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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르: SF, 판타지 | 태그: #우주 #행성탐험 #외계생명체
  • 평점×14 | 분량: 87매
  • 소개: 머나먼 소행성에 홀로 버려진 한 인간 앞에 나타난 은빛의 괴생명체. 그리고 생존을 위해 그를 쫓는 인간의 투쟁기. “그래, 언제나 난 혼자였지. 아득한 우주의 공간이 언...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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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독과 척박함만이 남겨진 세상. 머리를 뒤덮은 칠흑같은 어둠과 발 아래로 펼쳐진 시린 얼음이 전부인 곳. 그곳에 나는 홀로 서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그 무엇도 알 수 없다. 광활한 적막뿐인 하늘과 미지의 공포로 가득 찬 땅이 서로 나를 짓이기려 하는 것을 견디고 서있을 뿐이다. 내 뒤로는 가파르게 깎인 얼음 절벽이 공포스럽게 나를 유혹하며 속삭였다. 한 발짝 뒤로 내딛으렴. 하얀 세계가 너의 지옥을 끝내줄테니. 그 달콤한 속삭임이 발끝을 간지럽혔다. 정말 이 모든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나를 구원해줄지 모를 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 보자 칼날 같이 날카롭게 돋아있는 빙벽 위로 떨어져 찢기고 잘려나갈 내 몸뚱이와 순백의 땅을 붉게 물들일 내 피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나는 얼른 절벽을 외면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직도 내겐 죽음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일까.

앞으로 펼쳐진 땅은 얼음 표면이 정체 모를 스모그와 뒤섞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미지의 땅을 내딛는 나의 발걸음은 어쩐지 진공의 공간을 부유하는 듯 무의미하기만 했다.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나아가기 위해 달려도 보고 몸부림도 쳐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느낌. 나는 멈춰서 나를 가로막고 있는 그곳을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의 손끝이 허공의 어딘가에 다다른 순간 비현실적인 일이 펼쳤다. 얼음 바닥처럼 보였던 곳이 표면을 감싸고 있던 스모그와 함께 어우러지며 허공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그곳에 대신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구멍에서 눈부신 섬광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 어마어마한 빛의 세기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빛은 사라졌고 다시 눈을 뜨고 바라본 그곳에는 더욱 비현실적인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빛의 여인. 피부부터 머리카락, 눈알까지 모두 은으로 뒤덮인 여인이 섬광이 나왔던 구멍 위 허공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완벽한 몸매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육체는 단순히 은빛으로 덮여있는 것이 아닌 금속으로 만들어진 듯 단단한 느낌이 났다. 금속 거푸집에서 갓 찍혀져 나온 것처럼 딱딱한 얼굴은 어떤 표정도 갖고 있지 않았으나 날카롭고도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만물을 지배하는 신과 같은 그녀의 아우라는 공포스러우면서도 자애로웠다. 나는 후자에 무게를 두고 싶었다. 저 생명체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유일한 이였음으로 그녀에게서 희망을 찾아보고 싶었다. 생명체가 아니어도 상관 없었다. 괴물이건 로봇이건 지금 나와 공존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 올랐다. 나를 어디로든 데려다 달라고 말해야지. 계속 나만을 노려보던 그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에 굴복하지 않고 나는 입을 떼었다. 그 순간, 단단하게 굳어진 것처럼 보였던 여인의 입이 무섭도록 크게 벌어지며 귀를 찢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세상을 모두 날려버릴 듯 파괴적인 고음의 괴성. 살인 무기에 가까운 그 괴성에 나의 정신은 암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여인의 괴성은 암흑까지 날 따라왔고 나는 그것이 내게 날카로운 경고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을 떠나!!!!’

<2>

오늘도 똑같은 루틴으로 이 곳에서의 무의미한 하루를 채워가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쪼개어 식사를 하고, 응답 없는 통신장비에 말을 건네 보고, 그리고 우주복을 입고 탐사차를 타고 나와 지금처럼 이렇게 의미없는 탐사를 한다. 오늘 나온 이 곳이 처음 와본 곳인지, 심지어 어제 갔던 곳과 다른 곳인지 조차 모르겠다. 얼음과 바위로만 가득한 이 행성은 언제나 내게 똑같이 절망적인 풍경만을 보여줄 뿐이다. ‘56일’. 우주복에 장착된 탐사 패드가 내가 이 곳에 도착한지 56일이 지났음을 표시하고 있다. 이 곳 시간으로 56일일 뿐 지구의 시간으로는 358일의 긴 시간이었다. 태양과의 거리가 멀어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한 이 곳에서의 시간은 그 의미를 잃고 느리고도 느리게 흘러갔다. 영겁의 세월처럼. 그 길고도 긴 시간 동안 죽음의 공포와 외로움의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탐사선과 통신장비를 수리하려 해보고 구조신호도 쏘아 올리며 탈출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런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때마다 절망의 지옥에 갇혀 눈물로 숱한 밤을 지새웠다. 먼 왜소 행성에 홀로 추락한 지구인. 세상에 닿을 수 있는 수단이 모두 사라진 무력한 인간, 그게 바로 나였다. 왜 하필 나였을까. 왜 내가 이런 불행 속에 떨어지게 된 것일까. 고민의 끝에는 언제나 답대신 울분이 밀려 들어와 나를 집어 삼켰다.

