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랑 – (상)

  • 장르: 호러, 판타지 | 태그: #섬 #신랑 #각시 #용왕
  • 분량: 77매 | 성향:
  • 소개: 진홍은 이 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진홍이 원하는 단 한 가지였다. 더보기

내 신랑 –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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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들이닥쳤다. 서쪽 숲에서부터 기다랗게 이어진 발자국이 물결에 지워졌다. 그 끝에 진홍이 서 있었다. 하얗게 인 물거품이 미투리를 적셨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해풍에 맞서다시피 한 채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이 굳은 다짐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진홍이 입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잔뜩 긴장한 어깨에서 서서히 기운이 빠졌다. 저물녘의 볕이 비쳐 붉은 기운을 띤 눈동자에는 슬픔과 분노, 갈망이 어려 있었다. 파도가 쓸려 나갔다.

 

진홍은 이 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진홍이 원하는 단 한 가지였다.

 

진홍은 섬 생활이 끔찍했다. 매일 보는 동무들은 지긋지긋했고 갯냄새는 역겨웠다. 마당마다 줄줄이 매달아놓은 생선들은 진절머리 났다. 하얗게 반짝이는 소금밭은 비위에 거슬렸다. 비좁은 땅에 어떻게든 발붙인 채로 대대손손 새끼를 낳고 뒤엉켜 사는 어른들이 짐승 같았다.

 

이 섬에서 삶은 대체로 무사태평했다. 어획량은 풍부했고, 돌림병은 잇닿지 못했으며, 매해 여름의 끝에 다다라 기세를 높이며 다가들던 태풍은 섬 가까이에 이를라 치면 겁에 질리기라도 한 것처럼 슬그머니 행로를 바꾸었다.

 

섬은 풍해를 입지 않았고 부락민들은 사시사철 배를 곯지 않았다. 보릿고개조차 남의 일이었다. 봄은 쑥과 도다리의 철이었으니까.

 

이 모두가 섬을 다스리는 용왕님의 자비 덕분이었다.

 

용왕님이라니! 하, 그 빌어먹을 것한테. 욕지기가 치민 진홍이 탁 침을 뱉었다.

 

진홍은 바닷바람이 침음하지 않는 잠을 바랐다. 소금기에 절어 뻣뻣해진 저고리의 동정일랑 진즉에 뜯어내버리고 싶었다. 취객이 늘어놓는 하염없는 술주정 같은 파도 소리가 징그러웠다. 끈을 두르고 잔돌을 얹어 납작하게 누른 지붕들이 미련하게 느껴졌다.

 

진홍은 안개 낀 아침을 맞고 싶지 않았다. 일찍이 주름이 지고 살결이 거칠어지는 여자들처럼 늙고 싶지 않았다. 한밤중 숲 저편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에 더는 겁먹고 싶지 않았다.

 

남쪽 끝 포구와 이 섬을 오가는 유일한 뱃사공인 백은 진홍에게 이렇게 귀띔했다.

 

“뭍에서는 못 구하는 게 없거든. 각시들은 얼마나 편하고 단란하게 살고 있는지. 이것 봐, 예쁘지 않아? 네게 주려고 챙겨온 물건이야.”

 

그 밤, 진홍은 간만에 섬에 들른 백과 함께 해송 숲을 거닐었다. 진홍은 백이 건네준 노리개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었다. 국화매듭의 그 노리개에는 비취옥이 달려 있었다. 그렇다고 은근슬쩍 제 어깨를 주무르려는 손길까지 용납한 건 아니었다.

 

진홍은 자신만만했다. 어차피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 섬에는 진홍 또래의 아이들이 드물었고 개중에는 이미 출산 경험이 있는 소녀들도 더러 있었다. 달이, 그 계집애만 처리할 수 있다면. 그러나 진홍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섬에서는 의식이 치러졌다. 언제부터 전해 내려왔는지 모를 전통이었다. 이 섬을 지키는 용왕님은 매해 봄 화관을 쓰고 활옷을 차려입은 채로 부락민들의 축복 속에서 혼례를 올리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인간 각시가 섬의 역할을 맡아 그의 뜻을 받들어 선택한 인간 신랑과 더불어 혼인식을 치렀다. 그들 새각시 새신랑은 이튿날 동이 트기 전 돛단배를 타고 뭍으로 건너갔다.

 

이 봄, 달이는 진홍만큼 간절하게 용왕님의 점지를 받아 이 섬을 떠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해풍에 실려 숲 저편에서 전해지는 비명을 감지한 진홍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필시 바람의 수작질이라고 흘려 넘겼을 그 소리는 진홍에게는 분명한 고통의 신음처럼 여겨졌다.

 

진홍이 손을 말아 쥔 채로 빙글 뒤돌아섰다. 돌연한 그 몸놀림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의 등 뒤에서 까치발을 하고 다가오던 소년이 제풀에 놀라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산이 더러워진 손바닥을 털며 울상을 지었다.

 

“어떻게 눈치챈 거야?”

 

“그야, 네놈한테서 아주 고약한 냄새가 풍기니까.”

