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일생

푸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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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둠이 깔리는 항구에 후덥지근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정각 8시. 토마스 호가 출항 사이렌을 울렸다. 부산 국제 여객 터미널을 출발, 일본 후쿠오카와 가고시마를 3박 4일간 순회하는 2만 5000톤급 크루즈 유람선은 서서히 남동쪽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나는 6층 데크의 625호 객실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대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4평 남짓한 객실에 있자니 이내 갑갑증이 몰려왔다.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동그란 현창은 고정된 채 열리지 않았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8시 10분. 약속된 시간보다 5분이 빨랐다. 굵직하고 느릿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 선생? 나 박이오. 배에 잘 탔으리라 생각합니다. 곧 공해로 빠질 테니 마지막 연락이라 생각하고 들으십시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전망대에 올라가면 이쪽에서 보낸 여자가 있습니다. 붉은 옷을 걸치고 검은색 가방을 들고 있을 겁니다. 앞으로 일은 그녀와 상의하십시오. 물건은 가고시마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날, 그러니까 사흘 뒤가 되겠지요. 배 안에서 넘겨주면 됩니다.”

“잔금은 어떻게 치르실 겁니까?”

잠시 뜸을 들이다 내가 물었다.

“허허, 그 문제는 걱정 마시오. 결과만 확인되면 바로 입금될 테니. 그런 돈 떼먹을 만큼 나 쫀쫀한 사람 아니오. 다른 질문은?”

“…….”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어졌다.

객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 갑판으로 올라갔다. 아파트 13층 높이에 길이가 200미터가 넘는 배는 길을 헤맬 정도로 컸다. 휴가철 피크가 막 지난 8월 중순이지만 황톳빛 갑판은 짐을 풀고 나온 피서객들로 북적였다. 가족 단위 관광객이 대부분이고 커플룩을 입은 젊은 남녀도 더러 보였다.

여자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배 후미에 서서 스크루가 갈라놓은 하얀 뱃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홍색 민소매 원피스가 늘씬한 몸매를 더 돋보이게 했다. 긴 생머리가 바람을 타고 허공에 풀풀 날렸다.

나는 여자 옆으로 다가서며 헛기침을 한번 뱉었다. 그녀는 눈빛을 맞추기가 부담스러운지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윤 선생님?”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감정을 죽인 건조한 말투. 알이 큰 갈색 선글라스에 얼굴이 가려 정확하진 않지만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도톰한 붉은 입술과 오뚝 솟은 코가 도발적이다.

나는 대답 대신 말보로를 하나 빼물었다.

“가네다 다쓰오는 내일 저녁 후쿠오카에서 승선합니다. 예약된 방은 732호. 동행은 없습니다. 모레 가고시마에선 활화산 관광과 시내 투어가 예정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부산에 들어옵니다. 반드시 입국 전에 처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회는 모레 하루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길어야 반나절 정도. 만약 실패하는 경우엔…….”

“실패는 없소.”

나는 단호하게 여자의 말허리를 잘랐다. 의도적으로 코웃음을 날리고 담배를 길게 빨았다. 연기는 바람을 타고 옆으로 흘러갔다. 여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 또한 침묵이 불편해 시선을 먼 바다로 가져갔다. 사위는 그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수평선에 집어등을 환하게 밝힌 오징어잡이 배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촉박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촉박하단 말이야. 이런 일일수록 시간이 필요한 법이거늘. 쯧쯧.”

나는 곁눈질로 여자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 부분에 대해선 미리 얘기가 됐을 텐데요?”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큰 걸로 한 장이면 적은 돈이 아닙니다. 느긋한 일이었다면 아마 우리 쪽에서 해결했을 겁니다. 윤 선생님이 소문대로 유능한 해결사라면 그 정도 핸디캡은 감수해야죠.”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검정색 프라다 숄더백에서 갈색 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보신 후 태워 버리십시오. 엉뚱한 사람한테 칼질 않도록 얼굴 잘 기억해 두시고. 좀 된 사진들이라 흐릿합니다만.”

