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김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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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내뱉기 힘든 단어들의 무게에 눌려 입을 열어 대답하기가 힘들다.

 

애당초 질문의 의도가 아니었던 듯 세일의 대답이 없어도 김 노인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무슨 말이든.. 비명이든.. 터져 나와야 할 것 같은 상황인데 너무 조용하더라고. 지금 자네가 차고 있는 그 지랄 맞은 손목시계에서 나는 기분 나쁜 소리만 들리고…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거야. 난 여전히 종아리 끝까지 얼음 양동이에 발을 담그고 있고 사무실 가득 메운 땀 냄새도 여전한데 좀 전까지 앉아서 실실거리던 그 친구는 비명 한번 못 질러보고 잿더미로 변했다는 게…”

 

등 뒤에서 김 노인의 긴 한숨이 들려 온다.

 

“김씨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지 몸을 일으키는데 박 형이 그러더라고 ‘연결이 끊어진 거네’ 씨팔.. 그거면 설명이 충분하지 않냐?는 태도였어.. 그런데 뭐 알잖아? 박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뭔 놈의 연결인 것인지, 그게 끊어졌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누가 따지고 더 물어보겠어? 연결이 끊어졌다면 끊어진 거지.”

 

세일은 또다시 자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하실에 내려 갈 수 없으니 자네 둘 중에 한 명이 지하실에 가서 이걸 고치고 와야겠네.’ 무슨 생각이 든 줄 알아? 나도 그때는 자네 못지않게 박형을 신뢰하고 있었거든? 무뚝뚝하고 냉정해 보이긴 해도 믿고 의지할 수 있고..뭐.. 알잖아? 그런데 그 소리 듣는순간.. 뭐 이딴 개새끼가 다 있나? 싶은 거야. 아니 당연히 자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구는 선임자가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거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감춰야 하니깐..’

 

“.. 그런데 나란놈은 더 대책없이 비겁한 개새끼였지.. 지금이야 이렇게 이야기해도 그때는.. 왜인지 모르게 절대 지하실에 내려가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어.. 고개를 처박고 얼음 양동이만 바라보고 있었거든.. 그냥 외면하고 모른척하면 만사가 다 잘될 거란 식으로.. 그런데 뭐 결과적으론 나한테는 잘된 거지..”

 

김 노인의 말투에는 점점 더 물기가 묻어 나온다.

 

“어쩌면 김 씨랑 박형 둘 간에는 이미 누가 내려갈지 다 결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지… 내가 병신 새끼같이 고개 처박고 눈 돌리고 있는데 애초부터 너 따위는 생각도 안 했다는 듯 김씨가 박형이랑 이야기 주고받더라고.. 뭐 일단 눈을 가리고, 귀도 틀어막고.. 손으로 벽을 더듬어서 내려가라고 하더라고.. 사람이란게 웃기는 게 그 와중에도 호기심이 생기는 거야? 고개를 들어 봤더니 김씨가 캐비닛에 넣어둔 간이 의료 공구함에서 꺼낸 붕대로 눈 주변을 칭칭 동여 막고, 남는 부위를 길게 찢어내 귀를 틀어 막더라고..”

 

‘보아선 안될 것을 보지 않고, 들어선 안될 것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거야..’

 

“‘누구의 목소리로 무얼 듣게 되든 대꾸를 해선 안 돼. 머릿속에서 뭐가 떠오르든 모두 무시하도록 하게.’ 뭐 대충 그런 이야기였을 거야. 난 박형이 그렇게 긴장되는 말투로 이야기하는 건 그때 처음 봤단 말이지? 아무튼, 손으로 더듬어 가다 보면 굵은 줄이 잡힐 텐데 날이 너무 더워서 안에 있는 뭐가 녹았을 거라고, 녹은 데를 그냥 잡아 뜯고 나오면 시계가 제대로 동작할 거라고 하더라고. 이상하잖아? 어떻게 들어가 보지도 않고 그걸 다 알 수 있냐고? 그런데 김 씨는 또 그걸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

 

‘그들은 모든 걸 바라보고, 모든 걸 듣고, 무엇이든 알고 있다.’

 

“김씨가 지하실 문을 열고 아래로 내려가는데.. 박 형은 내 쪽에 신경도 안 쓰고 거기만 바라보고 있었어.. 난 내 발이 얼음 속에서 점점 퍼렇게 변해가는 것만 보고 있고.. 도대체 몇 분이.. 아니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더라고. 때때로 무슨 소리가 들려 오는 거 같아 고개를 쳐들어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냥 자네 손목에 찬 그 박형의 시계가 내는 둥둥 소리만 들렸어.. 뭐가 인제야 제대로 돌아왔구나 싶은 걸 어떻게 안줄 알아? 벽면의 시계가 어느 순간 9시로 돌아와 있더라고. 처음부터 3시를 넘어 본적이 없다는 듯 그제야 아 김씨가 곧 올라오겠구나! 싶은 안도감이 들었어..”

 

의식할 새도 없이 세일은 지하실 문을 한번 바라보았다. 굳게 닫혀있는 철문이 김 노인의 이야기에 요동치는 세일의 감정을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철문을 열고 올라온 김 씨는… 내려갈 때와는 다른 사람이었어.. 아니 그건 다른.. 아무튼, 힘겹게 양팔과 무릎으로 바닥을 기다시피 올라와 우리를 바라 보는데.. 눈과 귀를 가린 하얀 붕대로 뻘건 피가 배어 나오다 못 해 줄줄 흘러내리고 있더라고… 손으로 박 형을 가리키면서 ‘당신이.. 더러운 찬탈자 놈이 우리 모두를 속였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눈과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격앙된 말의 내용과는 달리 입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귀까지 쭉 찢어져서 웃고 있고.. ”

 

김 노인의 설명에 김 씨의 기괴하게 뒤틀린 얼굴이 떠오른다.

 

“.. 난 너무 놀라서.. 뭘 해야 할지.. 사실 나한테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때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