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Ep. 7 인체의 신비

  • 장르: 호러
  • 분량: 88매
  • 소개: 옴니버스 고속도로. 1. 고속버스 2. 투명한 고름병 3. 구멍 4. 아파트 5. 불행을 부르는 광대 6. 죽음에 대하여 7. 인체의 신비 8. 사팔뜨기 택시기사 9. 인체모형 더보기

고속도로 Ep. 7 인체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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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는 생리학 교실이 있는, 종합병원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커다란 건물, 일 층 로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선 핀 마이크가 올려진 자료집을 두 손으로 잡은 채, 히포크라테스와 나이팅게일 흉상이 서 있는 벽 뒤로, 선명하게 그려진 의사 로고를 보는 중이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눈에 들어온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의대생조차 무심코 지나칠 문양이었다. 지팡이, 두 마리 뱀. 시간은 충분했으나, 그는 대강당이 있는 건물로 건너가 본과 삼학년생을 위한 특별 강의를 준비해야 했다. 프로젝터가 잘 돌아가는지, 준비물에 빠진 것은 없는지, 음향 시스템은 잘 돌아가는 지, 학생들은 빠짐없이 자리 했는지 점검하는 게, 오늘 그의 일이었다. 총장이 특별히 생리학 교수에게 부탁했고, 생리학 교수는 조교인 그에게 이광훈 교수의 보좌를 맡게 했다. 그날은 사직 의사를 내비치려 했던 날이었다. 골방에 뒹굴며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는데, 더 이상은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세상은, 지옥에 익숙해지면 더욱 큰 지옥을 선사했다. 그동안 충분히 노력했다는 생각이었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생명을 유지하려 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가리고 다니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지방에 있는 의과대학에 취직한 것도, 공기가 좋은 곳에 머물면 조금의 호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낙관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첫 직장으로 사 년째, 이 곳도 해답은 아닌 듯했다.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며,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즈음의 모습과 비슷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실패했지만, 창호는 신앙에서 치료법을 찾아보려 했다. 신학대학에 원서를 넣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다 문득, 기도만 하다, 원망만 하다 생을 마감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아버지의 작은 교회 사람들이 휴거를 외치며 독극물을 삼키던 날, 놀이터 미끄럼틀에 떨어져 힘차게 울던 동생이 떠올랐다. 돌봐야 하는 가족이 있다는 건, 감상적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은 질환에 대한 공부였다. 충고해주는 이가 없었기에, 그는 의과대학, 아니면 비슷한 과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생물학과였다. 막연한 선택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택은 자신에게 내려온 빌어먹을 질환에 대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패였다. 그 전의 인생처럼 앞으로의 인생도 실패일 거라고, 술에 취해 대학가 골목에 쓰러져 울었다. 일탈은 그 뿐이었다. 일하지 않으면 동생과 머물 곳을 마련하지 못한다. 등록금도 마련하지 못한다. 몸이 가려워 죽을 것 같아도, 부서져라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졸업반일 때부터 직장을 찾아 다녀야 했고, 친구들은 왜 군대가 면제됐는지 알지 못했다. 모든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아는 사람이 없는 먼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직장을 다니고 싶었다. 