여자는 선실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또각또각 일정한 간격의 하이힐 소리.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좀 안 어울린다 싶었다. 크루즈를 탄 붉은 하이힐의 여인이라…….

객실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엎드려 봉투를 뜯었다.

클립에 꽂혀 있는 사진은 모두 네 장. 가네다의 첫 인상은 뭐랄까 우둔하면서도 간살스럽다고 해야 할까. 허옇고 둥근 얼굴, 탈모가 진행되는 이마. 눈매는 약간 치켜 올라갔다. 두툼한 볼 위에는 금테 안경이 걸려 있었다. 몸집은 통통했는데 그다지 커 보이지는 않았다. 사진이 낡긴 했지만 신체적 특징은 금방 파악됐다.

A4용지 한 장이 추가로 흘러나왔다. 가네다 이력이 비교적 자세하게 정리돼 있었다.

42세. 오사카 출생. 사기와 폭력, 소매치기 절도로 세 차례 투옥. 3년 전 출소 후 현재 후쿠오카의 히라오역 인근에서 세탁소 운영.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뭐야, 이 새끼. 완전 잔챙이잖아.”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난 일류라고 자부한다. 지금까지 다섯을 해치웠는데 모두 이름 깨나 알려진 얼굴들.

작년 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스코리아 출신 아나운서 C의 실종도 실은 내 솜씨다. 스포츠 신문에서 아직도 행방불명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그녀는 지금 지리산 기슭에서 썩어가고 있다.

그런 나에게 아무리 외국인이라지만 가네다는 시시한 존재였다. 야쿠자의 중간 보스 정도는 돼야 쑤실 맛이 날 텐데 겨우 좀스런 소매치기라니. 거액의 돈이 걸려 있는 걸로 자위할 수밖에.

A4 용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부인과는 8년 전 이혼. 자식은 없고 혼자서 생활. 쾌활한 성격이지만 이웃과는 왕래 없음. 술을 즐기고 담배는 안 피움. 취미는 파친코. 20대 때 잠시 폭력 조직에 몸담았고…….

불쑥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촉박한 일이라 해도 박이란 작자는 왜 1억이나 베팅한 걸까. 산업 스파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고 마약 밀수 따위와 연관된 것 같지도 않다.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잡히는 것은 없었다.

전화가 걸려온 것은 지난 화요일. 곽 사장이었다. 진짜 곽 씨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들 그렇게 불렀다. 나 또한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수년째 믿을 만한 거래를 해왔다.

곽은 불륜을 캐거나 떼인 돈 받아주는 흥신소와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로열패밀리들만 상대하는 사무실을 운영했다. 그가 일감을 물어오면 실력 있는 해결사 몇몇이 처리하는 시스템이었다. 내가 그의 눈에 든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윤 선생요, 사람 하나 잡읍시데이. 쪽발이 새낀데 이건 그냥 푹 쑤시면 되는기야. 시일이 촉박하고 일본 원정이라 부담스럽다케도 보수가 아주 괜찮아. 윤 선생 실력이면 거저먹기요. 여행 경비도 그쪽 부담이고. 게다가 선금으로 현금…….”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곽은 말을 빙빙 돌리다 마지막에 속내를 드러냈다.

“수수료로 4할은 떼 주소. 이건 일정에 비해 덩어리가 워낙 크잖은교.”

나는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대답이 없으면 예스라는 사실을 곽은 잘 알고 있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통령 암살만 아니라면 뛰어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청부살인은 1년에 몇 탕씩 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넉 달째 놀고 있었고 게다가 주가 폭락으로 모아둔 돈의 절반을 날린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집 앞 증권사 투자 상담사 새끼부터 조져버리고 싶었다.

의뢰인이 누구인지, 왜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고민해 본 적 없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었다. 단지, 돈이 필요했고 이번 일도 그 상황에 딱 맞았을 뿐이다.

침대에 누워 낡은 사진을 뚫어져라 올려봤다. 그리고 망막에 가네다의 얼굴을 확실히 저장시켰다. 출퇴근길 종각 지하철역에서 만나도 바로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촉박한 시간.

