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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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의 ‘회의’이후 출, 퇴근 시간마다 세일은 백미러를 살피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박 노인의 ‘설득’이 먹힌 것인지 그 존재가 사라지기라도 한 듯 좀처럼 항공 점퍼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전화라도 걸어서 확인해 봐야 하나?’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어 보였다.

 

세일의 삶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건 항공 점퍼 남자의 모습뿐만은 아니었다.

 

박 노인이 정부 서울 청사 대회의실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이후로 그 위세에 질리기라도 한 듯 잠이 들면 늘상 찾아와 비밀을 속삭여 주던 꿈까지 자취를 감추었다.

 

내심 박 노인이 말한 내용의 해답을 꿈속에서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던 세일로써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두 번째 월급날이 다가오도록 항공 점퍼 남자로부터의 연락이 없자 박 노인의 설득이 확실히 통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 세일 군 월급도 들어왔으니 나랑 벤츠 보러 가야지?”

 

근무 교대시간에 짐을 챙기다 말고 농을 걸어오는 이 노인의 말에 어느덧 이곳에서 일한 지도 2개월이나 지났다는 게 떠올랐다.

 

“아.. 그게..”

 

문뜩 이 노인이라면 세일의 의문에 순순히 답을 해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차 한 대 더 사는 게 크게 부담이 되는 벌이도 아니잖아?’

 

“저 그럼 언제쯤이 좋으세요?”

“어? 진짜 사게? 그럼 요번 주 토요일날 내 단골매장 갈까? 거기 딜러한테 전화해 두면 우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네.그럼 제가 3시까지 사무실로 올까요?”

“그러지 말고 3시 반까지 거기 매장으로 와. 벤츠를 사는데 그 고물차는 계속 가지고 있을 필요 없잖아? 바로 거기서 타던 거 처분하고 벤츠 끌고 가라고.”

“…네 알겠습니다. 그때 뵐게요.”

 

쓴웃음을 지으며 세일은 사무실을 나서는 이 노인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달부터는 어떻게 근무해야 하지? 지금처럼 계속 박 영감님이랑 오후 근무 하는 건가?’

 

딱히 던지는걸 꺼릴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저 영감님 요번 주 지나면 제 수습 기간 마지막 달인데 계속 지금이랑 같은 시간에 나오면 될까요?”

 

뜨개바늘을 붙들고 있는 박 노인의 손길이 잠시 늦추어진다.

 

그간의 관찰로 박 노인이 세일의 질문을 깊게 생각한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오전과 오후 근무를 한 달씩 서봤으니 다음 달부터는 야간 근무를 서는게 이치에는 맞겠지..”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 듯 한동안 박 노인의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결심이 선 듯 박 노인의 뜨개바늘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밤 11시에 출근해서 김 형과 야간 근무를 서도록 하게.. 그리고 자네 수습 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서 우리 4명 근무 일정도 다시 재조정하도록 하겠네.”

 

‘한 달만 더 있으면 나도 정식 교대근무를 서겠구나.’

 

박 노인의 선언에 조금은 마음이 무거워진다.

 

5일 일하고 이틀 쉬는 것은 지금과 똑같으나 남들 쉬는 휴일과 무관하게 사무실에서 미리 계획해둔 휴무일에만 쉴 수 있는 방식이다.

 

‘아쉬울 것 없어. 정식으로 사무실 일원 되는거고.. 근무가 힘든 것도 아니니..’

 

정부 서울 청사에서 박 노인과 이 노인을 바라보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사소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보수가 나쁜 것도 아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이고, 평생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다.’

 

알 수 없는 결의가 마음속에서 맺어진다. 세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박 노인이 작게 미소를 짖는다.

 

“왜? 이제 곧 주말에 못 쉬게 돼서 아쉽나?”

“아닙니다. 그런 거 보다 조금 벅차서요..”

 

박 노인은 더 이상 캐묻는 일 없이 시계에 집중한다. 세일 역시 박 노인을 따라서 시계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이 노인이 보내준 주소의 매장은 한산하기만 했다.

 

‘영감님 늦으시나? 사무실에서 퇴근하고 바로 오시면 지금쯤 도착하실텐데..’

 

생전 처음 들어가 보는 화려한 자동차 매장의 위용에 위축되어 어찌해야 할지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세일을 매장 한가운데 내버려 둔 채 물건을 평가하듯 위아래로 훑어보기만 하는 매장 직원들의 모습이 왜인지 낯익다.

 

매장 주차장에 세워둔 세일의 중고차로 이미 평가가 끝난듯 냉랭하기 짝이 없는 태도들이다.

 

세일 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경험이고 감정이다.

 

‘영감님 오실 때 까지 매장 밖에 나가 있을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문뜩 은행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박 노인의 검은 명함이 만들어낸 마법이 생각난다.

 

세일은 얼마 전 TV에서만 보았고 평생 실제로 만나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을 윽박지르던 박 노인을 떠올렸다.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지갑 속에 넣어두고 다니는 자신의 명함을 끄집어내 손에 쥐니 묘한 안정감이 든다.

 

마법의 부적이나 되는 양 명함을 꼭 쥔 채로 세일을 투명 인간 대접하는 매장 직원 중 한 명의 눈을 똑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