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화 님께서 다시 껌을 씹으십니다

  • 장르: SF | 태그: #코로나 #코로나시대의낙석동 #SF #오피스빌런 #껌좀씹던언니 #돌아온언니 #위드코로나 #회식 #악덕직장상사 #강화인간
  • 평점×15 | 분량: 71매 | 성향:
  • 소개: 연작소설 <코로나 시대의 낙석동> 11화 [박선화 님께서 다시 껌을 씹으십니다] 열화상 카메라 설치 및 A/S 기사인 박선화 씨는 요즘 들어 눈앞이 흑백의 노이즈로 뒤덮... 더보기

박선화 님께서 다시 껌을 씹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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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부장이 탕비실 앞에서 막내사원 휘아 씨에게 뭐라 뭐라 말을 거는 사이, 박선화 씨는 눈이 말썽이었다. 증상이 또 시작된 것이었다. 몇 달 전부터 돌연 시야가 텔레비전 화면노이즈처럼 흑백으로 지지직거릴 때가 있었다.
네이버 지식인에 올린 고민 글에는 망막 박리에 의한 비문증으로 추정된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하지만 단순히 눈앞에 뭐가 떠다닌다거나, 점이나 거미줄 선 같은 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흑백의 도트들 수십 만 개로 이루어진 화면노이즈였다.

수년 째 전자제품 회사의 설치 및 A/S 기사로 일하고 있는 박선화 씨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고객의 텔레비전이었다면 영상보드를 교체하고, 차량 블랙박스였다면 카메라렌즈 안의 이미지 센서를 갈아야 할 만한 노이즈였다.
“박 과장, 또 어지러워? 진짜 갱년기 증상 아니야?”

어느 틈에 이쪽으로 왔는지 장 부장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화면노이즈가 1분 넘게 잦아들지 않아서 눈을 가린 채 파티션에 이마를 대고 있었는데 장 부장이 그걸 본 모양이었다.
“여자들 여성호르몬 동나면 막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면서. 그래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건 아니야. 한 50년 여자로 살았으니 이제 듬직한 중성으로 변신해서 일하라는 하늘의 배려가 아니겠나. 그런 의미로 오늘도 열심히 달려보자고, 화이팅!”
장 부장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늘 그렇듯 박선화 씨는 무반응으로 응대했다.

살면서 깨달은 진리 중에 하나는 장 부장 놈을 치우면 윤 부장 놈이 오고, 윤 부장 놈이 떠나면 최 이사가 온다는 것이었다. 오피스 빌런들은 인류의 일정 퍼센트를 점유하고서, 자기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놈들에게 용을 쓸 필요가 없었다. 눈앞의 저놈이 최후의 악당인 것처럼 힘을 뺄 이유가 없었다.
그건 둥근 바위를 수직 절벽 위로 밀어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그게 헛짓이라는 건 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가 오래 전에 몸소 증명하지 않았던가.

박선화 씨는 파티션 벽에 걸려 있던 회색점퍼를 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은 낙석동과 현동, 마엽동 일대를 돌아야 했다. 열화상 카메라 설치가 네 건이었고 A/S가 세 건이었다. 출장지 리스트 중간에 낙석고등학교가 보이자 박선화 씨는 검지로 턱을 긁었다. 뭔가 일이 까다롭게 되었다 느낄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거긴 장 부장 못지않은 오피스 빌런이 서식하는 곳이었다.

교장 이름이 황민락이었던가.
박선화 씨가 열화상 카메라 전문회사 보크스프라임에 입사한 이래 단일 품목 납품 건 중에서 최다 A/S 요청을 해 온 사람이 황민락이었다. 사나흘 전에도 LCD 화면에 금이 갔다고 해서 갔더니 금이 아니라 녹말 같은 게 사선으로 눌어붙은 자국이었다. 학생들이 음식이 묻은 손으로 화면을 만진 모양이었다.

결국 박선화 씨의 개인 물티슈로 화면을 닦고 마른 수건으로 말끔히 물기까지 제거해 주었지만 교장은 미안해하거나 민망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거기까진 평범한 A/S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박선화 씨가 제거한 게 LCD 화면의 실금이 아니라 음식 잔여물로 추정되는 얼룩이었다는 걸 알게 된 교장이, 열화상 카메라 관리 담당 선생을 세워놓고 억지 잔소리를 퍼부을 때였다. 잘 해결된 문제를 두고 왜 저럴까 싶어서 두 사람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는데 시야가 화면노이즈로 뒤덮인 것이었다.

그대로 눈을 가리며 학교 로비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평소와 달리 2, 3분이 지나도록 증상이 잦아들지 않았다. 시야 떨림도 더 심했고 노이즈에 음향까지 더해진 상태였다.
치직치직…….
가…… 앙…… 나음…… 드안…….
정체불명의 소리가 이어지자 박선화 씨는 귀를 감싼 채 바닥에 엎드렸다. 중이에서 고막까지 불이 데는 듯한 열감이 솟구쳤던 것이다. 소음과 화면노이즈는 5분 넘게 지속되다가 학교 직원 몇이 달려오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땀범벅이 되어 겨우 몸을 일으켰을 때 박선화 씨의 귀에 가장 먼저 꽂힌 소리는 황민락 교장의 혀 차는 소리였다.
“그러게, 건장한 남자 직원을 보낼 것이지, 나이도 수월찮게 먹은 여자를…….”
그 말에 반응한 건 박선화 씨가 아니라 열화상 카메라 관리 담당이라는 젊은 선생이었다. 아프신 분한테 말이 심한 거 아니냐, 기사님의 성별과 나이를 왜 문제삼느냐 등, 자신을 위해 대신 칼을 뽑아 든 젊은 선생을 두고 박선화 씨는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나왔다.

눈알도 시큰거리고 고막에서도 불이 났다. 교장의 막말로 심적 타격을 입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박선화 씨는 거대한 바윗돌을 굳이 가파른 절벽 위로 밀어올릴 마음이 없었다. 그런 헛짓을 왜 한단 말인가. 오피스 빌런은 맞서야 할 대상이 아니라 눈감고 무뎌져야 할 상대였다. 저 혈기왕성한 교사는 황민락을 무찌르고 나면 세상에 평화가 오리라 믿겠지만 놈은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꽉 채우고도 남을 빌런 부대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날 차를 몰고 낙석고등학교를 빠져나오며 박선화 씨는 이런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딸린 식솔 없이 단출한 독신 가정에, 만년 과장이긴 하지만 고정 지출을 안정적으로 웃도는 월급에, 드라이버 하나면 웬만한 건 다 고쳐내는 기술에, 침실 한쪽 벽면을 꽉 채울 만큼 모아둔 레고 상자들까지, 서른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지키고 일궈낸 것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이게 다 황민락 같은 놈들을 덤덤하게 지나쳐 온 삶의 결과물 아니던가.

오늘의 첫 출장지는 열화상 카메라 오작동 신고가 들어온 마엽동 주민센터였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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