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셀키

  • 장르: 판타지, 로맨스 | 태그: #판타지 #전설
  • 평점×70 | 분량: 139매
  • 소개: 얼어붙은 바닷가의 언덕 위에 늙은 마녀가 살고 있다고 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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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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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바닷가의 언덕 위에 마녀의 집이 있다고 했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고 건장한 청년의 장딴지 두께의 얼음이 바다를 뒤덮고 있어 큰 배가 정박하지 못하는 고장. 그러나 일 년에 딱 한 달, 칼날처럼 몰아치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약해지는 시기가 있는 곳. 내륙에선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동쪽의 사람들이 여름 축제를 벌이는 동안, 빙하가 인간이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깨지고 뱃길이 열리는 곳의 언덕에 마녀가 살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마녀라고 불리는 그 늙은 노파는 바닷길이 열리는 날이면 비척거리는 몸을 이끌고 항구에 나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그녀가 오래전 고깃배를 탔다가 실종된 남편을 기다린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녀가 본토로 넘어가겠다며 상선에 몸을 실은 어린 아들을 기다린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녀가 기다리다 기다리다 미쳐버려 언덕 위에 있는 낡은 오두막에서 자신을 괴롭게 한 남자들에게 끔찍한 주술을 걸고 있다고 했다. 바닷길이 열리는 날에 그녀가 마을로 나오는 것은 그 남자들이 고통에 못 이겨 용서를 빌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마을에서 유난히 용감한 소년이 그녀를 쿡 찌르며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냐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일 년에 한 번 들어오는 배들에 정신이 팔린 마을 사람들은 늙은 마녀를 길 한가운데서 말라죽은 그루터기나 유난히 흉물스러운 동상처럼 없는 듯 피해 다닐 뿐이었으니 그녀가 마을로 나오는 진짜 이유를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마녀가 일흔 살이 되는 해, 마을에는 기이한 소문이 퍼졌다. 빙산과 빙산 사이에 로프를 묶어 물범과 바다새를 사냥하던 한 무리의 젊은 사냥꾼들의 짓이었다. 그들은 사냥에서 돌아와 빙하에 올라와 햇빛을 쬐던 물개 떼 사이에 아름다운 인간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댔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물에 잠긴 빙하처럼 아름다운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의 형체가 물개 사이에 누워 있다가, 젊은 사냥꾼들이 로프를 타고 다가가자 흰색 물개 가죽을 입고 차디찬 바다로 뛰어들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노련한 사냥꾼들은 어설픈 젊은 놈들이 눈에 반사된 햇빛에 시야가 멀어 헛것을 본 거라 무시했고, 얼음을 깨고 물질을 하는 어부들은 사냥꾼들이 평소처럼 얼토당토않은 허풍을 치고 있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마을의 늙은이들, 다른 이들이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추위와 약초 한뿌리 먹을 수 없는 병마에 싸우다 지쳐 죽어버릴 동안 억척스럽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늙은이들은 물개의 모습으로 차디찬 바다를 배회하다가 마음이 내킬 때면 물개의 가죽을 벗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정령에 대한 오래된 전설을 기억해냈다. 그들은 물개 인간을 잡아 와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겠노라 씩씩대는 젊은 사냥꾼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령을 건드리는 것은 언제나 길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들은 어쩌면 사냥꾼들이 마을에 가져올지도 모를 재액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마녀 역시 그 소문을 들었다.

마녀는 마을의 누구와도 세 마디 이상 대화하지 않았지만, 세 마디의 말이면 소문에 대해 알기 충분했다. 뱃길이 열린 날에도 작살을 들고 무리 지어 배를 타고 나가는 젊은 사냥꾼들을 마녀는 말없이 바라보다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바닷길이 열린지 나흘째, 그녀는 그날도 종일 바다를 바라보다가 해가 지기 전 말린 대구와 소금 두 되를 사 들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녀가 집에 도착하기 전 노을이 지고 달이 떠올랐다. 바닷가를 빙 돌아 언덕으로 향하는 작은 길은 오직 마녀밖에 사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좁고 외로웠다. 마녀는 대구를 옆구리에 끼고 소금을 등에 맨 채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디뎠다. 여름의 한 가운데 있음에도 눈발이 날릴 기미가 보였다. 눈보라 속에 고립됨을 죽음을 의미하기에, 마녀는 발을 빨리했다. 새하얀 눈밭과 새까만 하늘, 하늘과 눈밭을 유일하게 구분해주는 미소짓는 눈썹과 같은 초승달. 그 가운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것이 마녀의 눈에 들어온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것의 피부는 눈만큼이나 새하얬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아니었더라면 눈 속에서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녀는 그것 곁으로 다가갔다. 눈을 파내자 젊은 청년의 아름다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불거리는 머리칼은 물개의 눈동자처럼, 혹은 흑진주처럼 새카맸다. 청년의 몸에는 가스총으로 발사하는 작은 작살이 꽂혀 있었다.

마녀는 머뭇거리다가 소금 자루와 대구 묶음을 바닥에 내려놓고 청년을 등에 업었다. 하얀 피부는 빙하의 몸통처럼 가벼웠고 가는 몸뚱이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언덕길을 오르는 동안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마치 도와주려는 것처럼 등을 부드럽게 밀어댔다. 마녀는 청년을 오두막의 좁은 침대에 눕히고 작살을 뺀 다음 상처에 피를 굳히는 석회가루를 뿌렸다. 오래지 않아 피가 멎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가는 숨소리가 오두막을 가득 메울 때, 마녀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마녀는 인간이 아닌 것의 목숨을 구했고 심지어 그것을 집 안에 들여놓았다. 마녀는 숨을 몰아쉬며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그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것을 밖으로 던져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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