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소년

  • 장르: SF, 기타 | 태그: #환상문학 #단편선 #환상문학단편선 #노인과소년 #김보영
  • 평점×19 | 분량: 54매 | 성향:
  • 소개: “너는 이제 그 답을 안다.” 늙은 사제에게 어린 소년이 자신의 꿈에 대한 해답을 구한다.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 여덟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에 ... 더보기

노인과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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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일과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석양이 불타는 손길로 황금빛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애무하고 들어와 제단 아래에 젊은 여인처럼 드러눕는다. 소등기를 든 늙은 사제는 보석처럼 빛나는 바닥을 밟고 지나가 제단의 촛불을 정성들여 감아 끈다.

그는 늘 천천히 걷는다. 땅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 전체로 기도를 하는 듯하다. 뒤꿈치를 먼저 대고 발끝까지 서서히 내린 뒤, 마지막에는 머리를 조아리듯 발가락을 내려 발바닥 전체를 땅에 댄 다음 잠시 머문다. 그의 허리는 이미 의학적인 수준에서 몸을 지탱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지푸라기도 들기 어려운 몸으로 하루 열두 시간의 예식과 기도를 해낼 수 있는 까닭은 그의 발걸음이 바치는 숭고한 기도가 매 걸음마다 신 아니면 그의 허리뼈를 감읍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늙은 사제는 느린 몸짓으로 제단으로 향했다. 제단 오른쪽 구석에는 낡은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이 예배당 안에서 유일하게 초라한 것이다. 예배당을 지은 늙은 목공이 썼던 것이다. 그는 천장 구석 벽에 마지막 옻칠을 하려고 이 의자 위에 올라섰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졌고, 그때 허리를 다쳐 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누가 그리하라 한 적이 없건만 오랜 세월 동안 이곳을 거쳐 간 수사들 중 이 의자를 치운 사람이 없다. 누가 시킨 적도 없건만 가장 어린 수사가 매일 정성들여 광을 낸다.

사제는 의자에 앉아 무거운 몸을 쉬었다. 긴 숨이 예복 위에 덮이다 뜨거운 한숨과 함께 가라앉는다.

때가 되었어.

그는 고통도 회한도 없이 그리 생각했다. 저녁 해처럼, 겨울나무처럼.

사제는 어린 날 처음 이 예배당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이 낡은 의자에 앉은 노인을 보았다. 의자를 둘러싼 두 개의 높은 은색 기둥이 마치 그가 살아온 인생의 무게처럼 솟아 있었다. 아무런 논리도 설명도 없이, 그는 노인의 환영이 미래의 자신이며, 자신이 언젠가 그 의자에 앉아 죽게 될 줄을 알았다.

어린 시절에는 명절 선물이라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 날을 기대했고,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두려워했으며, 더 나이가 들어서는 예정된 한 걸음으로 받아들였다.

*

문이 열리며 작은 소년이 예배당 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맨발로 타닥타닥 바닥을 밟는 소리가 휘파람처럼 경쾌하다. 소년은 수사들이 입는 갈색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가장 작은 것을 입었는데도 몸에 맞지 않아 마치 이불을 감고 다니는 것 같았다.

눈보라가 몹시 불던 날 한 가난한 여인이 문가에 두고 간 젖먹이로, 바깥세상을 모르고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만 자라났다. 소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쉼 없이 일했고, 오늘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제단의 꽃을 갈아 주기 위해 뜰에 핀 안개꽃을 작은 팔에 한 아름 안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소년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한 번도 예배당 안에서 그리 앉아 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났음을 예감했고, 안개꽃을 바닥에 모두 흘리며 달려와 사제의 손에 입을 맞추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지나온 길이 흰 꽃으로 축복처럼 반짝였다. 사제는 그의 곱슬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봐 줄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작은 소년이라는 것에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스승님.”

