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세 시가 되었다. 벌써 오후 공연을 시작할 시간이다. 한참 연습에 물이 올라 있었지만, 시간을 어기면서까지 연습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한참을 보고 있던 악보에서 눈을 떼고 기타를 둘러맨 채 무대로 향했다. 공연 시간을 엄수하는 건 아티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무대 아래에는 그를 기다리는 관객들이 있었다.
그는 무대 구석에서 자기 키만 한 마이크를 끌고 와 가운데에 세웠다. 그리고 그 앞에서 목을 가다듬었다. 가볍게 스트로크를 하며 무대 아래를 바라보았다. 새로 바꾼 세트리스트를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끌고 갈 수 있었다.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관객들을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오늘도 저의 공연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첫 곡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곡은 산울림의 「아니 벌써」입니다.”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낭랑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공연장을 가로질렀다. 그의 노래를 들은 관객들이 조금씩 무대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반응을 보니 새삼 힘이 났다. 록 공연답게, 분위기를 띄울 수 있도록, 더욱 목소리를 높여 보았다.
오늘은 그의 백스물한 번째 공연이었다.
1.
하늘이 남빛으로 물들었다. 창 안으로 바람이 스몄다. 이제 막 가을에 들어선 저녁 공기가 시원했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으로 어슴푸레하게 어둠이 깔렸다. 영재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간밤에 가위로 대충 정리한 머리가 흩날렸다. 더 이상 긴 머리가 필요 없을 것 같아 자르긴 했지만, 그러고 나니 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언제나 목 언저리를 익숙하게 간지럽히던 감각이 없어져 가뜩이나 낯선 세상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한때 그의 주요 재산이기도 했던 잘생긴 외모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가꾸고 관리해 가며 잘 보여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정 연습을 위해 온종일 들여다보던 거울은 눈코입이 그 자리에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용도로나 쓰일 따름이었다. 영재는 지프 차 문간에 팔을 괴고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예전에는 그렇게, 거울을 틈만 나면 보곤 했다.
“창문에 그렇게 머리 올리지 마라.”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어때, 우리밖에 없는데.”
“혹시라도 그러다 문 확 열리면 어떡하려고. 이거 고물차라서 언제 퍼질지 모른단 말야.”
“그냥 놔둬. 일일이 잔소리를 하고 그래? 그냥 록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
뒷좌석에서 창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항상 영재를 ‘록커’라고 부르곤 했다. 왠지 모를 비아냥이 섞여 있는 것 같은 그 말을 영재는 듣기 싫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창에 걸치고 있던 팔을 내리고 등받이 쪽으로 몸을 묻자 창모의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영재는 그 소리가 거슬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같이 지낸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자기 앞에서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 창모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야, 잠깐 세워 봐.”
창모의 말에 진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도로 위를 털털거리며 달리던 지프가 멈춰 섰다. 진수는 팔을 뻗어 뒤를 보며 손짓을 했다. 그들의 차를 따라오던 1톤 트럭이 속도를 줄였다.
“왜, 무슨 일이라도 났어?”
트럭의 운전대를 잡고 있던 상백이 고개를 쓱 내밀었다. 창모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트럭에 앉은 상백에게 다가가 먼발치를 가리키고서는 손짓을 했다.
“아니, 잠깐만 볼 게 있어서. 저기 좀 봐.”
“어디?”
“저쪽 있잖아.”
창모가 가리킨 쪽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누가 초저녁부터 겁도 없이 불을 피워 놨네.”
“잠깐만 갔다 오자. 어이, 다들 내려.”
창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수는 차에서 내렸다. 영재는 그를 보며 주섬주섬 뒷자리에서 포대 자루를 꺼내 접었다. 어차피 명령에 따르는 신세인 건 마찬가지였어도 다른 똘마니들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영재가 차에서 내리자 창모는 트럭에 앉은 상백과 태구를 보며 말했다.
“나랑 진수, 록커 이렇게 셋이 갔다 올게. 너희 둘이 여기 있어.”
“내가 가면 안 될까? 너 다쳤는데 괜찮아?”
트럭 조수석에 앉은 태구의 말에 창모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그렇게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 뭐.”
둘을 남겨두고 세 사람은 불빛 쪽으로 향했다. 비상시가 아닌 이상 물자를 지킬 사람이 항상 두 명은 필요했다. 포댓자루를 뒷주머니에 넣은 영재는 창모의 뒤를 따르며 스타킹이나 복면을 뒤집어쓰지 않는 게 새삼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법이 없어진 지금 굳이 얼굴을 가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괜한 마음에 품속 권총을 한번 만져 보았다. 그 선득한 질감에 소름이 돋았다.
거리를 좁힌 세 사람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불빛 언저리를 훔쳐보았다. 여자 셋에 남자 둘. 다섯 사람이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있었다. 나이 든 여자가 하나, 중년 언저리의 남녀와 젊은 남녀가 각각 한 명씩이었다. 중형 승합차가 옆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아 그걸 타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동향을 파악하던 창모가 뒤를 보며 속삭였다.
“남자 둘만 제압하면 될 것 같네.”
영재와 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창모는 총을 꺼내고 바로 모닥불 앞으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세에 여자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거기 그대로 계세요. 움직이지 마시고.”
창모는 다섯 사람에게 번갈아 가며 총을 겨누었다. 영재는 총을 내밀고 창모를 따라 그 옆에 섰다.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닌데도 매번 굉장한 긴장이 되었다. 꿀꺽하고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감각이 그대로 느껴졌다.
