 흉측하긴 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분명 술에 취해 떡이 된 강부장님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술과 야근을 좋아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가 버렸다. 나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드러누운 그 몸을 보다가 짧게 묵념했다. 옆에서 멀뚱한 얼굴로 나와 부장님을 번갈아 보던 연화가 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왜들 이래요? 그냥 기절만 한 건데."

"쉿, 애도 중입니다."

동장님은 그런 나를 못 말린다는 듯 쳐다보았다. 삼각 고인돌에 면봉을 비빕니다. 내가 대충 중얼거린 뒤 고개를 들었다. 동장님이 구둣발로 강부장님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거, 직원 휴게실로 옮길 수 있겠어요?"

"시도……조차 못 하겠는데요."

불룩 튀어나온 강부장님의 배를 보며 답했다. 아무리 내가 운동이 취미라곤 해도 저 정도의 중량은 무리지 싶었다. 동장님이 연화에게 턱짓하자, 연화도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뭐, 알아서 일어나겠죠. 그럼 그냥 여기 두고. 동장님은 예의 그 무미건조한 말투로 넘겼다. 저 차가운 태도에 아군이라 다행이다, 하는 안도감이 절로 들었다. 저러면서 어떻게 괴물이 안 되고 버텼지. 나는 인간성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오늘까지 누적 포인트는 얼마죠?"

"3,700 포인트입니다."

동장님의 질문에 전기 충격기처럼 생긴 디바이스를 확인한 연화가 답했다. 생각보다 많이 못 모았는데. 동장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래서 1만 포인트 모을 수 있겠어요? 그 물음에 한숨밖에 안 나왔다. 사원들 쥐꼬리만 한 월급에 포괄임금제인 거 알면서도 야근 강요하는 꼰대 부장이 고작 400 포인트라니. 갈 길이 구만리였다.

"됐으니까 둘 다 오늘은 이만 쉬어요. 괜히 더 무리시켰다가 나까지 괴물 될라."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다 우리 히어로들이 하는 일에 숟가락만 얹는 건데."

동장님은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나와 연화는 멀어져 가는 동장님의 뒷모습에 대고 인사를 남겼다. 히어로. 벌써 그 오글거리는 명칭으로 불린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이쯤 되면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너무 허무맹랑한 일이라 그런지 도무지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연화의 손에 들린 디바이스를 바라보았다. 포인트를 다 모으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1.

도시에 갑자기 괴물이 출현하기 시작한 건 딱 한 달 전 즈음이었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천근만근인 몸을 겨우 일으켜 출근 준비를 했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터덜터덜 지옥철에 올라탔다. 그렇게 이동형 지옥에 실려 월급 노예의 하루가 시작되는 회사에 도착한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건물 안은 그야말로 혼비백산이 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다들 좀비처럼 앉아 피 대신 카페인을 수혈하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데,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었다. 인간들은 비명을 지르며 돌아다녔고, 사무실을 점령하고 있는 건 임원들이 아니라 검고 둥그런 괴물들이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불가능했다.

차마 내 자리로 갈 생각도 못 하고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구로동 행정복지센터 동장이었다. 그는 민원 받고 왔다는 말과 함께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동장이 대뜸 나에게 이름을 물었다.

"성함이…… 한리나 씨 맞으시죠?"

"예, 그런데요."

"지금 상황에 대해서 알고 계신 바는 없으신가요?"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잘……"

저승사자처럼 올블랙으로 무장한 동장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잠시 따라와 달라고 말했다. 그 포스에 짓눌려 찍소리도 못하고 얌전히 뒤를 따라갔다. 동장은 나를 데리고 사무실 옆에 딸린 회의실로 향했다. 거기엔 나처럼 연행당한 여자가 한 명 앉아있었다. 시스템 관리 부서 신입, 연화였다.

나는 먼저 와서 앉아있던 연화에게 떨떠름한 얼굴로 눈인사를 건네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구로동 행정복지센터 동장이라던 사람은 우리 둘을 데리고 갑작스러운 브리핑을 시작했다.

"두 분, 오늘 반응을 보아하니 처음 목격하신 것 같네요. 사실 며칠 전부터 도시에 괴물들이 나타난다는 민원과 신고가 접수되고 있었습니다. 저희 구로동 행복센터에서 관할 경찰서와 협력해 이번 사태에 대해 조사한 결과, 아직까지 비슷한 현상은 구로구 디지털 밸리 내에서만 일어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니, 이런 내용은 뉴스에서 다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동장을 쳐다보았다. 동장은 특유의 높낮이 없는 딱딱한 어투로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내 표정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께만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동장이 나와 연화에게 서류철에서 종이를 뽑아 한 장씩 배부해 주며 말을 이었다. 종이에는 큼직한 글씨로 '협약서'라고 쓰여 있었다.

"괴물 퇴치를 부탁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네?"

