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해물 파스타와 알리오올리오
국수는 언제 먹여 줄 거냐? 그 소리만 아니었으면 시작도 안 했겠죠.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드라마에서 재벌 2세들이나 하는 계약결혼을 할 줄은…저도 몰랐어요. 계약으로 시작했다가 발목 잡혀서 진짜 결혼하는 식으로, 혹시 내 인생에 로맨틱코메디를 찍을지도 모르겠다…하는 상상을 하긴 했는데…, 아무나랑 결혼해도 상관없다고는 했지만, 누구랑 결혼했는지 이제는 도저히 모르겠어요……
저희 친가 쪽이 집성촌이거든요. 설 연휴에 내려갔더니 노인네들이, 아니 어르신들이 언제 결혼하냐고 한 마디씩 하시는 거예요. 거기는 동네 뒷산 정기가 맑은 건지, 약수가 영험한 건지 수도권의 제 친구들보다 결혼들을 일찍도 했더라고요. 제 또래 사촌들은 이미 다 애가 있어서, 뭘 모르는 애를 덥석 엎드리게 해서 세뱃돈이랍시고 삥을 뜯어가고 있고요. 남의 집 귀한 딸들 하나씩 데리고 와서 시골집 부엌에서 기름 냄새에 절어서 전 부치라고 부려먹고 있고요. 큰어머니는 저희 어머니한테 며느리가 손이 야무져서 편하다고 자랑질을 하시고요. 그 꼴을 보고 있으니 여기저기 친척 결혼식 불려 다니시며 축의금을 상납해오신 저희 부모님이 저더러 결혼하라고 난리치시는 것도 뭐, 이해는 가요. 친척 어르신들은 자식들이 둘 아니면 셋인데 저는 외동이라 그렇잖아도 축의금을 반이나 삼분의 일 밖에 돌려받지 못 하는데 아예 안 하면 그마저도 못 돌려받으니까…하긴 해야죠. 거기다가 아버지 정년퇴직이 올해거든요. 퇴직하시기 전에 받아내셔야죠.
부모님은 여자는 다 거기서 거기,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으니 지금 만나는 여자 있으면 결혼을 해 버리라고 하셨는데…제가 초식남, 뭐 그런 거라서요. 모태솔로 아니고요. 퇴근하고 와서 영화 하나 보면서 맥주 마시고 자고 출근하고 그게 일과였는데, 연애 같은 귀찮은 거 했겠어요? 지금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되게 평범하잖아요? 누가 막 연애하고 싶어할 스타일 아니잖아요? 외로운 거요? 사람은 다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건데요. 부모님은 맞벌이셨고 스무 살 때부터 자취를 해서 혼자인 거에는 아주 익숙해요. 자식이요? 이 헬조선에서 제가 물려줄 거 없고, 월급 받아서 사교육에 투자하고 저축 못 하는 삶도 싫고, 제가 저 하나 건사하기도 귀찮은 인간이데, 와이프랑 자식을 책임지진 못 하겠더라고요. 솔직히 아버지의 퇴직이라는 데드라인하고 부모님이 신혼 전셋집에 좀 보태주신다는 것만 없었으면 결혼 같은 거 안 했을 텐데…마침 전세 재계약 시즌이 되었는데 전세가 정말 미친 듯이, 제 연봉보다 더 올라서…그래, 전세금을 좀 도움을 받자, 싶었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계약결혼’이었어요. 계약결혼해서 전셋집을 받고, 이혼, 아니 계약해지를 하자. 근데 제 주변에 여자사람친구들을 생각해보니…그런 미친 제안을 받아들일 또라이는 없더라고요. 그리고 지인들 사이에 알려지면 뒷담화 안주로 오를 일이잖아요, 이런 건. 그래서 데이팅앱을 깐 거라고요. 설마…했는데 바로 알림이 와서, 맘 바뀌기 전에 연락을 했어요. 소개팅 약속 잡는 거랑 똑같았어요.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소개팅할 때는 파스타를 먹이래요. 그래서 백화점 맨 꼭대기층의 파스타집을 갔죠. 그 날 비가 와서 사실은 짬뽕을 먹고 싶었는데…첫인상이요? 그냥 무난했어요. 저더러 고르라기에 저는 매운 해물 파스타를 시키고 여자분한테는 무난하게 알리오올리오를 시켜드렸죠. 네, 마늘오일로 볶은 하얀 파스타요. 사실은 제가 그것도 먹고 싶었거든요. 비가 오니까 마늘향 나는 거. 반씩 나눠먹었어요. 해물파스타는 짬뽕은 아니었지만 소스도 자작자작하고 오징어랑 홍합도 통통해서 먹을 만은 했어요. 대화요? 소개팅에서 흔히 오가는 대화였죠. 영어회화 기초반에서 배우는 문답 있잖아요. 주말에 뭐해요? 가족은요? 무슨 일 해요? 어디 살아요? 취미는요? 그런 거죠.
