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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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깨나 있는 독신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할 거라는 게 상식이라면 유능한 탐정에게 조수가 필요하다는 건 탐정소설의 진리다. 왓슨 없는 셜록은 셜록이 아니듯이. 이번 ‘사건’의 조수는 지금 내 옆에서 방정맞게 오빠차 어쩌고 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 쌍둥이 오빠다.

“오빠 차 아니지. 우리 차야. 반반 냈잖아.”

“우리 차 뽑았다. 의뢰인 만나러 가~”

사실 이번 건은 ‘사건’도 아니다. 의뢰인은 30 대 여성. 비혼을 결심하고 나니 그동안 낸 축의금이 아까워서 회수하러 가는데 동행해 달라고 했다. 혼자서는 아무래도 용기가 안 난다며. 나는 탐정이지 심부름센터 직원이 아니라고 하려다가 이놈의 똥차 때문에 수락했다.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탐정 투어’를 하겠다며 영국 베이커 가 221B로 떠나기 전, 오빠랑 나한테 떠맡기듯 헐값에 넘긴 이놈의 차가 ‘수리비 폭탄’이었다. 수리비 지출만 아니었으면 탐정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는데…

“얼마 전에 썽이 만났는데, 걔가 나 보자마자 그러더라? 남매가 얼굴이 점점 닮아간다고. 내가 여장하면 너 같이 생겼을 거라던데.”

“가만 있었어?”

“당연히 그 자리에서 절교했지!”

“잘 했어!…너, 친구 몇 명 남았냐?”

쌍둥이의 좋은 점은 친구가 겹친다는 거다. 나쁜 점은 이란성인데도 친구들이 우리 둘이 똑같이 생겼다고 하는 거다. 내가 그래도 쟤보다는 낫지, 닮긴 뭘 닮아.

“이렇게 절교하다가 늙어서 친구 하나 없이 우리 둘만 남는 거 아니겠지?”

“돈 많이 벌어서 무조건 너랑 제일 멀고 비싼 동네에 사는 게 내 노후계획이다.”

“그게 될까? 이렇게 살다가는 너랑 나랑 돈도 없고 결혼도 안 해서 계속 둘이서 한 집에 살 수도 있어.”

“미쳤냐?”

“현실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의뢰인 잘 봐 둬. 네 십 년 후니까.”

배우자의 불륜증거 잡는 탐정인 부모 밑에서 자라면 부모님은 평범하게 결혼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도 자연스럽게 비혼주의자가 된다. 워낙 막장 케이스를 많이 보고 들어서.

의뢰인은 비혼’주의자’는 아니라고 했다. 결혼을 포기한 건 아닌데, 이제는 더 이상 소개팅이 들어오지 않고 연애할 기회도 없어서 ‘어쩌다 보니’ 비혼이 되었다고 헀다. 의뢰인이 메들리로 들으면 재미있다며 들려준 소개팅 전적은 이랬다.

“사회생활 초반에 만난 소개팅남은 은근히 돈자랑을 했어요. 집에서 한강이 보인다기에 나도 집에서 개천이 보인다고 했더니 이번엔 직접적으로 나한테 어디 사냐고 하더라고요? 데려다 주려나 싶어서 경기도민이라 서울에서 소개팅하면 집까지 두 시간 걸리는데 얘기하면서 가다 보면 금방 간다고 했는데 답이 애매모호했어요. 셔츠 끝에 이니셜 자수를 만지작거리길래 “평소에 물건 잘 잃어버리시나 봐요? 옷에도 이름을 박으셨네요” 했더니 말이 없어지고. 내가 그런 걸 사 본 적이 없는데 명품 셔츠는 이니셜 자수 박아 준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러고 보니 괜히 머리 쓸어넘기면서 보여 준 손목시계도 명품이었나 봐요. 있는 놈이 더 절약한다더니 커피만 마시고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소개팅 파토낸 놈, 결혼 사기 당해서 확 망해버려라!”

‘지적인 남자’라며 소개받은 사람도 있어요. 서로 좋아하는 책 얘기도 하고, 취향이 비슷하다 싶었죠. 근데 그 남자 메일 ID로 검색해서 트위터를 찾아 봤는데, 변태도 그런 상변태가 없더라고요. 아니, 여자가 넘어지면 일으켜줘야지, 치마 속을 왜 봐? 강풍 부는 날 우산으로 얼굴 가리고 저 여자 치마가 언제 펄럭거리나 주시하는 게 뭐 그리 떳떳하다고 트친들이랑 공개적으로 떠들어? 소개팅할 때 원피스 입고 나갔는데 저 새끼가 내내 뭘 상상하고 있었을까 생각하니까 소름끼치더라고요. 그 새끼는 왜 제가 안 만난다고 했는지 궁금했을 거예요. 그 새끼 트위터, 주선자한테 알려줬죠. 주선자가 여자였는데, 그 새끼랑 지금은 상종도 안 해요.

