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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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흘러간 이틀이 지나고 평소의 지루한 일상이 되돌아오자 박 노인과의 근무는 점점 더 커다란 부담이 되어 세일을 짓눌렀다.

 

박 노인과의 며칠은 이 노인과 보낸 한 달 보다 더욱 지루하게 흘러간다.

 

짬짬이 일간지를 탐독하고 이 노인의 벤츠 자랑을 들을 수 있었던 8시간은 묵언 수행과도 같은 박 노인과의 8시간에 대면 재미난 유흥거리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간지 들고 와서 보면 진짜 혼나겠지?’

 

이 노인의 농담 섞인 경고가 아니더라도 박 노인의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함 엄두는 감히 나지 않는다.

 

그간의 경험으로 박 노인이 말수가 없고 직선적인 성격일 뿐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닐 거란 생각은 들었다.

 

그렇다 해도 세일에겐 박 노인의 업무에 임하는 진지함을 애써 시험해 볼 정도의 담대함은 없었다.

 

때때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박 노인에게 사무실의 과거나 유래에 관해 물어 보면 돌아오는 건 단답형의 대답이나 모호하기 짝이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대답뿐이었다.

 

‘분명 제일 많이 알고 계시고 답해 줄 수 있는 건 박 영감님이 맞는 거 같은데..’

 

아직 김 노인과는 근무를 서보진 못했지만, 사무실 내의 최선임은 박 노인임이 분명해 보였다.

 

교대 시각에 잠깐씩 마주치며 본 바로는 이 노인이나 김 노인이 박 노인을 대하는 태도에는 묘한 경애와 두려움과 의존이 뒤섞여 있었다.

 

근무 시간의 지루함과는 별개로 세일의 근무 집중도는 점점 더 높아졌다.

 

때때로 움직이지 않는 시계의 시침을 바라보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듯한 기분이 들며 묘한 평온함이 밀려왔다.

 

이 노인의 말대로 평생 가야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은 시침이지만 그 부동성이, 한결같음이 세일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저 움직이지 않는 바늘이 원숭이 왕국을 지탱해주는 반석이야..’

 

절대적인 안정속에서 박 노인의 시계가 내는 맥동과 뜨개질바늘이 맞부딪히며 내는 작은 마찰음들이 더해지면 마법과도 같은 깨달음이 밀려오기도 했다.

 

모든 평온함 속에서 유일하게 세일을 괴롭히는 것은 항공 점퍼 남자의 존재였다.

 

세일은 하루에 두어 차례 화장실을 핑계로 사무실을 나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너 그런데 근무 중에 너무 자주 자리 비우고 전화 하는 거 아니니?”

 

어머니는 세일의 걱정과 염려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오히려 세일의 불성실한 근무 태도를 염려한다.

 

‘하긴 아직 수습 기간이라 하셨잖아.. 정작 그 남자 걱정하다가 내가 직장 잘리기라도 하면 그것도 곤란하겠다. 그냥 주말에 쉴 때 직접 찾아뵙자.’

 

박 노인과의 첫 주가 지나가도록 항공 점퍼 남자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토요일이 오자 세일은 어머니의 병실을 방문했다.

 

‘여기라면 분명 나 따라오지 않았을까?’

 

병원 입구에서부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별다를 건 없다.

 

“엄마. 별일 없었어요?”

“너 그 질문만 요번 주에 몇 번을 하니? 자꾸 근무 중에 전화하 하지 말고 성실히 좀 일해. 내가 신경이 쓰여서 얘..”

“어.. 알았어요.”

 

어머니의 지적에 월요일에 지각을 한 게 떠올라 얼굴이 달아오른다.

 

세일은 괜히 혀를 굴려 더디게 아물어 가는 입안 상처를 눌러보았다.

 

이 노인에게 맞아 부어오른 자리는 겉에서는 더 이상 티가 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주말인데 놀러도 좀 다니고. 너도 이제 번듯한 직장도 구하고 했으니 연애도 하고 해야지.”

 

어머니의 말과 입안의 통증이 월요일에 보았던 간호사가 떠올리게 한다.

 

“아 쫌.. 그런 말은..”

 

자신의 감정을 속이듯 세일은 괜스레 짜증을 내었다.

 

“차도 뽑았다면서.. 기껏 사무실 어르신들이 주말에는 쉬게 해주시는데 어디 멀리 좀 다니고 해. 다 큰 애가..”

 

문가에서 작은 비웃음이 들려 오는 듯 하다.

 

붉어진 얼굴로 간호사의 모습을 기대하며 세일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병실 문은 굳게 닫혀있기만 하다.

 

“알았어요. 그럼 가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도대체 병실에만 누워있는 내가 무슨 일이 뭐가 있겠니? 어서 가서 쉬기나 해.”

 

채근하는듯한 어머니의 말투에 괜한 서운함이 밀려온다.

 

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세일은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항공 점퍼 남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인지 간호사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충동에 휘둘려 세일은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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