이 곳에 온지 100일이 지났을 무렵 나는 어떠한 노력과 고민도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진심으로 희망을 잃어버리자 태풍처럼 몰아치던 감정은 가뭄을 만난 듯 순식간에 메말라 버렸다. 나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생존에 대한 집착도 사라졌다. 그리고 평온한 최후를 그렸다. 그때부터 나는 남은 시간동안 미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지내고자 쓸데없는 일로 채워진 일과를 세우고 그에 맞춰 살아가기 시작했다.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나는 이렇게 이 행성 어디론가 나와 구조용 광선 조명을 얼마동안 쏘아 올리다가 기지로 복귀할 것이다. 수명을 다해 희미해진 보라빛의 광선이 힘겹게 암흑의 하늘로 올라간다.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빛, 애처롭다.

나는 이곳에 추락해서 정신을 차린 뒤 가장 먼저 임시기지를 지었었다. 응급 생존키트를 통해 간단하게 지을 수 있는 임시기지는 텐트와 같은 막사 형태이나 주변의 대기를 차단하고 내부에 중력을 생성시켜 줄 수 있는 장치까지 갖추고 있어 크기는 작지만 이 척박한 행성에서 나를 보호해줄 훌륭한 보금자리였다. 거기에 산소공급 장치와 태양광 에너지 패널까지 직접 설치했는데 특히 패널에 공을 많이 들여야 했다. 태양으로 부터 너무도 먼 거리에 위치한 행성이라 도달하는 빛의 양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패널의 면적을 최대한으로 넓혀야 했다. 결국 탐사선의 패널까지 떼어다 붙이고 나서야 생활에 필요한 최소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탐사선을 타고 탈출하는 꿈은 더이상 꿀 수 없겠구나. 육체적 생존이 정신적 희망을 밀어낸 순간이었다. 그렇게 확보한 에너지였음에도 여전히 광선 조명을 오래도록 쏘아 올리거나 탐사차를 마음껏 몰기엔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조명은 매일 10분씩만 켤 수 있었고 탐사도 왕복 30분 거리의 위치까지만 가능했다. 전체 표면적이 지구의 대륙 하나정도인 작은 행성임에도 일년이 다 되도록 기지 근처만 맴돌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조금 더 멀리 나가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내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아주 작은 무언가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탐사일지 작성은 하루의 마지막 일과다. 오늘 탐사한 내용을 기록하고 내일의 탐사 계획을 세워 데이터로 남기는 작업인데 언제부턴가 똑같이 반복되는 내용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기록용 패드를 들고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가 옆 의자에 지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어제의 일지를 열었다.

‘배고프다. 기운이 없다.’

그제의 일지도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최근의 일지들은 모두 동일했다. 오늘도 같을 것이다. 그토록 아껴 먹었음에도 식량이 이제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지구에서는 한입거리였을 분량을 하루에 한번 밖에 먹지 못하고 있으니 기력이 쇠해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꼬르륵-. 위장을 울리는 구슬픈 소리가 들려온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들려오자 하루종일 나를 괴롭힌 이명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난 밤 기괴한 악몽 속의 여인이 내지르던 끔찍한 괴성. 그 괴성은 어떻게 실제로 들은 것처럼 내 귓가에 이명으로 남아 있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지금 이렇게 사라진 것일까. 분노에 찼던 그녀마저 처량한 나의 소리에 나를 동정하게 된 것일까.

일지 작성을 마치고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이곳의 위성인 카론이 거대하고도 위압적인 모습으로 하늘을 잠식하고 있었다. 망자를 명계로 이끄는 뱃사공의 이름에서 따온 카론은 그 이름에 걸맞는 어두운 핏빛을 두르고 나를 내려다 보고있다. 명계의 신의 품에서 꺼져가고 있는 처량한 나의 생명을 마중이라도 온 것 같은 서늘한 모양새였다.