여행도 안 가고 취미도 없고…저 못지 않은 집순이었어요. 이름은 ‘스테파니 황’ 이고 재미교포 2세랬어요. 부모님 두 분 다 미국에 계시고. 직업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셰프래요. 이상하지 않았냐고요? 교포 2세대니까 한국이름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교포라서 말이 좀 어눌한가보다, 했죠. 그리고 레스토랑 오너도 아니고 셰프가 영업할 일 없으니 명함도 없을 수 있고…소개팅에서 재직 증명서 떼어 보고 그러진 않잖아요. 그리고 사실…호감이 생겼어요. 레스토랑을 나와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고 했는데, 네, 그냥 평범한 소개팅 코스였어요. 그런데 파스타를 꼭꼭 씹어 먹으면서, 아메리카노를 무슨 위스키 마시듯이 음미하면서, 케이크를 그렇게 황홀한 표정으로 먹는데…반했죠. 사실 제가 한 건 돈 쓴 거 밖에 없는데 상대방이 너무 감동하니까. 맛이요?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그 정도로 맛있는 건가. 그냥 파스타는 파스타고 커피는 쓰고 케이크는 달고…그 때는 아, 역시 셰프라서 미각이 예민한가 보다, 했어요. 어렸을 때 생일에도 케이크를 못 먹었다길래 이민자라서 부모님이 바쁘셨구나, 생각했죠. 그 후로 두세번 더 만났어요. 그냥 평범했어요. 한강에서 치맥도 먹고 영화도 보고. 근데 이 여자가 너무 해맑게 좋아했어요. 이렇게 여유있게 데이트란 걸 해 보는 건 처음이래요.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구나 했죠. 어른이 되면…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보상을 받지 못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단한 이벤트를 해 주는 것도 아닌데, 이런 평범한 데이트에 너무 설레면서 좋아해주니까, 네, 그래서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계약결혼 얘기를 꺼내는 게 조심스러웠어요.
결혼에 드는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하고, 축의금은 반씩 나누고, 혼인 신고는 하지 않고, 1년 후에 헤어지자. 주변에는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고 하자. 제가 내민 계약 조건은 그거였어요. 인신매매 같은 거 아니고 나 나름 건실한 생활인이라고, 주민등본이랑 재직증명서까지 보여줬어요. 그걸 왜 그 서류로 증명했냐고요? 그럼 뭘로 증명해요?
뺨 맞을 각오를 하고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스테파니는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그 날 저녁에 만나자고 했어요. 그러더니 계약조건에 하나를 덧붙였어요. 자기 종교를 존중해 달라고. 자긴 사실 스파게티교도래요. 그 신도를 ‘파스타파리안’이라고 한대요. 이상하지 않았냐고요? 그 때 머리에 뭘 쓰고 나오긴 했죠. 주방도구요. 그…면발 건지는 체 같은 거요. 근데 그 땐 설마 머리에 그런 걸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못 했으니까…그냥 특이한 모자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땐 맘 바뀌기 전에 붙잡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무조건 오케이 했어요.
결혼 준비하면서 이상한 거 없었냐고요? 부모님이 자꾸 스테파니를 스파게티로 헷갈렸던 거 빼면 일반적인 결혼이랑 똑같았어요. 처가쪽 친인척이나 친구나 직장동료는 안 만나봤냐고요? 친구는 다 미국에 있다고 했고요. 제 직장동료도 결혼식장에서나 봤는데요. 결혼식을 하는 주말에는 레스토랑 영업을 해야 해서 직장 동료는 못 온댔어요. 친인척도 다 미국에 있댔어요. 상견례를 하려고 했는데 그 때 마침 미국에서 트럼프가 장벽 쌓는다 입국절차 강화한다 막 그럴 때라서요. 장인장모님이 영주권자 아니시고 살다 보니까 좀 그렇게 되어서…혹시 상견례나 결혼식 참석하러 나온 사이에 정책이 바뀌어서 미국에 못 돌아갈까 봐 불안하다고 해서 나오지도 못 하신대요. 아, 그런 얘긴 당연히 스테파니가 했죠. 상견례도 국제전화로 했어요. 기계랑 친하지 않으셔서 스카이프나 페이스타임이나 그런 거 안 하신대요. 아직 피처폰을 쓰신대서 영상통화도 못 했고요. 장모님이랑 저희 부모님이 통화하셨는데 되게 과묵하신 분이라고…그러시더라고요. 결혼 준비하면서 중간중간 불안해하는 거 같긴 했는데 누구나 결혼 전엔 생각이 복잡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줄 알았죠. 싸운 적은 있었어요. 신혼여행을 파리로 갈까 했는데 단호하게 해외로는 안 가겠대요. 그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제가 농담조로 ‘스테파니 황’이 아니라 ‘스테파니 흐엉’ 아니냐. 혹시 한국사람 아니고 불법체류자 아니냐. 왜 해외 가는 걸 싫어하냐. 이랬더니 인종차별주의자냐고 화내서요. 미국 살면서 백인들한테 인종차별 당했나 보다, 해서 얼른 싹싹 빌었어요. 하필 그 즈음에 파리에서 폭동이 나서 한국인 단체관광객 탄 버스가 공격 당하고 그래서 이래저래 신혼여행도 취소해 버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