그 즈음 증상이 악화되었기에, 뭐든 시도 해야겠단 생각도 있었다. 아버지의 업보로 세상의 모든 것으로 부터 쫓기듯, 숨어 살았기 때문에 아는 지역도 별로 없었다. 결국 그가 닿은 곳은, 아버지의 교회가 있던 도시, 그 구석에 붙은 의과대학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종합병원과 붙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생리학 조교를 몇 년째 구하는 곳이었으므로, 준수한 외모와 매너를 지닌 창호는 무난히 취직할 수 있었다. 병원 옆, 반 지하 원룸은 어둡고 습했지만, 그에겐 사치로 느껴질 정도였다. 동생과 함께 머물 요량으로 구한 곳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배달 일을 시작하더니 스스로 길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동생은 유전된 질환이 없었기에 잘만 하면 보통사람처럼 살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이 오히려 짐이 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내려오란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게 되었다. 직장도 생겼고, 동생도 제 자리를 찾아가고. 이제는 질환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치료만 하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게 만만치 않았다. 목에 밧줄을 감고 사는 느낌이었다. 절대로 풀 수 없고, 하루에 몇 미리씩 조여지는 잔인한 밧줄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증상이 자신의 몸에 나타나면서 밧줄이 현실화됨을 느꼈다. 비극으로 가득한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 아버지의 원죄를 씻는 것, 동생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 좋은 밧줄 하나만 잘 걸면 해결되잖아, 그는 오랜만에 몸 속 가득, 소주를 들이 부으며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결심과 두려움은 별개였다. 삼십 미터 높이의 다이빙 대 위에 올라서면 이런 느낌일까. 식도로 시작해서, 위장과 소장, 대장까지 두려움에 쪼그라들었다. 죽는다는 게 이토록 무서운 거구나. 반지하의 어둠 속에, 목을 매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왜 지금껏 힘들게 달려왔는지 자문했다. 죽음은 쓸데없는 희망을 쫓은 것에 대한 대가인가? 신은 왜 나 같은 존재를 만들었을까? 중얼거리며 철물점에서 하얀 밧줄을 구입해 주머니 속에 넣고 손가락으로 꽉 잡았다. 마지막을 함께 해줄 유일한 놈이었다.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하는 그 외의 모든 것은 정리해야 했다. 며칠 동안 바닥에 각질을 쏟아내며 유서를 작성 중이었고, 나름 정든 직장에 사직서를 내는 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신이시여, 곧 당신을 만나러갑니다. 지옥으로 던져도 좋습니다. 하지만 알고 싶습니다. 왜 숨 쉬는 동안, 지옥을 경험하게 만드셨습니까? 외워버린 유서의 한 구절을 되뇌며, 생리학 교수에게 다른 일을 찾는다는 핑게로 조교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러 가는 길이었다. 교수실에는, 생리학 교수와 학교 총장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며 학교의 운이 걸린 사안이라며 창호를 총장 곁에 앉혔다. 사직 얘기를 꺼낼 분위긴 아니었다. 영국에서 잠시 귀국하는, 이광훈 교수를 보좌하는 것이 임무였다. 배경 설명을 들었음에도 창호는 생리학 교수나 총장처럼 들뜨지 않았다. 그저 죽는 날이 하루 이틀 정도 미뤄지는 건가 생각했을 뿐이었다. 병원 여기 저기 연락을 하고 욕을 먹어가면서, 본과 삼학년 수업 시간을 조정했고, 장비를 점검하고 메일로 받은 자료를 정리하며 며칠을 소비했다. 이광훈 교수와 처음 대면한 곳은 병원과 거리가 좀 있는, 새로 형성된 유흥지구의 고급 스시 집이었다. 총장과 생리학 교수는, 이미 술이 많이 돌아 취한 상황이었다. 그 앞에 낯선 인물이 앉아 있었다. 이 친구가, 교수님 머무는 동안 안 불편하게, 잘 보좌해 드릴 겁니다. 이광훈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얀 피부에 주름은 하나도 없고, 눈동자는 투명했다. 턱 선은 베일 듯 선명했고 방석을 깔고 앉은 몸은 노인답지 않게 꼿꼿했다. 생리학 조교로 일하고 있다고 소개를 했는데, 이광훈 교수의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떠올랐다. 