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왕(鼠王)

  • 장르: 판타지, 로맨스 | 태그: #궁중로맨스 #주술
  • 평점×169 | 분량: 123매
  • 소개: 미친 어머니와 살고 있는 쥐의 팔자를 타고난 소년은 시체를 분해해서 내다팔며 지내다가 어느날 왕이 된다. 한날 한시에 태어나 같은 사주를 지닌 이복형제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이복형제... 더보기

서왕(鼠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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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년(子年) 자시(子時)에 태어났다. 궁의 신녀였던 어머니는 내가 쥐의 팔자를 타고 나서 재물복이 많고 자손이 번성하며 다복하게 살 것이라 했다.

어머니와 내가 단둘이 살던 집은 성 밖, 사형장 근처에 있었다. 어머니는 쥐가 내 수호신이고 내 팔자는 쥐에 달려있다 하여 쥐를 잡지 않았다. 집 안 어디에나 쥐가 있었다. 방 안에는 쥐똥이 굴러다녔고 옷은 쥐가 쏠아서 구멍이 났다. 쥐들은 부엌에서 음식을 먹어 치웠고 사람이 수저를 대기도 전에 쥐들이 달려들었다. 기둥은 쥐가 갉아대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늘 환청처럼 찍찍대는 소리가 들렸다. 닭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쥐는 잠든 닭의 항문으로 들어와 닭의 속을 다 파먹는다고. 나는 잠든 사이에 쥐가 내 손가락을 잘라먹고 내 속을 파먹을까 봐 늘 깊이 잠들질 못 했다.

집 안 한가운데는 쓰러져가는 집구석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풍스러운 청동새장이 있었다. 어머니가 궁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라 했다. 그 새장 안에는 어머니가 특별히 아끼는 늙은 숫쥐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쥐가 내 운명을 주관하는 쥐라서 꼭 집 안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저녁 새장의 쥐에게 예를 올렸다. 그 쥐에게는 우리 집에 있는 옷 중에 제일 좋은 옷을 이불로 주었고 밥도 따로 해 먹였다. 그런데도 그 쥐는 자꾸 새장 창살을 갉아댔다. 어머니는 쥐의 앞니를 뽑고 지극정성으로 먹이를 갈아서 한입한입 떠 먹였다.

우리 식구는 죽은 자들 덕에 먹고 살았다. 죄인들이 집 근처 사형장으로 끌려와 사형당하면 밤에 가서 시체에서 옷가지를 챙기고 머리자락을 잘라내고 살을 발라내고 내장을 들어냈다. 헌 옷은 우리 모자가 입고 비싸 보이는 옷은 시장에 내다 팔았다. 살과 내장은 병자들에게 팔렸다. 인육이 병을 낫게 한다는 은밀한 속설 덕분이었다. 죄인들의 머리카락은 왕실 여인들의 머리를 장식하는 가발이 되었다. 손가락 같은 자투리 인육은 쥐들에게 먹이로 던져 주었다. 남은 시체는 뒷산에 내다버렸다. 쥐가 시체를 파먹고 까마귀가 뜯어먹었다. 제일 운수 좋은 날은 대역죄로 반역자와 일가가 몰살당하는 날이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남자부터 여자까지, 노비부터 귀족까지 시체 종류도 다양하고 수도 많았다. 안 좋은 날은 죄를 일찍 자복하지 않았는지 고문당하다 죽은 시체가 버려지는 날이었다. 고문당한 시체는 이미 뼈와 살이 너덜너덜하고 내장도 파열되어서 별로 건질 게 없었다. 대부분의 시체들은 가족도 찾아가지 않았지만 어떤 시체는 가족도 아닌 친구나 제자가 몰래 찾아와 울며 시체를 수습해갔다. 그런 날은 남는 게 없었다. 제일 재수없는 날이었다. 백성들은 태평성대라고들 했지만 사형은 끊이지 않았고 우리 식구는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나는 늘 쥐가 들끓는 이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머니도 그랬다. 어머니는 노망난 노인네가 옛날 얘기하듯 몇 번이고 내게 말하곤 했다. 언젠가는 내 아버지, 이 나라의 왕이 우리 모자를 궁으로 불러주실 거라고. 어머니는 후궁이 되고 나는 왕자가 되어 청동새장의 쥐와 함께 궁에서 비단옷을 입고 기름진 고기를 먹으며 살 거라고. 나는 쥐의 팔자를 타고 났으니 귀족 여자를 본처로 두고 기생과 노비를 첩으로 들여 쥐처럼 많은 자식을 낳고 다복하게 살 거라고. 언젠가 내 아버지, 이 나라의 왕이 우리 모자를 궁으로 불러주시면. 내게 인육을 사 가는 사람들이 나를 죽은 죄인 시체로 먹고 사는 쥐새끼라고 멸시할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왕자라고 불렀다. 왕께서 우리를 궁으로 불러주시면 저들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이 굳어 우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거라고.