A4용지와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 욕실 변기에 흘려보냈다.

바람이 강해지니 갑판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방송이 영어, 일본어, 한국어 순서로 흘러나왔다.

새 담배에 불을 붙이다 엉뚱한 궁금증이 생겼다. 곽 사장은 ‘검은 유령’이란 작자에게는 어떤 일을 맡길까. 그는 이 바닥 최고 실력자로 소문이 자자하다. 신분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림자처럼 다가가, 흔적 없이 끝낸다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질투심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거품이 섞였다고 나는 확신한다.
얼마 전 국내의 유명 포털 CEO가 새벽 등반 중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적대적 M&A설이 떠돌아 민감한 시기였다. 타살 의혹을 타블로이드판 시사주간지에서 제기했으나 물증은 완벽하리만큼 없었다. 결국 실족사로 처리됐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며 ‘검은 유령’의 솜씨가 아닐까 상상해 봤다.

*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침 항구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산을 떠난 토마스 호는 밤새 항해를 해 후쿠오카의 하카다 항에 입항했다. 선착장에는 전세버스가 줄지어 대기해 있고 우산을 쓴 승객들은 관광을 위해 하선을 서둘렀다.

나는 매일 아침 객실로 배달되는 소식지 《네비게이터》를 들여다보았다. 기항지 날씨와 여행 정보가 꼼꼼하게 담겨 있었다. 오늘밤 늦게까지 많은 비가 올 예정이다.

텅 빈 배에 남아 침대를 뒹구는 일은 무료했다. TV 채널을 돌려봐도 영어로 떠드는 뉴스 아니면 철 지난 한국 드라마가 전부였다.

한숨 자두고 싶었지만 작업을 앞두고는 예민해져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배 안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지겨움이 계속 압박해 왔다. 어차피 가네다는 오늘 저녁에야 배에 오르는데 시내 관광이라도 따라갈걸 그랬나.

오늘 다자이후덴만구 신사를 둘러본다고 했다. 《네비게이터》에는 컬러 사진과 함께 봄마다 신사를 뒤덮는 벚꽃이 장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여름이다. 군내 나는 노인네들과 함께 가이드의 노란 깃발을 쫓아다니기도 쪽팔렸다. 게다가 녹차와 먹는 모찌 맛이 일품이라고 했지만 나는 절대 모찌를 먹지 않는다.

고아원을 나오던 해였으니 아마 열세 살 때였을 게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훔친 모찌를 감나무 뒤에 숨어서 먹다 급체했다. 원장한테 끌려가 밤새 두들겨 맞았다.

그 원장이란 인간은 지금 국회의원이다. 부모 없는 원생들한테는 개밥 같은 식사 먹이고 정부보조금 착복해서 명사가 됐다. 재작년이던가, 그가 「100분 토론」에 나와서 사회복지 정책에 대해 떠벌리는데 주둥아리를 그냥 재봉틀로 박아버리고 싶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임을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은 계속 괴롭혔고 결국 오후에 갱웨이를 걸어 나오고 말았다. 바람 쐰다는 기분으로 가까운 시내나 둘러볼 요량이었다. 그리고 챙겨야 할 물건이 있었다.

부두 2층에 위치한 입국심사대에 갔다. 단체 관광객이 빠져나가서인지 한산했다. 콧수염을 기른 심사관이 여권사진과 내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입술을 비틀고 씩 웃었다. 한국인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Do I have any problem with immigration?(입국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나도 입술을 비틀며 아주 빠른 영어로 물었다. 콧수염 얼굴이 바로 굳어지더니 대꾸 한마디 없이 스탬프를 쾅쾅 찍었다.

전문 브로커를 통해 만든 여권은 완벽하다. 실존 인물의 주민등록증을 정밀 위조했고, 그 주민등록증을 이용해 관청에서 정상 발급 받았다. 서류상 나는 완전히 그다. 사진을 떼고 붙인 위조 여권과는 애초 수준부터 다르다. 나와 서른여섯 동갑인 진짜 주인은 식물인간이다. 세상과 단절된 시골 외딴집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살고 있다.