옆에 놓았던 지팡이를 들더니, 지팡이 끝으로 창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모두 눈이 휘둥그레 졌다. 교수는 지팡이를 치우고 잔을 비웠다. 모든 눈동자가 그의 입술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창호라 했나? 자네는 자신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기는 하나? 대대로 판박이 같은 병을 물려받았는데도 언제나 헛다리만 짚고 사는 거지. 왜 형제자매 중에 자신만 그런 지도 모를테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삶을 살다가 병으로 죽던지, 자살을 하던지 두 개 중 하나겠군. 얼굴을 보아하니, 끝이 얼마 남지 않았네. 사지가 뒤틀리다 쇼크로 죽는 게 마지막이겠지. 어차피 사회라는 것이 송장 치우는 것에 익숙해져 걱정할 건 없어. 내 임시 보조라니, 병명은 알려줘야지. 가족성 치명적 건선 증후군. 들어본 적도 없을 거야. 이름이야 붙이기 나름이고. 우리 쪽 의학으론 그게 한계니까. 부모 중에 한 명, 몸 뒤틀리는 꼴을 본적이 있겠군. 아주 볼만하지. 이 질환은 저주야. 죄와 함께 이어지는. 죽은 부모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겠지. 그 정도는 되어야 낯이 서지. 각질화를 촉진시키는 염증 세포가 신경을 파고 들기 시작하면 그 죗값을 감당해야 하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비슷한 질환들 꽤 많아. 현대 의학이라는 색안경을 끼는 순간 많은 것을 놓쳐버리거든. 뭐라고? 치료 방법이 있냐고? 자네가 뭐라고 내가 그걸 알려주겠나? 민초들이야 아무것도 모른 채 고통 받고 죽는 게 일상이고 일상이어야 해. 자연의 빌어먹을 법칙이지. 그냥 조용히 죽어. 죄 짓기 전에 사라지는 게 나아. 이 시커먼 도시에서 괴물이 탄생하는 것을 누가 반기겠나. 제발 알려달라고? 어떤 대가라도 치루고? 교수는 수첩 하나를 소매에서 꺼내들었다. 여기에 비밀의 열쇄가 들어 있다면 믿겠나? 이걸 읽어본다 해도 그 위대함을 손톱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겠냐고. 이름이 뭐라고 했지? 창호? 죽고 난 후, 몸은 묻지 말고 화장해서 아무데나 뿌리라 그래. 죽은 사람이 산 사람 땅을 뺏어야 되겠나. 뭐, 이 지역은 좀 다르긴 하지. 고속도로의 거대한 기둥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뭉게버린 곳이니까. 나는 선조가 남겨놓은 양계장 땅도 내다 버리고 싶을 지경이야. 이곳엔 발도 닿기 싫었는데 동생들과의 인연에 붙잡혀 버린 거지. 이봐 총장, 이번에 정리되는 땅은 학교에 기증할 거라고 얘기 했었지?

그들의 주제는 이창훈 교수의 업적과 그로 인해 파생된 방대한 사업에 대한 부분으로 이어졌다. 창호는 자신의 질환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들이 주는 술을 받아가며 기회를 기다렸다. 총장과 생리학 교수는 연신 감탄하며,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지식의 세계를 헤엄치는 중이었다. 치료법을 알고 싶단 말로 끼어들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었다. 실수 한번에 지팡이가 방망이가 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창호는 끊임없이 기다렸다. 대리 기사가 도착하고, 검은 차의 문이 닫힐 때까지 기회는 오지 않았다. 출발 전, 승용차의 뒷창문이 내려왔다. 교수는 창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조아리며 다가간 그에게 교수는 잔인한 말을 던졌다. 보아하니 새벽 정도에 발작이 올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건선 증후군 환자 중에 두어번 발작을 경험하고 일년을 넘긴 사람은 없어. 유서는 미리미리 써놓는 게 좋을거야. 내일, 강연 준비 잘하고. 잘 가게. 교수의 마지막 말은, 집으로 걸어오는 긴 시간 동안 창호의 머릿속을 어지렵혔다. 잘 가라는 말이, 저승을 뜻하는 것 같았다. 편의점에 들려 혹시 몰라 진통제를 구입했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깨물 수 있는 수건을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교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새벽 닭이 울었고 눈을 떴을 땐 전조증상이 진행된 상태였다. 팔 다리, 배꼽까지 저려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건선으로 인한 반점들은 데인 듯 뜨거워졌고, 곧 몸 전체,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뒤틀리기 시작했다.

