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는 것, 너에게 없는 것

  • 장르: 추리/스릴러, 일반
  • 평점×59 | 분량: 87매
  • 소개: 길리와 꾸따 부부가 운영하는 제주도의 셰어하우스에 묵게된 미래와 재이. 어쩐 일인지 남편 꾸따가 보이지 않는데… 더보기

나에게 있는 것, 너에게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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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를 빠져나와 마을버스 정류장 사잇길로 접어드니 화산석 돌담으로 양옆이 막힌 골목이 나왔다. 길을 따라 꼬불꼬불 들어가면 왼편에 보이는 새파란 철대문집.

길리가 사는 곳, 블로그에 올려진 사진 그대로였다.

쯔쯔, 어지간히 훔쳐 갈게 없나 보다. 농가 주택을 개조한 셰어하우스의 허름한 외관을 둘러보던 재이가 대문 옆 갈색 토분의 마른 흙을 손가락으로 뒤적여 열쇠를 찾아냈다.

이제 미래와 재이는 주인 없는 집의 문을 따고 들어갈 참이었다. 공항에 내려 지금 도착했어요, 하고 전화를 하니 세상에 이보다 상식적인 일도 없다는 듯 화분 속에 열쇠 있으니까 들어가서 쉬고 계세요, 라는 대답이 들려왔던 것이다. 공용 숙소의 열쇠를 화분에 묻어두는 게 참 길리답다는 생각을 하며 미래는 웃었다.

조심스레 철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널빤지를 솜씨 좋게 짜 맞춰 만든 널찍한 평상이 하나. 채반에 널린 무와 호박 쪼가리가 시월 햇살에 꼬들꼬들 말라갔고, 야트막한 돌담 아래 한 귀퉁이에는 쪽파와 루콜라가 가지런히 열을 맞추고 있었다.

방 셋에 화장실 둘. 거실에 세워 둔 파란 서핑보드가 두 개. 소파 대신 두툼한 전기장판이 깔린 인테리어가 단출했다.

집에 발을 들인 뒤로도 재이의 흠잡기는 멈추지 않았다. 겨울엔 춥겠다는 둥, 어째 이 집 물건들은 다 주워온 것 같냐는 둥, 테이블도 사과 궤짝이라는 둥 하며 테이블보까지 굳이 들춰보는 재이에게 그녀는 다 손으로 만든 거야, 이런 게 낭만이지, 하며 쏘아붙였고, 재이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궁상도 낭만이지.

한 달 전 오랜만에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나 제주에 사는 부부의 얘기를 꺼냈을 때도 그녀의 반응은 비슷했다.

결혼 별거 없다, 넌 똥 밟지 말고 그냥 혼자 살아라. 신혼의 환각에서 깨어나 보니 맞벌이는 전쟁이고, 육아는 축복이 아닌 인권유린이더라는 푸념을 끊임없이 이어가던 미래가 갑자기 태세를 전환한 건 단지 자신이 그 소위 똥 밟은 무리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재이가 그래, 힘들지, 하며 맞장구를 쳐주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것 봐라, 처음에만 좋지 결국엔 우리 엄마 아빠들처럼 사는 거다, 인제 와서 어쩌겠냐 대출 왕창 땡겨 집도 샀는데 맞벌이해서 열심히 갚아야지, 큰아들 같은 남편 잘 구슬리고 얼러서 살아보라는 따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이게 위로인가 빈정거림인가 싶은 게 슬며시 약이 올랐던 것이다.

문제는 결혼이 아니라 연애라고, 네가 못하는 걸 안 하는 걸로 착각하는 그 연애 말이야, 하고 쏘아주고 싶었다. 어쨌건 지지고 볶고 사는 네가 나보다는 백배 낫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는 커플이 진짜 있다고?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35년째 독신을 고수하고 있는 재이로서는 쉽사리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가보자고 했다. 삶이 곧 낭만인 그런 부부가 정말 있다고. 그런 부부를 내가 알고 있으니 직접 가서 두 눈으로 확인해 보자고.

가온이를 낳고 이년 만에 얻은 휴가였다. 해골바가지 같은 몰골로 친정과 회사를 오가는 딸내미가 안쓰러웠던 엄마는 그녀에게 3박 4일의 도피를 허락했다. 이틀만 쓰고 아껴둔 금쪽같은 여름 휴가를 재이와 함께하기로 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꼬챙이처럼 말랐네…현지인이라고 해도 믿겠다.

벽에 걸린 액자를 들여다보며 재이가 중얼거렸다. 비키니를 입고 이름 모를 나라의 해변에서 요가 자세를 취한 길리의 사진이었다. 꾸따는. 미래는 꾸따의 흔적을 찾아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어라, 이 사람들, 딩크족이라고 하지 않았어?”

