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은 했는데, 퇴근을 안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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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속에 작은 사람이 있어서 돈을 받으면 도로로록 쿵 음료수캔을 떨어뜨려 준다고 믿었던 아이는, 자판기처럼 월급 받은 만큼만 결과물을 내 놓고 싶은 직장인이 되었다.

업무 강도는 스타트업이고 위계질서는 공무원이고 연봉은 중소기업인데 ‘세상을 놀라게 할 아이디어 크리에이터’를 표방하는 회사의 직원은 절대 크리에이티브하지 않다. 사무실 구석의 라꾸라꾸와 삼시세끼 제공을 복리후생이랍시고 내세웠을 때 도망쳤어야 했다. 면접관들 눈빛이 퀭한 걸 보고 알아차렸어야 했다. ‘히뜩한 아이디어’를 눈 빠지게 찾아 다니는 회사는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다’며 문화생활비를 지원해 줬지만 정작 공연이나 책을 볼 시간은 주지 않았다. 직원들은 그 말을 ‘입금이 있어야 성과가 있다’는 말로 이해하고 ‘문화생활비를 포인트 말고 돈으로 줘. 아니면 그냥 연봉을 올려 줘’라고 기회 날 때마다 외치고 있지만 인사지원팀은 ‘월급’, ‘연봉’ 같은 특정 단어만 안 들리는 것 같다.

입사 이후 밤 11시 이전엔 퇴근한 적이 없다. 과장님이 죽지 않겠다고 매일 마시는 ‘이것저것 갈아 넣은 스무디’가 사실은 사람을 갈아 넣은 거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일하는 것도 감지덕지 할 처지로 몰린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번에 우리 팀에서 담당한 인터넷 바이럴 광고가 회사 창립 이래 최고 조회수를 찍었다. SNS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기자들이 광고주의 회사에 찾아 왔다. 광고주네 회사 앞에서 시위가 열렸다. 광고주는 사과문을 게시하고 급하게 광고를 삭제했다. 이미 캡처가 널리 퍼져 소비자들을 분노케 한 뒤였다. 그러게 내가 요즘 세상에 그런 반인권적이고 혐오적인 요소를 넣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회의 때 반대했건만. 재미있으면 된다고 우겼던 건 ‘불도저’라는 시대착오적 별명이 있는 CD(광고회사의 팀장)였다. 과장이 옆에서 이 정도는 그냥 패러디라고 했다. 최종안을 보고 요새 트렌드라고 좋아한 건 광고주였다. 세상의 평균적인 상식을 확인하고 나서야 회사는 이러한 사태의 원인을 ‘색출’해서 ‘징계’하겠다고 공표했다. 맨 처음에 아이디어 낸 사람은 내 옆자리 남자 카피라이터 대리였다. 팀 내 라이벌 관계라지만 대리는 남자고 나는 여자니까 어차피 승진은 그 대리 것이었다. 내가 경쟁자라서 그 아이디어를 덮어놓고 반대한 게 아니란 말이다.

그 아이디어를 좋다고 했던 건 CD, 옆에서 끄덕거리며 문제제기 안 했던 건 과장, 최대한 수정할 만큼 수정한 건 나, 내 수정본을 되돌린 건 CD, 최종 OK는 광고주, 일 터지고 나서 사과문 쓴 건 나였다. 그 과정 내내 스트레스 받으며 밤을 새야 했다. 피곤하니까 머리가 멍했다. 다들 일찍 끝내 버리고 싶은 마음에 그런 광고를 좋다고 빨리빨리 진행시켜 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회사 건물 지하의 편의점까지 가기는 귀찮아서 탕비실의 자판기로 갔다. 카페인이 절실했다. SNS를 돌아다니며 이 광고 만든 새끼 미친 거 아니냐는 댓글과 트윗을 캡처하다가 졸아서 실수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회사 자판기에는 카페인 음료 밖에 없었다. 데자와, 핫식스, 조지아 캔커피, 코카콜라. 동전을 넣는 대신 사원증을 찍고 조지아 캔커피 버튼을 눌렀다. 도로로록…쿵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판기 안의 작은 사람이 돈만 받아 먹고 음료를 내놓지 않는 장난을 친다고 믿기엔 내가 너무 어른이었다. 발로 자판기를 걷어찼다. 쾅 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독한 놈이다. 맞았는데도 캔을 내놓지 않다니. 음료 나오는 곳에 손을 넣었다. 캔이 걸려 있다. 한 번 더 걷어찼다.

“씨발, 자판기 고장 나면 내 퇴직금에서 까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