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감금

  • 장르: SF | 태그: #SF #단편선 #한국SF단편선 #아름다운감금 #임태운 #이름
  • 평점×10 | 분량: 43매
  • 소개: 눈을 떠보니 완전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다. 시간이 되면 음식이 나오고 운동할 수 있는 편의시설도 제공되지만 탈출하고픈 욕망뿐. 과연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더보기

아름다운 감금

미리보기

1

갇혀 있다.

그것은 정신이 들자마자 T가 가장 먼저 깨달은 사실이었다. 분명 T는 어두컴컴하고 작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 얇지만 딱딱한 재질의 작은 판이 그의 몸을 압박하고 있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잔뜩 웅크려 있는 사지는 감각조차 느끼기 힘들었다. 질식에 대한 두려움이 온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다해 T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무언가를 부수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리고 T는 갇혀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절망감을 맛보았다.

“뭐…… 뭐야, 여기는?”

그곳은 꽤 널찍한 크기를 자랑하는 황량한 정육면체 건물의 내부였다. 아무런 가구나 장식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회색으로 칠해진 벽과 마찬가지로 회색 천장에 붙어 있는 커다란 전등 세 개 만이 T의 눈을 찌를 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관절이 아우성치는 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몸을 일으킨 T는 ‘어제’를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그 시도 끝에 건져 올린 것은 백지를 더듬을 때의 막연함뿐이었다. 어제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제의 경우도, 엊그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름…… 내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아. 분명 T로 시작하는 것 같은데?”

전후좌우 동서남북이 온통 회색뿐인 이 폐쇄적인 공간에 T는 기억을 잃은 채 혼자 방치된 것이다. 누굴까? T를 이곳에 던져 넣은 자는. 그때서야 T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위협으로부터 그를 지킬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T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몸서리 처지는 공포가 밀려 왔다.

2

“아무도 없어요?”

천장에 부딪히는 메아리만이 T의 귀를 때렸다.

“창문도 없고, 출입구도 없어. 뭐 이런 곳이 다 있지?”

천장은 힘껏 뛰어도 닿지 못할 만큼 높았다. T는 직감했다. 이 회색 건물 안에 며칠만 더 갇혀 있어도 분명 미쳐버릴 것임을. 순간 무슨 생각이 든 T는 손으로 바닥을 매만졌다. 분명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난방은 되고 있는데.”

그 때 T는 건물 바닥의 한 가운데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교하게 그려진 검은색 원이었다. 혹시 어떤 장치가 되어 있을까 조심스레 만져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쨌든 누군가가 그를 이곳에 가두었다는 사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대체 누굴까? T에게 어떤 원한이 있기에 그를 가둔 것일까? T는 고개를 끄덕였다.

“탈출해야 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일단 이 괴상한 건물에서 나갈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하지만 막 정신을 차린 몸으로는 무리였다. T는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3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T는 스프링처럼 튕겨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냄새?”

바로 코앞에 잘 차려진 음식 쟁반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물바닥에 그려진 동그라미 위에 놓여 있었다. 마치 바닥을 뚫고 올라오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야!”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창문도 없는 건물 내부 풍경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뭐지? 가슴팍에서 바스락거리는, 어색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런. 음식도 모자라 누군가 T에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혀 놓았다.

다시 음식으로 눈을 돌렸다. 두 눈이 의심스러웠다. 그릇에 담겨진 음식은 분명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그 옆에 T를 위한 숟가락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어쩌지?”

고민은 짧았다. 무슨 속셈으로 T에게 옷을 입히고 음식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몹시 배가 고프다는 거였고, 잘 생각해 보니 음식에 독이 들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T를 죽이려면 자고 있을 동안에 목을 그어버리는 것이 훨씬 쉬웠을 테니까.

T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4

불가사의한 일은 바로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어딘가에 있을 탈출구를 찾기 위해 수도 없이 건물의 벽을 두들기고 긁어보았지만 벽은 굉장히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디를 두드리든 일정한 울림만 되돌아올 뿐.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조차 없었다. 때문에 이곳이 어디에 지어진 건물인지 추측할 최소한의 단서를 얻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다. 생물체는 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 벌레 한 마리 없을 수 있냐고.”

지칠 때까지 벽을 두드리다가 잠이 드는 기계적인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잠에서 깨면 어김없이 음식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여전히 방금 만든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채로. 출입구도 없는데 대체 무슨 수로 음식을 운반하는 것일까? 어째서 음식만을 놓고 사라지는 것일까. T는 꾸역꾸역 배를 채우면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나는 질문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소음이 전혀 없는 걸로 미뤄보면 상당히 외진 곳이 분명하다. 깊은 산 속일 수도 있고 사막 위일 수도 있다. 제발 아니길 바라지만 심해일 수도 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기껏 탈출에 성공했는데 만약 바깥이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바다 속이라면 절망적이다.

그럼 음식들은 어디서 공급되는 건가. 적은 양이지만 메뉴가 다양하고 영양분 계산도 철저해 보인다. 야채는 언제나 싱싱함을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T가 갇혀 있는 이곳은 거대한 건물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든 순간에 나타나는 음식. 똑같은 일이 며칠째 계속되자, T는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 냈다. 거짓으로 잠든 척해 보는 것이다. 음식은 분명 T가 깊이 잠든 순간을 틈타 운반된다. 눈을 감은 채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다면 누가 음식을 놓고 가는지 확인할 수 있겠지. 안에서는 열리지 않는 출입구가, 그 때는 노출될 수밖에 없다. T는 주먹을 꽉 쥐며 생각했다. 주먹 안으로 살의가 모이는 것 같다.

