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할라나_신의 뜻대로

  • 장르: 추리/스릴러, 호러 | 태그: #트로피칼 #스릴러 #호러
  • 분량: 113매
  • 소개: 한국에서 도망치듯 필리핀에 정착한 민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국을 떠나온 교민들 사이에서 그럭저럭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사이로 스미듯 다가온 코피노 사내에게서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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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할라나_신의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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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할라나_ 신의 뜻대로

그는 그저 다른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밥 먹고, 잠자고, 기회가 있고 미래가 있는 곳으로.

1.

빨강, 파랑, 노랑, 보라. 찌그러진 오색 풍선처럼 봉다리들이 널브러져 있다. 뜨거운 태양이 반사된 오색 풍선 안에는 붉은 기가 도는 갈색의 맥주병에 반쯤 썩어가는 깔라만시 사이로 구더기가 오갔다. 더러는 흙으로 바랜 노란 매직 사랍과 검붉은 코피코 껍데기가 삐져나와 있다. 잘록한 콜라병 가슴팍에는 내리쬐는 태양과는 어울리지 않게 북극곰이 웃어대고 어쩌다 빨간벌이 되었는지 모를 졸리비는 박스 채 일그러져 기괴한 웃음을 지어댔다. 그마저도 어느 안락한 비닐에 들어가진 못한 오뚜기 3분 카레와 모구모구, 크노르 스프, 샛노란 레몬 쥬스 병과 덜 노란 스팸 캔 뚜껑은 찌그러진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것을 쓰레기의 멜팅팟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쓰레기마저 정체성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태풍이 지나간 자리엔 원래 제 역할이 쓰레기가 아닌 것들도 섞여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어느 집 안방에 놓였을 텔레비전, 주방에 있었을 조리 저울, 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소파의 잔해들이 쓰레기들 사이에서 같이 뒹굴었다. 그 사이사이의 여백은 슬레이트 천장과 쓰러져 덩굴이 뒤엉킨 야자수가 메꾸고 있다. 옛날 옛적, 필리핀의 어느 공주가 사랑한 남자의 머리를 심은 자리에 낫다는 코코넛은 진창에 굴러 마치 그녀가 끌어안고 울었던 그의 잘린 머리 같았다.

타끌로반. 건질 것이 있는지 살피던 사람들마저 끊긴 절망의 땅에 한 여자만이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다. 꾸역거리며 꾸물거리는 구더기를 쪼아먹는 갈매기 떼는 두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떠는 여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여자의 머리 위로 뜨거운 손이 내려앉았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하지만 빠르게 식어가는 손이었다. 여자는 흠칫 놀라 꽉 감았던 눈을 다시 더 질끈 감고 본능적으로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에 손을 가져갔다. 신음같이 중얼거렸다. 덜덜 떨리는 그녀의 소리는 크기도 속도도 일정하지 않았다.

Ama.. namin suma, sal..salangit ka, (아마.. 나민 수마, 살..살랑잇 까)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아버지,

Samanahin ang ng,, ngalan mo. (사마나힌 앙.. 응알란 모)

다.. 당신의 이름을 경배합니다.

Mapassamin ang kaharian mo. (마파싸민 앙 카하리안 모)

당신의 왕국이, 우.. 우리의 것이 되게 해주세요.

Sundin ang loob… (순딘 앙 룹..)

당신의 뜻이.. 하늘에

그녀가 점점 더 빠르게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기도문을 외자 머리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그녀의 이마를 타고 눈으로 흘러 들어갔다. 순간, 그녀는 찡그리며 눈을 떴다. 따끔한 햇살과 붉은 물줄기가 그녀의 눈을 찌르는데도 동공은 점점 커졌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도끼를 든 천 개의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