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군

사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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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로 뒤덮인 호수에서 또 그녀를 보았다. 뿌옇게 낀 안개 위로 그녀가 서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얀 옷 위로 드리운 새카만 머리카락, 그 위로 꽃송이처럼 피어난 유지산油紙傘 그리고 이쪽을 향한 시선까지.

나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매번 그럴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날 보고 있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런 게 법해가 말하던 연심인 걸까. 제 발로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헤어나오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침몰해버렸으면.

연심을 품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그래서 그녀는 매일 단교斷橋에 올랐다. 막연한 기대감을 품으면서 유지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날 향할 리 없는 것처럼 말이다. 외지인인 그녀는 몰라도 이곳 사람인 그는 단교가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단교. 눈이 오거나 안개가 낄 때면 끊어진 다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곳은 단교라는 이름처럼 불길하면서도 불완전한 곳이었다. 저승의 경계와 맞닿은, 괴귀가 들끓는 곳이었다. 특히 오늘같이 궂은날에는 사람들도 멀리 돌아갈지언정 절대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는 정말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던 걸까? 그는 그녀가 죽기를 바랐던 걸까?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안개 속에 몸을 숨긴 괴귀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한 해 전, 순백의 영혼을 지닌 그녀가 시비(侍婢) 한 명과 함께 서호로 이사 왔을 때부터 그녀는 모두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괴귀들은 눈알을 뽑아 호수에 띄워서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피거품을 질질 흘리면서 입맛을 다셨다. 호시탐탐 그녀를 노렸다.

그런데도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 건 단교가 술법으로 봉인되었기 때문이었다. 괴귀는 자신의 질문에 세 번 답한 이만 해칠 수 있었으며 사람의 길 안내를 받아야만 단교를 지나갈 수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누가 무엇을 물어보아도 답을 하지 않았고, 절대 길 안내를 해주지 않았다.

그를 기다려야 했으니까.

그는 그녀를 사지로 몰아간 원흉이자 사지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은인인 셈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도 그녀를 계속 지켜줄 수는 없을 것이다.

괴귀가 잘생긴 남인이 아닌 다른 이로 변한다면. 어린 여아나 힘없는 노파가 된다면. 그때도 그녀는 괴귀를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는 착각에 시달리면서도, 이뤄질 수 없는 마음을 키우면서도 내가 그녀 곁을 배회하고 있는 건 그래서였다. 혹시라도 그녀가 함정에 빠질까 봐. 내가 그녀를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그가 나타나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으면.

내 마음을 배반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을 때였다. 거뭇한 형체 하나가 안개를 파헤치고 나오는 게 보였다. 힘겹게 단교에 오른 형체는 주변을 배회하다가 그녀가 들고 있는 유지산 아래로 쑥 들어갔다. 아뿔싸. 요괴가 아닌 귀로구나. 나는 너무 놀라 똬리를 틀고 있던 몸을 비틀었다.

대답을 들을 수도, 길을 안내받을 수도 없으니 아예 물건에 붙어 이승까지 따라갈 심산인 게 분명했다.

그녀가 이대로 유지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인형人形을 갖추면서 달음박질했다. 내딛는 발에서 쏟아져나온 요력에 저승 땅이 웅웅 울리고, 놀란 괴귀들은 황급하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단교에 발을 내딛자 살을 엘 정도로 거센 칼바람이 불었다. 술법이 깃든 바람이었다. 침입한 괴귀의 힘이 강할수록 술법도 강하게 반응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나를 밀어냈지만, 나는 주저 없이 단교 위로 걸음을 내디뎠다.

단교에 오르자 주변 안개가 파도처럼 출렁이다가 나를 집어삼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였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단교 중앙으로 향하자 안개가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당혜와 하얀 치맛자락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였다.

“죄송하지만, 유지산을 빌릴 수 있을까요. 명일 돌려드리겠습니다.”

“…….”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역시나 답을 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이곳에서는 누구의 질문에도 절대 답을 하지 말아야 했다.

“사정이 있어서 그러합니다. 명일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대답 대신 날카로운 시선이 얼굴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깨달았다. 그녀에게서 유지산을 빌릴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재빠르게 손을 뻗어 유지산을 움켜쥐었다. 빌릴 수 없으면 빼앗을 수밖에.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뒤로 돌아 냅다 달리면서 안개 속으로 다시 몸을 파묻을 때였다. 등 뒤에서 볕처럼 따스하면서도 호수처럼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명일 꼭 돌려주셔야 합니다.”

그녀가 내 말에 답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감동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귀가 달아날 수 없도록 유지산을 접어서는 힘껏 움켜쥐며 단교를 벗어났다.

안에 갇힌 귀가 유지를 찢으면서 손을 뻗었다. 악귀의 손톱에서 검은 악기惡氣가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참으로 지독한 악기였다. 집념으로 검게 물든 악귀는 자신이 점찍은 먹잇감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래 위에 끝끝내 누각을 짓는 이가, 물거품을 그러모아 덩이로 만드는 이가 이런 검은 악귀였다. 오직 순간을 위하여, 먹잇감의 숨통을 끊고 입안으로 집어삼키는 찰나를 위해서 윤회를 포기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포기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