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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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점퍼의 남자가 사라지자 세일은 차가 지나 다니지 않아 얼어 있는 개활지 옆 도로를 무모한 속도로 내달렸다.

 

가속 페달에 힘을 줄 때마다 타이어가 기묘한 신음을 흘리며 차가 옆으로 조금씩 흐른다.

 

‘고물차 같으니라고!!’

 

벤츠를 사라는 이 노인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이 영감님은 퇴근하셨겠지. 화나서 내 전화도 안받으시는걸꺼야..’

 

홀로 박 노인을 대면할 생각을 하니 명치 아래가 쥐여 짜이듯 답답해져 온다.

 

두려움은 곧 더 큰 죄책감에 사로잡혀 잊힌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늦잠을.’

 

내용을 정리하기 힘든 기묘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꿈속의 인물이 세일의 기상을 방해하기라도 한 듯 현실과 완전히 단절돼있던 감각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다.

 

세일은 다시 한번 머리를 세차게 좌우로 내저었다.

 

‘가서 제대로 사과하자. 두 번 다신 이런 일 없을거라고.. ‘

 

사무실 옆 공터에는 박 노인 차 옆에 이 노인의 벤츠가 아직도 세워져 있었다.

 

굳게 닫힌 철문을 마주 대하자 죄책감에 눌려있던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세일은 철문을 열어젖혔다.

 

사무실 안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세일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고개를 떨구며 말하는 세일의 왼쪽 뺨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둔중한 통증이 가해진다.

 

어찌나 세차 게 맞았는지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세일은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말을 내뱉는 세일의 입에서 피비린내가 같이 뱉어져 나온다.

 

세일은 말없이 찢어진 입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목구멍으로 삼켰다.

 

“내가! 우리가! 자네한테 어려운 일을 시켰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 있으면! 그냥 전화 한 통 해주면 되는 거! 자네 편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온갖 편의 다 봐주었고!”

 

좀처럼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이 노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세일의 가슴에 틀어박힌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입을 여니 또다시 입안으로 피가 흘러나온다.

 

세일은 이를 맞붙이고 볼을 오므려 피를 머금었다.

 

“… 그냥 성실하게..”

 

한참을 말을 잊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이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니 눈가가 축축하다.

 

천장에 달린 흐릿한 가스등의 조명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는 이 노인의 어깨가 떨린다.

 

그런 이 노인을 바라보고 있으니 세일의 가슴속에서 묵직한 게 차오르며 눈가가 달아오른다.

 

분노나 수치심 때문은 아니다.

 

“…”

“이 형. 세일 군도 그만한 면 알아들었을 테니 인제 그만 퇴근해요. 근무 시간도 한참 지났는데 가족들이 걱정할 것 아니오.”

 

또다시 사과의 말을 내뱉으려는 세일의 말을 끊고 여전히 의자에 앉아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자세로 박 노인이 말한다.

 

이 노인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깊은 한숨을 내뱉고 옷가지를 챙겨 사무실을 나선다.

 

좀 전까지와는 달리 축 늘어진 이 노인의 모습에 세일은 더 이상 사과의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세일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사무실을 나서는 이 노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박 노인의 옆으로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앉아서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게.”

 

세일의 사과 따위는 흥미가 없는 듯 박 노인은 시계만을 바라보고 있다.

 

“네 알겠습니다.”

 

더 이상의 사과 없이 세일은 박 노인이 말을 따랐다.

 

의자에 앉아 자세를 바로 하고 시계를 보고 있으니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통증이 밀려온다.

 

왼쪽 송곳니 아랫입술도 터졌는지 불쾌한 이물감이 느껴진다.

 

온갖 감정이 요동치며 빠르게 뛰는 맥박 때문인지 길게 찢어진 안쪽 왼뺨의 상처에서는 쉬지 않고 피가 흘러내린다.

 

‘이거 꿰매야 하는 거 아닌가?’

 

세일은 혀를 놀려 찢어진 입 안의 상처를 눌러보다 흠칫 놀라 시계에 집중했다.

 

‘뭐 하는 거야?! 어처구니없는 짓 저질러 놓고 이거 조금 아프다고 딴 생각이나 하고 진짜 ..’

 

세일은 다시 한번 이를 꽉 깨물고 입안의 피를 빨아 먹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박 노인이 말없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맞은편의 벽으로 걸어갔다.

 

무의식적으로 박 노인을 쫓아가려 하는 시선을 억누르며 세일은 시계에 집중했다.

 

뒤편에서 아이스박스의 뚜껑이 열리는듯한 마찰음이 들리더니 무언가를 뒤적이는 소리가 난다.

 

무시하고 세일은 시계만을 바라보았다.

 

“이거 사놓은 지 좀 된 얼음이지만 큰 문제는 없을 테니 입안 상처주위에 머금고 있게.”

 

세일은 얼떨결에 박 노인이 내민 얼음 봉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입술 터진 데는 이걸로 얼음 감싸서 찜질하도록 하게.”

 

박 노인은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부드러운 재질의 손수건을 재킷 윗주머니에서 꺼내어 건넸다.

 

감사나 사과의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박 노인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박 노인은 손수건과 얼음 봉지를 받아들면서도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세일을 잠시보다 의자에 앉았다.

 

얼음을 머금자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굳으며 한층 더 역한 기운이 느껴진다.

 

터지고 부풀어 오른 왼쪽 아랫입술은 점점 더 크게 부어오른다.

 

입안의 한기와 고통과 이물감과 역함을 참으며 세일은 시계에만 집중했다.

 

세일의 시야를 가득 메운 움직이는 않는 시계의 바늘을 보고 있자니 시간마저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