<3>

어둠만이 가득한 무한의 공간에 펼쳐진 수많은 별빛. 닿을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그 빛들이 투영된 유리 위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대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 빛이 나를 구원이라도 해줄 것처럼. 듀믹호에서의 마지막 밤, 좀처럼 잠들 수 없던 나는 내 방 구석 창문에 기대어 별이나 헤는 수 밖에 없었다. 곧 저 밖으로 홀로 처량하게 버려질 운명이 믿기지 않아 사고까지 마비된 상태였다. 카론을 탐사할 사람으로 내가 선정된 뒤 나는 절망과 배신감에 휩싸인채 방에 틀어박혀 한참을 울기만 했다. 연료도 충분치 않은 작은 탐사선을 타고 데이터도 별로 없는 행성으로 떠나라니,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본인들의 안위를 위해 쉽사리 그런 잔인한 결정을 한 그들이 원망스러웠고 그들과 쌓아온 지난 세월이 야속했다. 그래서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갈 만큼 눈물을 흘리며 우주선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분노를 토해내었다. 그들이 나의 분노를 듣길 바랐다. 그들의 귓가에 각인될 나의 절규가 그들을 평생 괴롭히길 기도했다.

지구를 떠나 지난 3년간 듀믹호의 선원들은 누구보다 사이좋고 서로를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의리있는 동료들이었다. 함께 탐사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 데이터를 연구하며 우리가 인류의 지평을 확대하는 위대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명감으로 단결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동료들은 없을 거라며 서로를 치켜 세웠다. 하지만 그 허상은 엔진 하나가 고장나며 선체 시스템들에 결함이 생기자 초라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의 원인을 다른 선원에게 돌리고 부족해진 물자 앞에 자기 몫부터 챙기는 이기적인 민낯. 그것이 그들의 실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민낯이 더욱 추악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구로 복귀해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든 시스템을 수리해서 임무를 완수해야 할지 격한 논의가 한창이던 때 선체가 뒤흔들리며 무서운 굉음이 들려왔다. 우주 잔해의 습격이었다. 다행히 선체가 손상되지는 않았지만 선체 보호막 생성 장치가 파손되어 수리가 시급했다. 하지만 이미 싹터버린 이기심은 그들 모두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파손정도가 얼만큼 심각한지 알 수 없고 잔해가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를 상황에 자원할리가 만무했다. 다들 온갖 이유를 들며 다른 이에게 임무를 미루려 했고 결국 그 상황을 견디다 못한 카일이 임무에 자원하며 역겹도록 이기적인 논쟁이 끝을 맺었다. 카일은 해치 밖을 나서기 전 어떤 말 한마디 조차 건네지 못하고 있던 우리에게 처연한 위로의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난 괜찮아. 그리고 너희들도 괜찮을거야.”

그렇게 떠난 그는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카일은 우리 열명의 선원 중 가장 과묵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듀믹호의 유일한 의사였다. 우리의 이기심이 끊어버린 우리의 생명줄이었다.

카일의 사고 이후 듀믹호에는 기괴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카일이 떠난 뒤 남겨진 그의 몫이 남은 이들을 조금이나마 풍족하게 만들자 그들은 점점 더 큰 욕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누군가 사라진다는 것, 그것이 누군가의 생명이 조금 더 연장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동료가 아닌, 인간 대 인간도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그저 한 마리의 사냥감일 뿐이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들은 누군가를 제거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 명이 줄어드니 배가 부르다는 파렴치한 농담을 던지며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진 몇몇이 은밀하게 주고 받는 눈빛에서 나는 그들이 제거할 적당한 대상과 방법을 모색하고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그들은 나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카일의 죽음에 대해 가장 분노했던 것도 나였고, 가장 죄책감을 강요했던 것도 나였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캡틴 역할을 하고 있던 머크가 모두를 크루라운지로 불러 모았다. 리더십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꽁무니만 빼던 머크가 리더 역할을 자처할 때는 보통 자신의 이득을 위한 일이 대부분인터라 나는 그의 호출이 달갑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터무니 없는 제안을 꺼냈다.

“다들 지난 사건 사고로 심신이 많이 지쳐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럴 때일 수록 우리의 본분을 잊지말고 임무를 계속 수행해야 우리의 가치가 바래지 않는다고 생각해. 우리 스스로에게도 에너지가 될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현재 위치에서 원래라면 수행했어야 할 미션을 수행하려고 해. 바로, ‘카론’ 탐사!”

