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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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타로카드의 방
오랜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기지개를 켜다 말고 여자는 신음했다. 발목이 아프다. 왼발과 오른발이 ‘x’자로 교차되어 나무로 된 의자다리와 한데 묶여 있는 게 보였다. 손으로 풀긴 어렵겠는데… 여자는 굵은 밧줄을 보며 덤덤하게 생각했다. 기묘한 이 상황이 낯설지가 않았다.
째깍
상념을 깨고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렸다. 조도 낮은 백열전구가 광원의 전부인 어둠에 적응하자 LED 벽시계가 먼저 보였다. ’07:00 PM’ 을 정확하게 알리는 시계 본체와 전선으로 연결된 타이머는 ’10분’에서 시작하여 빠르게 ‘초’를 줄여갔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느리게 주위를 돌아보던 여자의 눈동자가 탁자 위의 종이를 본 순간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미영, 30세, 나는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붉은 글씨로 휘갈겨진 문장을 보는 순간 왼손 검지가 아팠다. 여자는 저도 모르게 왼손 검지를 거세게 눌렀다가 단발마를 내질렀다. 검지에 날카로운 예기에 베어진 듯 거칠거칠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여자, 아니 이미영은 심호흡했다. 나는 이미영이다, 나는 이곳을 탈출해야만 한다. 텅 비어버린 머릿속을 채우기 위해 미영은 속으로 두 문장을 읊조렸다. 정면에 보이는 벽에 붙은 3장의 카드, 낯선데 익숙했다. 좌측에서부터 칼을 든 여왕(소드 퀸), 불꽃으로 타오르는 타워, 운명의 수레바퀴라 불리는 타로카드였다. 카드를 유심히 쳐다볼수록 두근거리는 심장에 미영은 의아했다. 설레는 걸까, 두려운 걸까… 늑골 아래서 심장이 박동했다.
미영은 양팔로 의자 다리를 움켜쥐고서 있는 힘껏 몸의 중심을 앞으로 보냈다. 카드를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온 몸으로 바닥을 밀며 책상 가까이 다가서자 보였다. 타워 카드를 가운데 두고 양 날개에 해당하는 소드 퀸과 운명의 수레바퀴는 역방향으로 뒤집어져 있었다. 뒤집어진 왕비와 수레바퀴 귀퉁이로 붉은 빛이 선연한 지문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흡사 핏자국처럼 느껴지는 얼룩 가운데 몇몇은 오래된 듯 피갈색에 가까웠다. 미영이 카드로 손을 뻗어보는 순간,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계음이 잔뜩 실린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이렇게 됐을까, 무너져 버린 우리의 성을 바라보네. 타오르는 첨탑을 바라보며 나, 왕비는 슬피 우네. 차마, 검을 버리지 못하니 끝없이 돌고 도는 운명에 내 목을 바치는 수밖에.
공간을 울리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미영은 시계 아래에 붙어 있는 종이 판넬을 보았다. 목소리가 들려준 이야기와 똑같은 글귀가 한 글자씩 네모반듯하게 검정색으로 인쇄되어 있는데 단어 3개만 달랐다. 첨탑이 파랑색, 왕비가 초록색, 운명이 빨간색으로 인쇄되어 있는 걸 보고 미영은 타로카드 아래 벽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붙박이로 부착된 나무서랍 앞면에는 알파벳 4글자를 맞춰야만 열리는 자물쇠가 달려 있고, 그 옆에 힌트카드가 붙어 있었다.
A, ?, ?, ?
미영은 힌트 카드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했다. 알파벳 A를 제외한 3개의 물음표 박스가 순서대로 빨강, 초록, 파란색이었다. 이 세 가지 색깔은 종이 판넬에 인쇄된 단어 3개가 갖고 있는 색상과 동일하다. 알파벳 A는 모든 알파벳의 첫 글자에 해당한다, 포춘의 첫 글자는 F, 퀸의 첫 글자는 Q, 타워의 첫 글자는 T였으니 색상에 따라서 알파벳을 배열한다면 A-F-Q-T로 자물쇠가 풀려야 한다. 미영은 주저 없이 원형의 자물쇠를 돌렸다. 한 글자씩 알파벳을 맞추자 덜컥대는 소리와 함께 서랍이 열렸다.
좁다란 서랍 안에 식칼 하나가 들어 있다. 칼날에 피가 말라붙어 있는 식칼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물화를 보고 있는 듯 덤덤하게 미영은 칼을 꺼냈다. 몇 번의 칼질 끝에 밧줄을 끊어내고 피가 잘 통하지 않는 다리로 나무 바닥에 한 발, 두 발 걸음을 내딛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