창호는 새벽의 고통이 떠올라 몸을 바르르 떨고, 다시 의사 로고에 시선을 두었다. 로고에 그려진 지팡이가 창호의 시선을 잡았고, 교수의 것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떤 병도 치료할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면 얼마나 좋을까. 새벽을 들쑤시던 엄청난 고통을, 교수의 지팡이로 해결할 수만 있다면. 멍청하고 허무한 생각이었다. 다음 발작이 오기 전에 목이 매다는 게 현명할 터였다. 다량의 진통제를 삼켰음에도 고통의 양은 줄지 않았다. 목이 비틀려 비명도 뱉지 못했다. 침대 위에서 시작해 바닥으로 떨어졌고, 충전선은 발목에 감겨 떨어져 나왔다. 핸드폰은 어디론가 날아가 뒹굴었다. 몸부림치던 창호는 현관까지 굴러가 신발을 씹었다. 치아 하나가 빠지고 안면이 피범벅이 된 후에야 발작은 멈췄다. 그런 후 한동안 호흡을 진정시키며 현관에 누워있었다. 아버지가 이마로 벽을 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까지 했는지 이해가 갔다. 초등학생이었던 창호와 동생은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악몽 같은 장면들은 뇌수에 녹아들었고, 순간순간 의식으로 떠올라 그들의 목을 졸랐다. 창호는 아버지처럼 죽기 싫었다. 병은 유전됐으나, 요란한 발작의 과정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비참하지만, 나름 품위있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죽고 싶었다. 방을 깨끗히 정리해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유서를 발 앞에 가지런히 놓은 채, 의자에 오를 생각이었다. 오전, 교수의 강연이 끝나면 곧바로 사표를 내고 인수인계 작업을 한다. 퇴근 후 청소를 시작하여 그 어느 때보다 깨긋한 방을 만들고, 창문을 열어놓은 채, 새벽의 한기를 느끼며 삶을 마무리 한다. 나름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한참 불길하게 퍼붇던 비도 멈춘 상태였다. 로비를 나와 강의실이 있는 종합관으로 이동하며 풀냄새 짙은 공기를 마셨다. 마지막으로 보는 아침은 아쉽게도 파란 하늘을 보여주지 않았다. 땅으로 쏟아질 듯한 거무튀튀한 구름을 피해 창호는 종합관의 입구를 지났다. 시원하게 뚫린 로비에는 흰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커피를 들고 있었다. 몇몇이 창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생리학 수업 때, 교류가 있던 학생들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조교님. 그런데 오늘 무슨 강연이에요? 대단한 분이 왔다던데? 그들 중 한명이 질문을 했다. 병원 실습하는 학년, 전원 참여하라고 총장님이 지시했다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름은 잊었지만 얼굴은 익숙한 여학생이었다. 들어보면 알겠지, 나도 잘 몰라, 대답하는데 자료집 위에 놓았던 핀마이크의 송신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학생은 마이크 줄을 잽싸게 잡아 참사를 막았다. 고마워, 고장날 뻔했네. 그리고 늦지 않게 들어와. 출석 부를 거야. 학생들을 뒤로 한 채 로비 끝, 복도로 향했다. 양쪽에 캐비넷이 벽처럼 가로막은 사이를 지나, 101팻말이 붙은 커다란 철문을 열었다. 부채꼴로 펼쳐진 좌석 사이 계단을 밟고 내려와, 강단 옆 벽에 달린 스위치를 눌렀다. 강의실만큼이나 커다란 스크린이 내려오는 사이 창호는 프로젝터 리모컨을 찾아 들었다. 듬성듬성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은 학생 중 반은, 의자 깊숙히 몸을 묻은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수다를 떨던 한 무리에서, 한 학생이 조교를 알아보고 강단까지 따라와 인사를 했다. 앞줄, 강단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자료를 놓고, 마이크 본체를 정리하는 창호에게 역시 비슷한 질문을 했다. 오늘 누가 오시는 건가요? 이창훈 교수의 강연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고 들었다. 교수가 선조의 땅을 정리하기 위해, 이곳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생리학 교수가 영국에 있는 지인으로 부터 듣게 되었고, 그 사실을 총장에게 전했다. 이창훈 교수의 직속 후배였던 총장이, 무리해서 만남을 만들고 강연을 부탁했다는 얘기를, 스시집에서 들을 수 있었다. 곧 오시니까 직접 보면 되지. 앉아 있어봐. 출석 부를거야. 