다들 뜻밖의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태양계의 가장 바깥까지 나아가며 주요 행성과 위성들을 탐사하는 것이 맞긴 했지만 시스템에 결함이 생긴 이후에는 탐사를 진행 할 여력이 없었다. 연료와 자원을 아껴야해서 토성 이후 중요 행성들의 탐사를 모두 포기했건만 이제와서 중요하지도 않은 위성 하나를 탐사하자는 건 누가 들어도 어처구니 없는 아이디어였다. 황당해 하는 선원들의 기색을 알아차린 배너와 샤트가 우리의 반박이 나오기 전에 재빠르게 머크의 의견을 지지하고 나섰다.

“나는 찬성! 최종 목적지였던 오르트 클라우드까진 못 가더라도 케이퍼 벨트 행성 하나는 탐사하고 가야 우리 면이 서지 않겠어? 여기서 그리 멀지 않기도 하고.”

“맞아. 우리가 지구 쪽으로 항로를 변경하는 동안 쉽게 다녀올 수 있을걸. 며칠만 고생하면 돼.”

그 며칠만 고생하면 될일에 너희는 나서지 않을거 잖아! 뻔히 보이는 수작에 반박할 말이 목구멍 앞까지 튀어 올랐으나 마른침과 함께 삼켜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심으로 가득한 동물들의 표적이 내가 되버리고 말테니까. 이윽고 탐사 진행에 대한 찬반 투표가 이뤄졌다. 예상한대로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찬성에 표를 던졌다. 반대를 던지는 순간 사냥감이 될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어서 탐사를 담당할 사람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인원은 처음에는 두 명을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탐사선에 실을 연료를 아끼기 위해서는 한 명을 보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곧바로 누구를 보낼 지에 대한 투표가 이어졌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적합한 후보를 지명하고 그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유는 대부분 자신은 피하고 다른 누군가로 몰아가려는 터무니 없는 내용들이었다. 나에 대한 이유는 내가 다양한 기술을 보유한 올라운더라 혼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바꿔 말하자면 특별한 전문분야가 없는 내가 사라져도 손해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8명이 투표한 뒤 각 득표수가 빈스 2표, 유라 3표, 나 3표였기 때문에 마지막 투표자인 라일은 유라와 나 중에 한 명을 뽑아야만 했다. 결정이 그의 손에 달린 것이다. 나는 안도했다. 라일은 3년의 듀믹호 생활 중 2년 동안 나의 연인이었다. 얼마 전 의견차이로 헤어졌지만 우리는 긴 시간동안 뜨겁게 사랑했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 존재였다. 그런 그가 나를 떠나보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그가 내뱉는 깊은 한숨은 안심했던 나의 마음에 믿고 싶지 않은 불안을 밀어 넣었다.

나를 힐끔거리며 고민을 이어가던 라일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채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극도의 긴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이 내 심장소리를 과도하게 증폭시켰다. 쿵-쿵-. 제발 나를 버리지마.

“우선 내 결정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우리가 달성해야할 것들과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도 하니까.”

애매한 말을 남긴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미안하다고. 그 뒤에 내가 아닌 유라가 남아야 되는 이유에 대해 이런 저런 논리를 덧붙인 것 같지만 이미 내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라일과 유라가 가까웠나. 불현듯 그들이 다정하게 함께 있던 모습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왜 이제야 눈치를 챈 것일까.

나는 라일을 정말 사랑했다. 지금 이런 순간에 조차 질투에 분노가 끓어오를 정도로 나는 아직 그를 사랑했다. 그는 단순히 나와 함께하는 시간들을 즐기는 정도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는 내게 마음 붙일 곳 하나없던 지구를 떠나고 처음으로 얻게 된 유일한 안식처였다. 잠시 헤어졌어도 언젠간 다시 함께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를 어둠 속으로 내몰았다. 그 어떤 말로도 나의 비참함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탐사선에 타기 직전, 형식적으로나마 나를 배웅하려고 모인 동료들을 돌아 보았다. 모두가 자신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를 감춘 채 가식적인 미소를 띄우며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닌 유라의 옆에 찰싹 붙어 서있는 라일은 시선조차 내가 아닌 유라를 향해 있었다. 그것이 탐사선의 문이 닫히기 직전 내가 본 다른 생명체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래, 언제나 난 혼자였지. 아득한 우주의 공간이 언제나 혼자였던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늑한 둥지처럼 느껴졌다. 홀로 살아간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게 가장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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