택시를 잡아탔다. 빗줄기는 굵어졌다. 차창 밖으로 한국과 비슷한 거리 풍경이 이어졌다.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 오밀조밀 들어선 주택들. 교복치마 입은 소녀 둘이 자전거를 타고 스쳐갔다. 시내 중심부에 들어서자 명동이나 신촌처럼 차와 인파로 붐볐다. 생경함이라면 히라가나 간판과 택시 핸들이 오른쪽에 달려 있다는 것 정도.

지붕개폐식 야구장 후쿠오카돔을 둘러보고 캐널 시티에 있는 서점에서 성인 잡지를 두 권 샀다. 삼대째 영업한다는 우동집에서 배를 채우고 가와바타 상점가를 어슬렁거렸다. 천장을 투명한 지붕으로 덮어 산뜻한 느낌을 주는 거리였다. 수백 개의 점포가 양쪽에 늘어선 모습이 세운상가를 연상시켰다.

‘COMBAT’이라고 걸린 영어 간판이 보였다. 점포는 지하철역으로 빠지는 오른쪽 코너에 있었다. 밀리터리 마니아들을 상대로 세계 각국의 군복이나 군화 따위를 파는 곳이었다. 진열장 안에는 여러 종류의 단검이 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6밀리미터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들었다는 날은 투명하리만큼 맑았다. 마호가니 손잡이가 손바닥에 착 감겨 왔다.

귀걸이를 한 노랑머리 남자 점원이 뭐라고 떠드는데 영화 「람보」에 사용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쿠라데스까?”

나는 일본말로 값을 물었다. 계산은 현금으로 했다.

*

7시. 일본인 관광객들의 승선이 끝나자 토마스 호는 남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후쿠오카를 떠나 밤바다를 헤치고 가고시마로 향한다.

전망대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 방송이 반복해 흘러나왔다. 규슈 동쪽으로 북상하는 B급 태풍의 간접 영향권이라고 했다. 바람을 머금은 빗줄기는 갑판을 무섭게 후려쳤다. 이따금씩 번개의 섬광이 검은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배의 바닥이 한 쪽으로 쏠릴 때마다 묘한 공포심이 일었다.

뷔페 식당에서 가볍게 저녁을 먹고 가네다를 찾아 나섰다. 객실만 600개가 넘는 대형 선박이지만 그를 찾아내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732호 객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렇다면 홀로 온 중년 남자가 즐길 만한 것은 술 아니면 도박밖에 더 있을까. 게다가 지금은 기상 악화로 선실 밖 출입도 통제돼 있다.

카지노를 둘러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전망대 뒤편에 위치한 칵테일 바 ‘캣츠’를 찾아갔다. 창가 테이블에 혼자 앉아 술잔을 홀짝이는 통통한 사내가 보였다. 짧은 목, 벗겨진 이마, 금테 안경……. 빙고! 봉투 속의 사진과 일치.

나는 입구에서 서성이다 한번 부딪쳐 보기로 했다. 가까이서 관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마티니를 주문했다. 천천히 홀 안을 살폈다. 날씨 탓인지 자리는 많이 비었다. 정면 무대에서 중년의 여가수가 피아노를 치며 재즈를 불렀다. 웨이브 굵은 파마와 가무잡잡한 피부와 튀어나온 광대뼈로 봤을 때 필리피노가 확실하다.

나이트클럽의 러시아 댄스 걸, 식당 주방의 조선족 여인처럼, 중소 호텔 라이브 클럽에서 꼭 만나는 필리핀 가수들. 노래 실력 은 상당했다. 「Misty」의 음울한 선율이 허스키한 목소리에 실려 어스레한 홀 안에서 흐느적거렸다.

눈을 감고 잠시 음악에 집중하려는데 불쑥 못난이 푸코가 떠올랐다. 푸코는 내가 기르는 아메리카 코카스파니엘 종의 새까만 개 이름. 작년 봄, 아나운서 C를 묻고 운전해 오는 밤이었다. 놈이 갑자기 도로에 뛰어드는 바람에 차 앞바퀴에 깔려 죽을 뻔했다.