선반 위를 살펴보던 재이가 물었다.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딩크족의 육아.’ ‘행복한 부모 되기.’

재이가 선반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하나하나 읊었다. 부부에게는 아이 계획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대학 졸업 후 해외를 떠돈 기간이 십 년, 그리고 제주에 정착해서 다시 오 년… 길리도 어느덧 마흔을 향해가는 나이였다.

미래가 길리를 처음 알게 된 건 결혼 전 친구와 발리 여행을 계획하면서였다. 여행 정보를 얻으려고 이런저런 사이트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그녀가 운영하는 블로그를 알게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훌쩍 배낭여행을 떠난 길리는 발리에서 스쿠버다이빙과 사랑에 빠져 자격증을 따고 강사로까지 일하게 됐다. 그리고 거기서 운명처럼 같은 배낭족이었던 꾸따를 만났다. 길리와 꾸따는 모두 발리의 지명이었다. 모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두 사람에겐 본명보다 길리와 꾸따라는 이름이 어울렸다. 인도…몰디브…모로코…아르메니아…나라별로 분류된 수십 개의 카테고리 어디에서나 깡마르고 새카맣게 그을린 부부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제주도에 온 뒤에도 부부의 삶에는 변함이 없는 듯했다. 블로그에 ‘제주 일기’라는 카테고리가 하나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길리와 꾸따는 오 년 전 신덕리의 허름한 농가 주택을 사들였다.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반듯하게 뻗어 나간 당근밭이 보이고, 늘어선 전깃줄 아래로 저 멀리 수평선이 가물거리는 그런 집이었다. 부부는 뚝딱뚝딱 조그만 방 두 어 개가 딸린 셰어하우스를 완성했다. 낡은 집을 세내고 고쳐 쓰며 푸껫과 페낭에서 몇 년씩 머물기도 했던 부부에게는 인테리어에 남의 손을 빌린다는 게 오히려 더 어색할 터였다. 말이 좋아 셰어하우스지 생업보다는 여행지에서 만난 지인들, 투숙객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마음대로 웃고 떠드는 게 일상이었다.

퇴근해 친정에서 아이를 받아 먹이고, 씻기고, 동화책 읽어 재우고 나면 지친 몸과 마음은 이미 반쯤 꿈속을 헤매고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도저히 잠들 수 없을 지경으로 마음이 허한 날이면 미래는 맥주 한 캔을 따 놓고 그녀의 블로그로 들어갔다. 길리와 꾸따의 달콤한 일상을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하기 위해서.

안방 입구에 드리워진 보라색 날염 천이 바람을 타고 산들거렸다. 길리와 꾸따가 사는 방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살짝 들춰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은 우리 둘뿐인데.

끼익, 하는 대문 소리에 미래는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거기 그녀가 있었다. 블로그에서만 보던 그녀가.

회색 스웨트셔츠에 헐렁한 팬츠를 입고 어깨엔 흰 타올과 가방을 둘러맨 모습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그녀가 마당을 한번 휘 둘러보더니 미래와 제이에게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깨쯤 걸쳐진 검은 생머리, 물방울이 윤기 나는 갈색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한 손으로 채집망을 들어 보였다. 안에는 커다란 뿔소라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저녁에 돌문어 파티를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재수가 없네요.

미소 짓는 그녀의 입술이 보라색이었다. 시월 제주의 바다. 물에 들어가기엔 이미 추운 계절이었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나자 길리는 방이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그제야 미래는 황급히 재이와 함께 쓰기로 한 2인실을 둘러보았다. 둘 다 가방만 휙 던져 놓고는 이리저리 집안을 탐색하는데 정신이 팔렸던 참이었다. 방안에 떠다니는 알싸한 향기가 코점막을 자극했다.

그 방, 티트리 오일 냄새가 너무 심하죠?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길리가 젖은 머리를 타올로 털며 말했다.

닦고 환기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병째로 쏟았나 봐.

길리가 미안한 듯 웃었다.

냄새 괜찮은데요?

미래가 붙임성 있게 말했다. 파스향 같긴 해도 나쁘지 않은 냄새였다. 길리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고, 미래는 순간적으로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하고 생각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길리가 둘에게 숙박 지침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서 새로 추가된 정보는 딱 세 가지였다. 현재 셰어하우스의 손님은 미래와 재이, 둘 뿐이라는 것과 뒷마당은 한창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니 들어가지 말라는 것. 그리고 이 집에 온 이상 환영파티와 송별 파티를 꼭 함께해야 한다는 것.

