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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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릴없이 약속 장소 주변을 배회하며 세일은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고 또 보았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닐까?’

 

통장 내역만을 보았다면 합리적인 의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월급 명세서에 찍힌 액수까지 오차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 달 전 까지만 해도 빚에 허덕이는 신용 불량자 였는데.. ‘

 

그토록 짧은 기간에 어지간한 사회 초년생들이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올려야 하는 부를 축적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과도한 보수와 복리후생에 비해 터무니없이 하찮고 시시한 업무를 떠올리니 죄책감마저 든다.

 

지치고 찌든 표정의 친구들이 모두 모이건 세일이 약속장소에 도착하고도 4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명목상으로는 세일의 입사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몇 잔의 술과 몇 마디의 자조적인 농담이 곧 술자리를 직장 생활에 대한 푸념의 장으로 만들었다.

 

“진짜 좃같은게 뭔지 알아? 난 담배도 안 피우잖아? 자기들은 하루에 몇 번씩 담배 태우러 나가서 시시덕거리고 오면서 온종일 화장실 딱 2번 가면서 일한 내가 조금만 일찍 가도 불성실하다고 지랄 지랄들이야. 같이 담배 피우러 가는 새끼들은 사회생활 잘하는 거고.. 염병..”

 

“그정도면 낫지. 니네 우리 똘아이 사장 이야기 들었지? 요번에 우수 중소기업에 뽑혔다고 매경에서 인터뷰 했잖아? 전 직원들 자전거 한 대씩 주고 자전거 타면서 친목 도모하고 어쩌고.. 그거 우리 월급에서 까서 지 친구가 하는 자전거 회사 꺼 강제로 사게 한 거야. 그리고 자전거도 꼭 주말에 전 직원 다 불러내서 타게 한다. 누가 감기 걸려서 안 왔다고 소새끼,개새끼 하면서 욕하는데 아주.. 그래놓고 인터뷰 할 때는 무슨 직원들 위해서 자기 삶 다 버린 인간처럼 포장하더라..”

 

“그래도 니들은 돈이라도 받잖냐.. 야근 하는 것도 위에 눈치 보여서 하는거고.. 난 진짜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다.. 집에 10시 이전에 들어가는 게 소원이라고.. 그러면서 받는 돈은 씨발 진짜.. 내가 그냥 알바를 두 탕 뛰는 게 낫지.. 그렇게 죽어라 일해봐야 모이는 돈은 한 푼도 없고..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괴롭게 사는 것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

 

친구들의 신세 한탄을 듣고 있으니 작은 죄책감이 밀려 들어온다.

 

그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감정은 우월감이다.

 

세일은 20여 년 동안의 인생에서 남들보다 더 나은 처지에 서서 우월감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세일이 너 취직한 데는 어떤데?”

“어 그냥.. 안전관리직 비슷한 거야.”

 

세일은 앞으로 직장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때는 ‘안전 관리직’이라고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연봉은? 좀 주냐? 작은 회사라고 하지 않았어?”

“뭐.. 나쁘지 않게 주는 거 같다.”

“주면 주는 거지 주는 거 같다는 뭐야? 새끼 되게 거만하게 말하네.”

“아니.. 오늘 처음 받는 거라 내역을 정확히 몰라서.. 그런데 괜찮아.”

“그럼 오늘 니가 쏴라! 너 취직 했다 해서 우리가 나눠 사줄라 했는데 말하는 거 보니 새끼 괜찮은 데 갔나 보네.”

“그래. 너희들한테 학생 때부터 신세 진 것도 많고 하니 오늘은 내가 다 낼게.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가고 싶은데 다 가자.”

 

고개를 끄덕이는 세일을 보며 친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금요일 저녁에 시작된 술자리는 토요일 아침까지 길게 이어졌다.

 

끝도 없이 들이켜는 술보다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친구들을 보며 채워지는 저열한 만족감이 세일을 취하게 만든다.

 

친구들과 헤어져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누이니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잠이, 꿈이 세일에게 찾아온다.

 

꿈에서 세일은 원숭이들의 법칙이 지배하는 원숭이 나라의 왕이었다.

 

‘그리고 곧 꿈꾸는 자가 꿈에서 깨어나면 원숭이들의 나라도 끝이 나겠지.’

 

머릿속을 맴도는 문구를 되뇌며 잠결에도 세일은 숙취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임지연 교수가 꿈의 내용을 들었더라면 세일과는 다른 견해를 가졌을 것이다.

 

 

“거인의 몸 위에 개미 떼들이 왕국을 세운 꿈 이야기를 해줬던가?”

“내 꿈에서는 원숭이들의 나라던데?”

“누구든 자기만의 꿈은 하나씩 가지는 법이잖아? 원숭이 나라가 마음에 들면 원숭이 나라라고 하지뭐. 아무튼 거인의 몸 위에 나라를 세운 원숭이 이야기를 해줄게. 처음에는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어. ”

“아무것도 없었다니?”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고. 문명도, 도시도, 왕국도, 종교도, 국가도.”

“나라를 세웠다며?”

“한 원숭이가 거인에게서 불을 훔쳤거든. 불이 있으면 따듯하잖아? 불의 찬탈자 주변으로 원숭이들이 모여들었어. 더 이상 어두운 밤도, 포식자들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거지.”

“비슷한 이야기 들었던 거 같아.”

“수가 많아지니 자연히 집단이 형성되고 마을이 생겨나고 곧 도시로, 왕국으로 커졌어.”

“불의 찬탈자가 왕이 되었겠네?”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