‘누가 들어오든 간에 멀쩡히 돌아갈 순 없을 거다.’

5

“빌어먹을.”

T는 보기 좋게 당한 것을 인정했다. 범인은 보통 치밀한 놈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잠든 척하고 있는 T를 간파하곤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누운 채로 몇 시간이 지났을까. 범인은 끝내 아무런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감이 풀린 T는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를 우롱하듯이 눈앞에 놓여 있는 쟁반과 음식.

“망할!”

챙그렁!

격한 발길질로 쟁반을 걷어차 버려도 분은 풀리지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나와, 개자식! 듣고 있냐!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오란 말이야!”

T는 천장을 향해 벽을 향해 소리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만약 대꾸가 있었다면 T 역시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반응 없는 시위를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미쳐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있는 거냐?”

T는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고 싶었다. 그건 어느새 ‘탈출’에 대한 갈망을 넘어서 일종의 ‘강박’으로 자라나 있었다.

T는 좀 더 지독한 방법을 쓰기로 결심했다.

만약 범인이 어디선가 T를 지켜보고 있다면 분명 천장에 무언가 장치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T는 벽을 타고 올라가보기로 했다. 밋밋한 벽에 손톱이 파고든다.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T는 전의를 불태웠다. 벽에서 떨어지고 다시 올라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결국 T는 벽면의 절반까지 올라가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순간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는 바람에 T는 벽에서 떨어지고야 말았다.

쿵.

등부터 강하게 땅 위로 떨어진 T는 척추를 파고드는 고통 끝에 기절해 버렸다.

온 몸에서 열이 났다. 그토록 몸을 혹사시켰으니 멀쩡할 리가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와중, T는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세 번째로 깨어났을 때였나. 느닷없이 차갑고 뾰족한 것이 오른쪽 팔을 찔러 왔다.

‘뭐지, 이건. 드디어 범인이 나를 죽이는 건가?’

자신을 가둔 범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T는 분했다.

6

T는 멀쩡해진 다리를 구부렸다 펴 보았다.

‘치욕스럽다.’

범인은 T를 죽이기는커녕 완벽히 회복시켜 놓았다. 그 뾰족한 것이 T를 찌른 다음날 통증은 씻은 듯이 사라졌고, 원기도 살아났다.

“차라리 죽이란 말이다. 빌어먹을 놈아.”

그렇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T는 끝내 자살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죽음이 두려워서도,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게 안타까워서도 아니었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잖아.”

그 후, T는 충분한 수면을 취하기 시작했다. 깨어나면 눈앞에 놓여 있는 음식도 절대 남기지 않았다. 탈출하기 위해선 체력을 길러야 한다. 비실비실 하고 있다간 범인이 나타났을 때 주먹 한 방도 날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 T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어느 날 제자리에서 달릴 수 있는 러닝머신이 방 안에 들어서 있었다. T는 거기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망설이지 않고 러닝머신 위에 올라섰다. 성능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먹고, 자고, 몸을 단련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 T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탄탄해져 갔다. 충분한 영양분과 넘치는 운동량의 결과일 것이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T의 체격은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젠 인간이 아니라 맹수가 덤벼 와도 쓰러져 있는 쪽은 상대방일 것이라 확신했다.

가끔 격렬한 운동 끝에 T의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을 때는, 일어나 보면 욕조가 놓여 있기도 했다. 위치를 보아하니 욕조의 정중앙 아래에는 분명 그 검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을 것이었다. 정확히 그 위치였다.

“더러운 건 싫다 이건가. 살찌운 다음 잡아먹기라도 하려는 거냐.”

짧게 비웃음을 흘렸지만 T는 순순히 욕조에 몸을 뉘였다.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욕조는 다음날 사라져 있었다.

7

그로부터 며칠 뒤.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공포 이후로,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포가 T를 찾아왔다. 눈을 떠 보니, 평소와는 다른 것이 한 가지가 있었던 것이다.

음식이…… 놓여 있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범인은 더 이상 T에게 음식을 공급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자 T는 매우 당황했고, 당황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매일 반복하던 운동도 멈춘 채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날 버린 건가.’

이제 여기엔 T 외엔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그 사실이 T의 손끝 혈관을 타고 온 몸을 잠식해 들어갔다. 범인의 존재를 항상 주지시켜주던 음식이 끊기자 아이러니하게도 배고픔보다 외로움이 더 먼저 찾아왔다.

T는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가 없다. 범인은 T가 미쳐가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굶어 죽어가는 꼴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일까. 무엇이 됐던 간에 T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다.

“어이가 없군. 숱한 죽음을 떠올렸지만 굶어 죽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 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범인에 대한 증오도 서서히 희미해져갔다.

며칠 후. 그렇게 T는 굶어 죽었다. 바닥에 사지를 뻗고 누운 채 천장을 쏘아보는 자세 그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T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매일 반복되는 음식의 맛도, 출입구 따윈 없는 회색 공간에 대한 저주도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난 누구란 말인가.

8

“정신이 드십니까, 손님?”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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