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늙은이에게는 이제 필요한 것이 없단다. 하지만 네가 종종 혼자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내 늘 보아 왔으니, 오늘 답을 구할 것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소년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손을 모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제가 낮에 이 예배당에서 깜박 잠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아, 스승님. 게으름을 피웠다고 나무라지 말아 주십시오. 신의 자비심과도 같은 따스한 햇빛이 다정하게 제 이마를 쓰다듬었고, 자장가 같은 새소리가 천국의 노래처럼 귓가에 속삭이던 날이었습니다. 신께서도 아마 이런 날에는 자신이 만든 세상을 즐기며 일을 쉬고 잠시 오수를 즐기실 것입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기운차게 예배당 안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구둣발로 바닥을 밟는 소리에 예배당이 쩌렁쩌렁 울리고, 천장에 늘어진 전등마저 잠이 깨어 사근거렸습니다. 구리 빛 근육을 가진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눈은 생기로 빛나고 두려움 없는 얼굴은 활기로 넘쳤습니다. 막 길바닥에서 싸움이라도 대판 붙은 듯, 몸은 온통 진흙과 피와 땀으로 지저분했습니다.

“고해를 하러 왔습니다.”

그는 텅 빈 예배당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는 제 앞에 다리를 크게 꼬아 앉았습니다. 어째서 그가 아직 나이도 어린 저를 사제로 착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제가 두건을 뒤집어쓰고 옷을 늘어트리고 있어 착각한 모양이었습니다.

“농담입니다.”

그는 듣는 사람도 없건만 허리를 굽히며 파안대소했습니다.

“전 고백할 죄가 없습니다. 지은 죄가 없습니다.”

청년의 미소는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막 사람을 죽이고 왔습니다.”

그는 허리에 찬 칼을 뽑아내었습니다. 칼날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나는 그를 죽인 것에 한 점의 양심의 가책도 갖지 않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가엾은 여인과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그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정당하게 그의 목숨을 가져갔습니다.

나는 일생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살인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쳤습니다. 하지만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자로부터 가진 것을 빼앗아 정당한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한 일입니다. 수없이 많은 여자와 잠을 잤습니다. 그 중에는 유부녀도 있었고 처녀도 있었지만, 강제로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비록 영원한 사랑의 맹세는 하지 않았으나 언제나 진심이었으며 그 순간만큼은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내 많은 사랑 중 후회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죄인이 아니며 고백할 죄도 없습니다. 후회하지도 않으며 일생 참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나는 흥분이 몸 안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꼈고, 그의 눈부신 빛을 따라 이 예배당을 떠나 함께 자유롭게 세상을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습니다.

*

그때 태양처럼 빛나던 청년은 사라지고,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들어왔습니다. 아까의 청년과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마치 지옥의 늪에 푹푹 빠지는 것처럼 느릿느릿했고, 등은 원령이라도 업고 있는 듯 구부정했으며 눈에는 어둠이 잠겨 있었습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피 냄새가 났으며 그가 가까이 올 때마다 석상들마저 두려워 몸을 사리는 듯하고, 촛불조차도 빛을 잃는 듯했습니다. 그가 뿜어내는 죽음의 기운이 어찌나 몸서리치게 한기가 서리는지, 저는 제 두 팔을 껴안고 덜덜 떨며 몸을 웅크려야 했습니다.

“고해를 하러 왔습니다.”

그는 음습한 목소리로 말하며 제 앞에 앉았습니다.

“농담입니다.”

그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습니다.

“전 고백할 죄가 없습니다. 지은 죄가 없습니다.”

그는 앞서의 청년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제게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 저는 두려움에 떨었고, 더욱 더 몸을 웅크렸고, 다시는 저 무시무시한 세상에 대한 동경을 갖지 않을 마음을 먹었습니다.

*

저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제 뒤의 제단에는 금관을 쓴 대사제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그는 붉은 비단옷을 입었고 황금빛 술을 걸쳤으며, 황금의 홀을 들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고집과 아집으로 뭉쳐 있었으며, 주름마다 고뇌와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그의 귀는 틀어 막혔고, 그 눈에는 한 점의 자비심도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는 태양처럼 빛나는 청년에게 호통을 치며 그의 죄를 낱낱이 언급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 무덤과도 같고 감옥과도 같은 수도원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습니다.

갑자기 대사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 스승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스승님은 지금처럼 평온한 얼굴로 허리를 굽히고 조용히 쉬고 계셨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피 냄새를 풍기는 사내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스승님의 얼굴을 접한 순간 모든 두려움과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신의 축복이 가득한 수도원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저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꼈고, 영원히 스승님의 평온하고 따듯한 품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랫동안 그 네 사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며,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 두 사람이 어째서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는지, 한 편으로 같은 수행을 하고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 두 사제가 어째서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꿈은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 왔습니다.

***

이야기를 다 들은 노사제는 입을 열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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