집 나간 정신을 따라 어이가 가출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저희가 무슨 수로요?"

내가 공격적으로 따져 물었다. 아무리 취미로 호신술을 배웠기로서니와, 감히 괴수와 싸울 정도의 실력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괴물 퇴치라니,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그런 건 영웅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 어안이 벙벙했다. 나의 물음에 동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낸 뒤, 그 중 몇 장을 뽑아 책상 위에 펼쳐 보였다. 그 위엔 괴물의 사진과, 지도, 특징 같은 것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괴물들은 그냥 생겨난 놈들이 아닙니다. 경찰들이 먼저 제압해 본 결과, 괴물의 정체는 모두 인간이었습니다. 공통점을 조사해 보니 평소 비인간적인 행태를 일삼던 분들이더군요. 인간성을 상실한 나머지, 끝내 괴수로 변했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보고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을 믿으라고요?"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시겠죠. 저도 그랬으니."

동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방에서 또 무언가를 꺼냈다. 이번엔 무전기와 전기 충격기를 닮은 기계였다. 동장이 나와 연화의 앞에 그 기계들을 들이밀며 말했다.

"안 믿기시면 직접 잡아 보시죠."

"……이 전기 충격기로요?"

"그건 파라미터 측정기입니다. 무기로 쓸 순 없어요."

"잡으라면서요. 무기도 주셔야 할 거 아녜요."

"원하시는 물건으로 때려잡아 보세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심드렁한 동장의 말투에 열이 받은 나는 확 저 동장의 핸드폰을 괴물에게 던져버릴까 하다가, 겨우 참았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다 눈에 들어온 게 마침 키보드였다. 저게 기니까, 휘두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키보드를 쥐고 여전히 사무실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검은 덩어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대충 액체 괴물처럼 흐물흐물하게 생긴 게 그닥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이 전부인 직장인이라 괴물이 되어도 저 지경인가. 안 그래도 출근하느라 스트레스 받는 거, 화라도 시원하게 풀자 싶어 무작정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그 몸뚱이에 키보드를 정확하게 내리꽂았다.

곧 괴물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떨어뜨린 푸딩처럼 흩어졌다. 산산조각 난 검은 덩어리들이 철퍼덕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뿌려졌고, 그 안에서 나온 건……

송대리님이었다.

내가 키보드로 송대리님을 친 건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사실 송대리님은 사내에서 아주 유명한 부르주아였는데, 그게 손목의 묵직한 롤렉스 한 방이나 주차장의 조용한 람보르기니 덕분이 아니었다. 확성기처럼 본인 입방정으로 제 집안이 얼마나 잘났는지 매일 광고하던 덕택이었다. 평소에도 재수 없어서 가끔 입을 틀어막아 주고 싶긴 했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멱을 따 버릴 줄이야. 심장이 멋대로 벌렁거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연화도 적잖이 놀랐는지 입을 떡 벌리고 굳은 채 서 있었다. 반면에 동장은 태연하게 걸어와 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보셨죠? 별거 아닙니다. 그냥 방금 하신 일을 계속해 주시면 됩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별게 아니에요. 사람을 때려잡아야 하는데. ……설마 대리님 죽은 거 아니죠?"

"곧 깨어날 겁니다. 아까 퇴치라고 말씀드렸는데, 정확히는 구마에 가깝습니다. 때려잡으시는 건 괴물 쪽이지 사람은 아니에요."

구마라니, 그렇다면 더더욱 자격이 필요한 일 아닌가. 연화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난 무당도 아니고, 부적도 쓸 줄 몰랐다. 방금처럼 무식한 방법으로 구마했다간 실수로 사람을 쳐 구속될 가능성도 무시 못 했다. 더군다나 나라고 해서 괴물로 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나는 이 동장인지 된장인지 모를 사람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말했다.

"……저의 뭘 믿고 부탁하시는 거죠? 저희도 이렇게 변하면 어쩌시려고요."

"아, 그거야 이미 사전 조사를 마쳤습니다."

동장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펼쳐 빠르게 종이를 넘겼다. 아, 여깄네요. 찾던 문서를 발견한 동장이 연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설연화 씨. 평소 워낙 욕심 없이 사셨더군요. 생활도 검소하시고. 행실도 바르셔서 문제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한리나 씨는……"

동장이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불신의 눈빛으로 동장을 마주 봤다. 난 저 얌전한 신입처럼 그렇게 품성이 곱지도 않고, 다혈질에, 걸핏하면 욱하는 데다가 반항적인 인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객관화 하난 자신 있던 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분명히 자격 미달이다.

"근태 평가가 45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몇 점이라고? 아니, 그보다 나도 모르는 내 근태 평가 점수를 파트장도, 부장도 아니고 일개 동사무소 동장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내가 뜨악한 얼굴로 동장을 올려다보자, 그가 나와 눈을 맞추더니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보다 더 인간적일 수는 없죠."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