복잡한 기분 탓이었을까. 나는 털 빠지고 노린내 나는 유기견을 기꺼이 집으로 데려왔다. 다음날 애완견 미용실을 찾았다가 놈이 듣지도, 짖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 자리에서 다짐했다. 네놈이 죽을 때까지 지켜주겠노라. ‘버려졌다’라는 말에서 놈과 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너무 비약일까.

그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냈다. 누군가가 한국어로 말을 걸어 왔다.

“혹시, 부산에서 오셨습니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앞에 한 사내가 망령처럼 서 있었다.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금세 판단이 서질 않는다. 사내는 바로 가네다였다.

뜨악한 내 표정을 보고 그는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저, 동행이 없다면 술친구나 할까 해서. 전부들 짝짝이라. 하하.”

피할 수 없는 대면이었다. 나는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사내는 마주앉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김용식입니다.”

이건 또 뭔 소린가. 나는 눈을 홉뜨고 다시 사내를 보았다. 분명,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

“재일교포죠. 일본 이름은 가네다입니다. 가네다 다쓰오. 고향은 오사카고 지금은 후쿠오카에 살고 있습니다. 그냥 편하게 김(金) 상이라고 부르십시오.”

나는 짧은 숨을 내뱉었다. 의혹이 한 꺼풀 풀린 셈이지만 뭐가 뭔지 더 꼬이는 듯했다.

“저는 윤(尹)이라고 합니다. ……한데 한국말이 유창하십니다.”

“그렇습니까? 흐흣. 감사합니다.”

“혼자서 오신 모양이죠?”

“그렇게 됐습니다. 여행도 즐기고 부산에 볼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가네다는 아래위 이빨을 다 드러내며 웃었다.

“윤 선생도 혼자십니까? 이런 배 여행에는 여자가 껴야 제 맛인데. 안 그렇습니까?”

나는 소리 없이 따라 웃었다. 가네다는 기분이 좋은지 자신이 사겠다며 양주를 주문했다.

나는 서울에서 조그만 여행사를 경영한다고 했다. 크루즈 상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해 보려고 견학중이라고 했다. 가네다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검정 보타이를 맨 키 작은 종업원이 발렌타인 한 병과 얼음통을 가져와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나는 슬쩍 가네다를 떠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부산에는 무슨 일로?”

“그게 참……, 말하기는 뭣한데…….”

가네다는 바지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빼물었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수 없다는 듯 한동안 뜸을 들였다. 그러다 술잔으로 입술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보름 전인가. 부산에 사시는 백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그 영감 얼굴도 모릅니다. 제 선친과는 배다른 형제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30년 이상을 연락 없이 지냈으니까요. 근데, 그 영감이 죽을 때가 되니까 조센징 소리들으며 고생하는 조카 놈이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입니다. 내 앞으로 유산을 좀 남겼답니다. 생전에 부동산 사업해서 큰돈을 모았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해운대나 광안리 이런 곳에 땅값 엄청 올랐다면서요? 뜻밖의 복이라 당황스럽긴 하지만 여하튼 가봐야죠. 급한 일은 아니더라도 돈이 걸려 있다는데. 흐흣. 영감이 노망나서 헛소리 지껄인 게 아니길 바랄뿐입니다.”

매듭이 또 하나 풀리는 기분이었다.

“후쿠오카에서 부산가는 쾌속선 타면 세 시간이면 충분할 텐데. 이런 느려빠진 배를 다 타시고. 하하.”

“아, 내일 사쿠라지마에 가보려고요. 2주 전에 이 배 예약했습니다. 생각이 좀 많아서요. 과연 그걸 받아야하나, 부담스럽기도 하고 좀 수상한 구석도 있고. 혹시 뒤탈 나는 돈은 아닌지 조용히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쿠라지마? 활화산 말인가요?”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죠. 흰 연기를 풀풀 내뿜으며 살아 꿈틀대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그동안 통 기회가 없어서. 흐흣.”

