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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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전기가 나갔나? 왜 비상 발전기가 작동을 안하는거지?” 라고 말한다.

 

세일은 그 해답을 알고 있다.

 

천천히 박 노인의 입이 열리기 시작한다.

 

무방비하게 포식자의 입을 바라만 보고 있는 피식자처럼 회의실 내 모두의 시선이 박 노인에게 향한다.

 

“우리네 일과 당신네 일이라 말하였소? 원장. 당신네 직원이 우리를 버러지들, 사회적 기생충들이라 지칭하더군.”

 

세일이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는 이야기다.

 

‘그는 모든 걸 바라보고, 모든 걸 듣고, 무엇이든 이야기한다.’

 

“..그건..”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박 노인의 오른손이 올라간다.

 

모두가 그 뜻을 이해한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원장과 그 직원은 아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겠지. 남에게 떳떳이 말하기 힘든 작은 사고 몇 번이야 쳤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성실한 학창시절을 보냈을 테고. 그래.. 서울대를 나왔겠군.”

 

박 노인의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육중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지금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 나의 삶. 나의 지위. 그 모든 게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내가 이루어 낸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겠지. 오가며 당신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이들 모두를 당신들보다 못한 존재라고, 주어진 것도 없고 이루어 낸 것도 없는 버러지들이라고 생각하나?”

 

흰머리의 남자가 반항기 어린 시선으로 박 노인을 마주 바라본다.

 

” 그 버러지들이 만들어내고 지탱해주는 문명이 사라진다면 한평생 스스로 음식을 차려 먹어 본적도 없는 당신은 당신이 무시하는 버러지들의 도움 없이 굶어 죽게 될 거요. 스스로 운전을 해본 적도 없으니 어딘가를 나다니지도 못하겠지. 스스로 불을 피워본 적도 없으니 지금처럼 전기가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 오면 눈과 귀를 막고 어둠이 물러나기만을 기다리게 될 거요.”

 

‘허락되지 않는.. 이라고 하셨어..’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피부의 잔털 하나하나가 곤두선다.

 

“당신네 일이라는 건 우리의 일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성립될 수가 없소. 당신이 비웃는 그 어린애 동화 같은 일들을 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는지 아시오? 그 어린애 동화 위에 당신들의 삶이, 직장이, 문명이 의지하고 기대고 있는 것이오.”

 

처음부터 꺼진 적이 없었다는 듯 어느 순간 회의실의 모든 전등에 불이 들어와 있다.

 

회의실 중앙에 앉아 있던 남자가 긴 한숨을 내쉰다.

 

“어르신.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국정원도 나름의 명분과 원칙에 따라 수사를 진행한 것이니 형식적으로라도 잠깐의 협조를..”

“각하. 가르침을 주고 길을 보여주는 것은 나의 역할이요. 당신들의 역할은 듣고 뒤따르는 것이지.”

 

천 조각이 말문을 틀어막기라도 한 듯 회의실 중앙에 남자는 입을 다물고 넥타이만을 어루만진다.

 

“여기 있는 당신들 모두에게 말하겠소. 과천은 나의, 우리의 도시요. 당신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싶다 한들 내가, 우리가 허락할 수가 없소.”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를 협박하는 거요!”

 

흰머리의 남자 옆에 앉은 키가 크고 깡마른 남자가 소리를 친다.

 

얼마 전 TV에서 군납 비리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협박? 협박이란 건 당신들이 하지 않을 일을 하도록 위협하는 것이지. 이건 통보요. 장관. 당신들은 모두 내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따르게 될 것이오…”

 

박 노인이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회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호흡이 박 노인의 호흡을 따라간다.

 

세일의 귀에 박 노인의 기계식 시계가 내는 기묘한 맥동이 들려온다.

 

“그래 협박이라고 하지. 당신들 모두가 한번은 접해봤을 비밀들. 당신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또 다른 버러지들이 잘 정리해서 종이에 인쇄한 채로 책상 위에 올려둔 걸 보고 어린애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겠지. 마법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거요. 잘 새겨들으시오 장관. 당신이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어린아이 동화 속 마법이 당신이 알고 있다 믿고 있는 모든 현실을, 삶을 뒤흔들어 놓을것이오.”

“.. 당신의 말 두려워할 사람.. 여기에 아무도 없으..”

 

박 노인이 코웃음을 친다.

 

“두려워해야 마땅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지. 장관 당신은 평생 잠을 자지 않을 자신이 있소? 남은 일생 꿈을 꾸지 않을 것 같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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