그 사이 강의실에는 꽤 많은 학생들이 들어와 있었다. 강연이 끝나면, 조별로 병원 실습을 가야 했기에 다들 양복 위에 흰 가운을 걸쳤다. 다들 찌들은 얼굴이었다. 특별 강연은 잠시 눈 붙일 수 있는 시간일 뿐, 그 이상은 아닐 터였다. 그들의 수면을 막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출석은 불러야 했다. 다 들어왔나요? 복도에 있는 학생 들도 이제 들어오세요. 출석 부릅니다. 마이크 송신기를 한손으로 잡은 채 핀마이크를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창호의 목소리가 강당 뒤에 매달린 커다란 스피커에서 튀어 나왔다. 백명이 넘는 학생들이 자신의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여러분. 그는 출석 부르기에 앞서 학생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했다. 출석 부르고 나가지 마세요. 이번 강연은 다음 달에도 예정되어 있고, 총 일 학점이 배정되었어요. 과목은 통합 의학이에요. 한 학점이라도 에프 뜨면 유급 당하는 거 알죠? 출석에 주의하고 수업도 신경써서 들어요.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자, 출석부를게요. 백 십명, 출석을 다 부르는 데 오 분 정도 걸렸다. 학생들은 아직 강의실에 없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출석 부르는 사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학생들이 있었다. 구십 몇 번째 출석을 부르며 로비에서 본 여학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정유진. 세번째 줄, 가쪽에 앉아 있던 유진이 손을 들었다. 과거 수업을 받을 당시, 생리학 교실에 자주 찾아와 질문을 던지던 학생이었다. 그때보다 거칠고 말라보이는 인상은, 형광등 밑에서 젊음을 보낸 결과물일 터였다. 뒤늦게 들어온 학생들까지, 이름을 다시 불러 체크했다. 백 십명, 전원 출석이었다. 어디 나가지 말고, 대기해주세요. 말하는데 스피커 소리에 잡음이 묻어 목소리가 끊겼다. 아, 아. 다시 확인했을 땐 잡음이 사라졌다. 마이크와 송신기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 생리학 교실에 전화를 하려는데 화면이 뜨지 않았다. 새벽의 소동이 결국, 핸드폰을 사망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로비를 나올 때만 해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좌석을 바라보다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창호는 유진에게 다가갔다. 미안한데, 전화기 좀 빌릴 수 있을까? 생리학 교실에 연락해야 하는데 전화기가 죽었어. 유진은 생글 웃으며 가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조교님, 치아는 왜 그러세요? 아, 이거? 한 손으로 핸드폰을 건네받고 다른 손으론 입을 가렸다. 치과 치료 중이거든, 대충 둘러대고 강단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입을 가린 채, 수첩에서 번호를 찾아 눌렀다. 네, 교수님. 수업 준비 됐습니다. 비 내린다고요? 네, 제 자리에 장우산 있을 거예요. 전화 도중에 구두 속, 발가락의 저림이 신경 쓰였다. 익숙하지 않은 신발을 신은 탓이겠지. 하지만 전화를 끊은 후에도 저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하진 않았지만 섬뜩한 뭔가가 있었다. 설마 도화선에 불이 붙은 건 아니겠지. 셔츠가 등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앞좌석에 앉은 채 신발을 벗고 기다렸다. 전조 증상이 아니기를 빌어야 했다. 등 뒤에 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인생의 마지막 날이, 수치와 부끄러움, 고통으로 기록되지 않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신발을 벗고 있자 저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전원을 끊은 듯 사라졌고, 창호는 신발을 신고 일어섰다. 생리학 교수와 악수를 한 후, 입구를 지나 강단으로 내려오는 이창훈 교수를 보았다. 어제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몸과 하나가 된 듯 한 양복을 입고, 광이 나는 지팡이를 든 교수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피부조차 강의실 안의 누구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