“그렇군요…….”

나는 오른손으로 지포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으로 대충 밑그림을 그려보았다.

박이라는 남자는 죽은 부산 땅 부자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가네다와는 사촌지간? 무리해서 제거하려는 걸 보면 유산 덩어리가 꽤 큰 모양이다. 하긴 10원이든 10억이든 두 눈 빤히 뜬 채 생판 얼굴도 모르는 인간한테 뜯긴다면 속이 뒤집히겠지. 붉은 옷의 여자는 나이로 봤을 때 박의 마누라는 아닐 것이고 정부쯤 되지 않을까. 뭐 추측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다. 스쳐가는 호기심일 뿐이다. 맡은 일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막상 전후 사정을 알고 가네다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입 안이 씁쓸해졌다. 결국, 복이 화를 부르는구나.

성량이 풍부한 필리피노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곡을 부르고 있었다. 귀에 익숙한 멜로디인데 제목은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스트레이트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그리고 동시에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가네다는 겉보기와 달리 말이 많은 사내였다. 취기가 오르자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주절주절 풀어내는데 하품이 나오려고 했다. 스물여덟에 술집 나가는 일본 여자를 만나 반년을 살았다고 했다. 사기죄로 들어간 감방에서 한국인 소매치기 고수한테서 면도날 따기 비법을 전수 받았다나. 동족의 피가 통했는지 자기한테만 특별히 가르쳐줬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술병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에는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서러운 줄 당신이 알기나 해, 하면서 시비 걸 듯 눈을 부라렸다. 역시 사내들은 술을 먹어봐야 성깔을 안다. 동정심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가네다가 비틀거리며 바를 나섰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지났다. 뒤쫓아 가서 두 다리를 번쩍 들어 밤바다에 밀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갑판 통제만 없었다면 가능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충동적인 행동에는 늘 허점이 따른다는 사실을. 게다가 오늘은 이미 여러 사람들 시선에 노출됐다. 그리고 사방의 감시 카메라.

계획대로 하면 된다. 조급함이 화를 부른다. 계획대로 하면 된다. 나는 마지막 술잔을 높이 들었다가 입 안에 털어 넣으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바를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홱 돌리자 그림자 하나가 잽싸게 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객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전화 내선이 울렸다. 박이 보낸 붉은 옷의 여자였다.

“무슨 이야기했죠? 가네다와.”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 뭔 얘길 했을까. 후훗.”

“내 명령 없이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여자 목소리가 돌연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능글맞게 대꾸했다.

“명령? 이봐 아가씨, 난 내 방식대로 일한다고.”

“계약이 깨지는 수가 있습니다.”

“화살이 손에서 떠났다는 건 그쪽이 더 잘 알 텐데.”

“이봐요, 당신은 고용된 사람입니다. 맡은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요.”

“내가 언제 일 안 한다고 그랬소. 술 한 잔 얻어먹었기로서니 그게 뭔 큰일이라도 된다는 거요? 그렇다면 가네다가 재일교포란 얘긴 왜 안하셨나?”

기습 공격 한 방에 여자는 금방 기세가 꺾였다.

“그야, 굳이…….”

“오호라, 그래서 잡다한 정보만 너절하게 적어 놓으셨나. 하긴 내가 가네다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셨겠지. 안 그래?”

여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봐, 예쁜 아가씨. 걱정은 그만 접어두고 스파나 받으셔. 나는 실수 안 해. 그리고 가네다가 줄담배를 피웠소. 당신이 건넨 정보는 믿을 게 못 된다고!”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는 순간 바닥이 흔들렸다. 휘청거리며 손으로 벽을 짚었다. 파도가 거칠어져 배가 앞뒤로 기우는 피칭 현상이 심해졌다.

망할! 아무리 큰 배도 어쩔 수 없구나.
바이킹을 탄 것처럼 몸이 공중에서 부유하는 느낌. 머리가 멍해지면서 속이 메슥거렸다. 불면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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