진짜 완벽한 남자도 만나봤죠. 잘 생기고, 젠틀하고, 근데 얘기를 하면 할수록 숨이 턱턱 막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멘토링을 받나 소개팅을 하나. 영어학원 새벽반 다니고, 주말마다 저소득층 청소년들 무료과외해 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유기견 입양해서 키우고 있고, 직장인 밴드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다 보니 내가 막 쓰레기 같고, 인생 망치면서 방탕하게 사는 것 같은 죄책감이 느껴지고. 진짜 좋은 남잔데, 딴 여자 줬으면 좋겠다…내가 가지기엔 너무 부담스럽다…근데 이 남자가 헤어질 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저랑 얘기가 너무 잘 통했대요. 나는 듣기만 했는데? 혼자서 다 떠들어 놓고 뭐라는 거야. 예의 바르게 잘 들어가셨냐고 카톡 보내고 그 다음 말은 안 했어요.

가장 최근에는…소개팅 전에 자기 사진 보내면서 내 사진도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세상엔 멀쩡해 보이는 미친 놈도 있잖아요. 전에 그 상변태새끼처럼. 내 얼굴 사진을 뭐랑 합성할 지 어떻게 알아요. 사진 보내지 않고, 어떤 스타일 좋아하시냐고 했더니 ‘여성스러운 스타일’이래요. 그래서 나는 머리 커트로 자르고 다니고, 안구 건조증이 있어서 렌즈 못 껴서 뿔테 안경 쓴다, 이랬더니 소개팅 장소랑 시간을 안 잡고 말을 빙빙 돌리길래 만나지도 않고 잘 퇴치했죠. 지는 핑크 셔츠에 단추 두 개 풀고 흰 파나마햇에 흰 바지 입은 사진 보낸 주제에. 지같이 시커먼 아저씨 같은 얼굴에 그 패션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남자들은 뒤에서는 여자들 더치페이 안 한다면서 소개팅 밥값 반씩 내거나 자기 거 자기가 계산하자고 하면 떨떠름해 해요. 한번은, 아, 그 인간은 얼굴이랑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데, ‘나도 벌 만큼 벌어요’ 하면서 내가 낸다고 했더니 기분 나빠 하던데요? 하여간 남자들은 유치해서 밥값은 지가 내는 대신에 여자는 소개팅 내내 웃으면서 우쭈쭈해 주길 바란다니까요. 내가 지 엄마도 아닌데, 처음 보는 남자가 뭐 그리 대단하고 재밌겠어요.”

그래도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고 여기는 건 좀 너무 이른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의뢰인의 설명은 이랬다.

“사내연애는 신입 때 입사동기랑 하거나 사수랑 하지 새삼 몇 년씩 본 사람들하고 갑자기 사귀겠어요? 다른 팀이랑 프로젝트할 때는 그냥 다 서로 야근에 찌들어서 호감이 생길 수가 없고요. 결국 방법은 동호회 아니면 소개팅으로 일부러 만나는 건데, 저번에 동호회 나갔더니 몇몇이 저처럼 취미활동은 관심 없고 소개팅 상대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기만 해서 분위기 엉망진창 되고 와해되었고요. 삼십 대쯤 되면 소개팅이 아니라 맞선이라서 스펙 교환하고 면접 보듯이 서로 평가하는데, 내가 그 치열한 경쟁 뚫고 입사하는 과정에서 질릴 만큼 질린 짓을 주말에 소개팅 나가서까지 또 해야 하나 싶으니까 때려치우는 거죠. 이 나이에는 주말에 집에서 뒹굴거려야 피로가 풀리는데, 다음 한 주가 피곤할 걸 각오하고 나간 소개팅이나 동호회가 그 모양이라니까요. 이제 내 인생에 로맨스는 없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축의금을 회수하려고 하는데요? 급전 필요할 일이 생긴 건가요?”

“취직한 이후로 진짜 해외여행 한 번 안 가고, 사람 안 만나고, 군것질도 안 하고 옷도 SPA브랜드에서 계절에 한 두 벌만 사고, 스마트폰 요금제 제일 싼 걸로 가입하고서 와이파이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미용실에서 커트만 하고, 다이어트한다는 핑계 대고 점심 굶고, 돈 안 들이고 운동하려고 유튜브 틀어놓고 홈트하고 그렇게 살았거든요? 맨날 야근해서 수당도 많이 받고, 취하고 싶으면 안주 없이 깡소주만 마시고…그렇게 좀 모으면 엄청 낡고 후진 17평 아파트 살 수 있겠더라고요. 이제 나도 전월세 난민 생활 좀 제발 청산하자. 근데 1년 사이에 내가 봐 둔 집이 1억이 올랐네요? 집 보러 간다고 했더니 집주인 새끼가 그 자리에서 2천만원을 올리더라고요. 더 저렴한 집은 없었냐고요? 있었죠. 밤늦게 퇴근하면 인적없는 골목길을 벌벌 떨면서 귀가해야 하는 동네에요. 다른 건 포기해도 안전은 포기할 수 없잖아요? 근데 직장 동료가 내가 집값 때문에 포기한 바로 그 동네에 집을 샀다는 거예요. 자기 돈 남편 돈 하고 합치고 대출에 부모님 도움 받아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하고 같이 사는 게 아니라 ‘네 돈과 내 돈을 합쳐서 우리 집을 사는 거’ 더라고요. 갑자기 그 동안 냈던 축의금이 아까운 거예요. 쟤들은 결혼해서 집도 사고, 애도 낳아 기를 텐데 나한테 축의금까지 받았어야 했나. 돌려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