원래 해변에서 하는건데. 길리가 아쉬운 듯 덧붙였다.

신덕 해변에서의 파티. 블로그에서 보았던 사진들이 떠올랐다. 해 질 녘 남편 꾸따가 익숙한 솜씨로 장작불을 피우면, 길리는 야외용 그릴 위에 삼겹살과 주먹만 한 왕 소라를 척척 올려 구웠다. 낮에 부부가 물에 들어가 잡아 온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꾸따, 꾸따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어디 갔을까.

라면 같은 건 아무 때나 끓여 먹어도 되죠? 재이가 묻자 그녀의 눈동자에 갑자기 윤기가 돌았다. 뒷마당에 붙은 낡은 창고를 개조해 내년부터 국수 가게를 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바닥 미장은 모두 끝났고, 이제 타일 작업에 들어갈 거라고.

오늘은 무얼 할 건지 그녀가 물었다. 벌써 한 시 반이 넘은 시각이었다. 슬렁슬렁 다랑쉬오름에나 다녀오겠다고 하니 그녀가 수긍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이도, 그녀도 이번 여행에서 관광에 딱히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건 아니었다. 미션을 수행하듯 목적지를 하나하나 목록상에서 지워나가는 게 지금까지의 제주 여행이었다면, 이번엔 느긋하게 자연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는 데 둘은 합의를 보았다. 내일과 모레는 둘레길을 걷고, 마지막 날엔 해변에서 스쿠버다이빙 체험도 해 볼 요량이었다.

스쿠버다이빙 좋죠, 요즘 하기 딱 좋아요. 나중에 두 분이 서로 버디 해주면 되겠네요. 은근히 바닷속이 위험해서 꼭 짝이랑 같이 다녀야 하거든요.

길리의 응원에 미래는 마치 과분한 칭찬을 받은 아이처럼 기분이 얼떨떨했다.

남편은 저녁에나 보려나. 재이가 차의 시동을 걸면서 중얼거렸다. 미래에게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탓인지 그녀 역시 부부와의 만남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단 뭐 좀 먹자, 근처에서 맛집 좀 찾아봐.

허기를 느꼈는지 재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근처라고 하니 퍼뜩 얼마 전 길리가 블로그에 올린 식당이 떠올랐다. 그녀가 투숙객들과 다 같이 몰려가 막걸리 파티를 했던 곳이었다. 잠깐만, 하고 미래는 휴대폰을 꺼냈다.

블로그는 텅 비어 있었다.

여행 카테고리는 모두 사라지고, ‘길리와 꾸따의 세계살이’라는 블로그 명은 ‘길리의 제주살이’로 바뀐 뒤였다.

말도 안 돼. 손가락이 자꾸만 화면을 긁어내렸다.

왜, 뭔데. 재이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엊그제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블로그였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헤어졌네.

설마.

헤어진 거야.

그게 말이 돼? 갑자기?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재이의 말투에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남편은 떠나고, 혼자 국수 가게 하겠다고 공사를 하고 그 여자도 참…그런데 왜 헤어졌을까. 뭐 짚이는 거 없어?

짚이는 게 있으면 이리 당황스럽지도 않을 터였다. 가장 최근에 본 내용을 떠올리려 애썼다. 길리는 창고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사 모으고 있었고, 꾸따는 시내 목공소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그리고…꾸따가 일을 나가는 문제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얼마간 냉전이 있었던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몇 달 전부터 글을 올리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건 사실이었다.

그냥 좀 싸웠을 수도 있지. 미래가 중얼거렸다. 자신이 듣기에도 궁색한 항변이었다. 아니면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지도 몰랐다. 세상 모든 부부가 매일같이 싸워도 왜 그들만은 다투지도, 헤어지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을까.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창밖의 풍경이 흐렸다. 잿빛 안개에 숨은 다랑쉬 오름 정상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했다.

하늘이 먹색으로 어두워질 무렵 미래와 재이는 신덕리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둘은 모종의 합의를 끝냈다. 길리가 싫어할 수 있으니 꾸따라는 이름은 입에 올리지 말자고. 갑자기 홀로된 그녀가 안쓰러웠다. 재이 역시 공연히 집주인의 불편한 속내를 후벼 파서 좋을 게 없다는 미래의 말에 수긍했다.

길 건너편 공터에 차를 세웠다. 타박타박 발소리뿐, 골목길은 불빛 하나 없이 적막했다. 암막처럼 드리운 밤하늘에 뻥 뚫린 보름달이 을씨년스러웠다. 무서워. 여긴 어두워지면 산책도 못 하겠다. 재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