“저…… 저희 아무것도 없어요.”
다섯 사람은 가족인 것 같았다. 중년 남자의 말에 창모는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을 보며 눈짓을 했다. 영재는 가족들을 향해 총구를 바짝 세웠다.
“아무것도 없으신 거 잘 알고 있으니까, 그냥 확인만 할게요. 남자분들은 이쪽, 여자분들은 이쪽으로.”
그 순간 창모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것 같던 젊은 남자가 자기 품에 손을 넣었다. 그것을 본 창모는 바로 그의 머리에 총을 들이댔다.
“이게 미쳤나? 야, 이 새끼 뭐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봐.”
창모의 말에 진수는 그의 옷을 뒤졌다. 조그만 접이식 칼이 나왔다.
“난 또 총이라도 갖고 있는 줄 알았네.”
창모는 사정없이 남자의 머리를 갈겼다. 호된 일격에 그는 픽 하고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중년 여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꼴에 남자라고……”
창모는 고개를 홱 돌리며 다른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이것 보세요. 말 안 들으니까 다치잖아요. 빨리 끝내면 저희도 좋고 여러분도 좋은 건데.”
영재는 총을 겨누며 뒷주머니의 포댓자루를 진수에게 건네주었다. 진수는 승합차의 문을 열고 차 안에 있는 물건들을 확인한 뒤 하나하나 자루에 쓸어 넣었다. 어디서 살다 온 건지, 이들에게는 통조림이 꽤 많았다. 그것만 다섯이서 나눠 먹어도 열흘은 버틸 수 있을 만한 분량이었다. 자신들을 지킬만한 무기를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그렇고, 어디 꽤 풍족한 환경에서 지내다 온 사람들 같았다.
“먼 길 떠나시는 분들 같은데, 정말로 가진 게 없네. 어디 가시는지는 몰라도 이래가지고 어디 다니겠나?”
진수가 통조림을 담는 광경을 지켜보며 창모는 낄낄거렸다. 벌벌 떠는 여자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순간 영재는 자신을 쳐다보는 젊은 여자의 눈과 마주쳤다. 앳되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어린 소녀였다. 아마 세상이 멀쩡했다면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리라. 영재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동정심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를 보는 소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명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유명세가 돈이 되지 않는 세상에서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모두가 알아보는 얼굴을 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치 영원히 추락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 만큼만 가지고 갈게요. 차는 남겨드릴 테니까, 다음에 따라오시든가. 줄은 요령껏 푸시고.”
“잠깐만요. 저희 어머니 며칠 드실 것만이라도…… 이대로 남겨두면 저희 죽을지도 몰라요. 선생님, 제발……”
다섯 사람을 묶어놓은 후 떠나는 창모 일행을 보며 중년 여자는 애원했다. 그 말을 듣는 창모의 멀끔한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여자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이 아줌마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셨나 보네. 저희가요. 여러분 살려드리는 것만 해도 여러분은 굉장히 운이 좋은 거예요. 오늘이 재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하시나 본데. 오늘이 로또 당첨된 날이야. 왜냐하면 오늘 여러분들 다들 죽어야 되는데 내가 기분이 좋아서 목숨은 건지게 됐거든. 우리가 싹 다 털어가는 것도 아니고 먹을 것만 가져가는 건데 왜 지랄이세요? 얼마나 많이 베풀고 있는데, 그걸 모르시네. 아 그리고……”
빈정거리던 창모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었다. 그리고 파랗게 질려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며 여자에게 말했다.
“따님 건드리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아세요.”
자루를 메고 가는 영재의 등 뒤로 여자가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만치 앞서가는 창모와 진수를 보며 영재는 자루에서 캔 하나를 꺼내 툭 하고 던졌다. 항상 그렇듯이, 오늘 밤은 저 울음소리가 자신의 잠자리를 괴롭히게 될 터였다.
“금방 왔네?”
불룩하게 자루를 채워 온 세 사람을 보며 차 앞에 걸터앉은 상백과 태구가 손을 흔들었다.
“우는 소리 여기까지 들리는 거 같으니까 재수 없어. 일단 얼른 실어.”
창모의 말에 상백은 자루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야, 이거 생각보다 많이 갖고 왔네. 나 꽁치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아, 그리고 담배! 똑 떨어졌는데 잘됐네. 하하, 참……”
과하게 호들갑을 떠는 상백을 모른 체하고 영재는 지프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워낙 긴장을 한 탓에 기운이 한순간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뒤이어 창모가 뒷자리에 타는 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그에게 가장 많은 공이 있으므로, 뭐라도 말이라도 한마디 해야 했다.
“수고했어.”
“아니야. 근데 록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아니, 나 기분 괜찮은데?”
기분이 안 좋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창모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무리하게 총을 들고 움직이다 상처가 벌어진 것 같았다.
“안 괜찮은 건 내가 아니라 네 쪽 같은데? 아문 자리 또 덧난 거 아니야?”
“아냐. 됐어. 나 피곤해서 그래. 잠깐 눈 좀 붙일 테니까, 좀 전에 털어온 거 이따 같이 먹자.”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창모는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영재는 그 소리가 거슬려 귀를 막고 싶었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멜로디가 이제는 그를 괴롭히는 악몽 같은 소음이 되었다. 잊으려고 할수록 그 노래를 마지막으로 부르던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
귓가를 스멀거리는 콧노래 위로,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