어머니만 그렇게 말했다면 난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미친 여자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서 환관이 어머니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했기에 그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서 환관은 우리 집에 드나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밤에만 은밀히 우리 집에 와서는 쥐가 뜯어놓아 제 구실을 못 하는 발을 치고 쥐가 뛰어다니는 마루에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진짜 비단옷을 입은 수염 없는 서 환관이 굽신거리며 궁중의 예를 갖추는 꼴은 기괴한 광대극 같았다. 눈이 작고 하관이 빠르고 말할 때마다 검붉은 잇몸이 보이는 왜소한 서 환관은 늘 어머니를 귀빈마마, 나를 왕자라 했다. 어머니는 서 환관에게 왕의 안부를 물었고 서 환관은 어머니와 내 동태를 살폈다. 나는 서 환관의 생김새가, 늘 흘끗거리며 곁눈질하는 눈이, 보란 듯이 비굴하게 실실거리는 말투가 다 꼴보기 싫었다. 이유도 모르게 왠지 그냥 싫었다.

“어머니, 저는 저 고자 놈이 싫어요.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해 주세요.”

어머니는 서 환관이 우리 모자의 은인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나를 뱄을 때 어머니를 궁 밖으로 내보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서 환관에게 몇 번이고 들었다.

“그 날 귀빈마마께서 꿈을 꾸셨다고. 용종을 잉태하실 거라 하셨지요. 믿어봐서 나쁠 건 없지 않사옵니까? 소신이 귀빈마마를 출궁시키고 그 자리에 다른 신녀를 두었사옵니다.”

서 환관은 왕을 속이고 신을 속였다. 신녀 한 명이 왕과 동침하고 죽임을 당해야 왕의 조상신들이 나라를 지켜준다고 했다. 왕은 최빈과 지내다 새벽에야 돌아와 귀찮은 듯 의무적으로 내 어머니를 짧게 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대신 죽은 신녀의 청동새장에서 새를 날려버리고 빈 새장을 들고 궁에서 몰래 나왔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지니면 액운을 떨칠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고 했다. 서 환관은 어머니에게 언젠가 다시 궁으로 들여보내주겠다고 약조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기다리시면 적기에 전하께서 귀빈마마와 저하를 입궁시키실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나와 어머니를 다시 입궁시키실 분이었다면 애초에 출궁시키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때 귀빈마마께서 출궁하지 않으셨다면 그 다음날 신께 바쳐졌을 것이옵니다. 왕과 하룻밤을 보낸 신녀가 임신했다는 걸 믿어줬다간 모든 신녀가 회임했는지 밝혀질 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려 거짓말을 하고 볼 겁니다. 다른 후궁마마들께서 귀빈마마를 견제하느라 전하의 눈과 귀를 가렸을 뿐 언젠가는 현명하신 전하께옵서,”

“후궁들이 전하의 눈과 귀를 가려서 전하께선 이미 내 어머니의 존재를 잊으셨을 거다.”

“소신이 있지 않사옵니까. 소신을 믿으시옵소서. 언젠가 적당한 때에 전하를 가린 후궁들의 손을 치우고 전하께 말씀올릴 것이옵니다.”

“나는 내 분수를 안다. 나는 헛꿈은 꾸지 않아. 입궁은 꿈도 꾸지 않는다.”

나는 헛꿈은 꾸지 않아. 그러나 그런 말을 한 날이면, 갈빗대 사이에 칼을 넣어 백정처럼 시체를 분해한 날이면, 청동새장 안의 쥐가 찍찍대던 날이면, 나는 아이들이 개미를 밟아 죽이듯 재미로 쥐를 죽였다. 태워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이고 밟아 죽이고 찢어 죽였다. 쥐가 지나치게 많은 집에서 쥐들은 늘 굶주렸다. 죽인 쥐를 쥐떼 가운데 던지면 쥐가 쥐를 먹었다. 그런 날들이 지나갔다. 사람도 죽고 쥐도 죽고 사람도 살고 쥐도 살고 사람이 사람을 먹고 쥐가 쥐를 먹는 날들이.

집이 불탄 건 어느 핸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겨울날이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