 

진홍이 산을 버려두고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 같이 가.”

 

산이 헐레벌떡 진홍을 뒤쫓았다. 진홍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오히려 걸음을 빨리했다.

 

산은 이 섬에 사는 소년들 가운데서도 유독 키가 작고 왜소했다. 움푹 팬 뺨에는 마른버짐이 펴 있었고 입술에 혈색이라곤 없었다. 산은 연약했다. 무해한 동시에 무용했다. 그것이 진홍을 비롯해 또래 아이들이 드물게 온순하고 보드라운 성정의 이 소년을 깔보며 못 살게 구는 이유일지 몰랐다.

 

해송 숲 인근에 다다라 진홍을 따르던 발소리가 느려졌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챈 진홍이 발걸음을 늦추었다. 산이 옷깃을 움켜쥔 채로 쌕쌕거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병색이 완연한 낯이 구겨져 있었다.

 

“자, 잠깐만 좀, 기, 기다려줘.”

 

산은 기침병을 앓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나무꼬챙이를 휘두르며 산길을 오르거나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뜀박질하기는커녕, 무리를 따라 몰려다니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진홍이 주춤거렸다. 과호흡 때문인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산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그 즉시 산이 발딱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진홍의 이목을 끈 것이 기뻐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설마, 내가 진짜로 아프다고 생각했어?”

 

“이 자식이!”

 

진홍이 다가와 산의 가슴팍을 밀쳤다.

 

“일부러 그랬다는 거야? 이래서 내가 널 싫어하는 거라고.”

 

산은 대거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힘없이 모래밭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안해, 미안, 진홍아.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진홍은 그를 무시하고 앞만 보고 나아갔다. 후다닥 몸을 일으킨 산이 진홍과 함께 걸으며 여러 번 거듭 간청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싫어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라. 진홍아, 응?”

 

진홍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돌무더기 사이를 지났다. 양지 바른 들에서 소녀들이 나물을 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앉은걸음을 하느라 치마폭들이 동그랗게 부풀어 있었다. 소쿠리를 웬만큼 채웠는지, 나이가 많은 몇몇은 돌담 옆에 모여 게으름을 피우며 놀고 있었다.

 

진홍이 미투리에 묻은 흙을 털었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소리를 낮춘 대화 몇 마디가 오갔다. 뒤이은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진홍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각시의 넋이 혼자 바다를 떠돌고 있는 거래. 깊은 밤, 신랑아, 내 신랑아, 슬픔에 못 이겨 부르짖고 있는 거래.”

 

진홍이 땅이 무너져라 한숨을 쉬더니 부러 과장된 말투로 외쳤다.

 

“누가 그런 헛소문을 지어내는 거래, 대체.”

 

소녀들이 놀란 토끼 눈을 한 채로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진홍이 입매를 쌜그러뜨리며 적대적으로 물었다.

 

“너희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믿는 거니?”

 

“누가 믿는대? 그냥 그런 얘기가 있다는 거지.”

 

되받아친 달이가 느긋하게 일어나 섰다. 눈가에 잡힌 주름마저 세필로 삐친 획의 일부처럼 보이는 소녀였다. 그렇다고 새순마냥 사분사분했느냐고 하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이 섬에서는 어떤 아이도 그렇게 길러지지 않았다.

 

두 소녀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진홍이 달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뇌까렸다.

 

“하긴,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겠지.”

 

그 즉시 달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달려들었다. 이는 어쩌면 긴 시간 그의 심중에서 무르익은 항변일지 몰랐다.

 

“내게서 뭘 빼앗아가든 상관없어! 대신 무율은 건드리지 마. 너는 걜 좋아하지도 않잖아. 무율이 섬에 남게 내버려두라고, 제발.”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는 마당에 이런 얘기하기에는 좀 이르지 않나.”

 

진홍이 만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침착함을 잃은 달이가 어금니를 맞물리며 눈을 이글거렸다. 그때 비소로 일그러진 입을 열어 또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던 진홍이 보이지 않는 손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홱 머리를 젖혔다.

 

괴수의 포효가 꼬리가 긴 연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바람과 마주 선 진홍이 그 소리가 시작된 곳을 향해 시선을 더듬었다.

 

“소름 끼치지 않니? 저건 대관절 어떤 짐승이 우는 소리인지. 봄이라서 발정이라도 난 걸까.”

 

콧등에 주근깨가 박힌 소녀가 바로 옆 동무에게 속살거렸다. 진홍이 코웃음 쳤다. 이 작은 섬에 우리가 모르는 짐승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비웃기도 잠시, 느닷없는 피로감에 사로잡힌 진홍이 이 이상의 말다툼은 사양하겠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돌아섰다. 산이 은근슬쩍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진홍이 냅다 신경질을 부렸다.

 

“멍청아, 그만 좀 따라오라고!”

 

소녀들이 당황해하는 산을 곁눈질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달이가 허리에 손을 얹고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개흙이 튄 치마를 끌고 진홍은 벌써부터 당산나무 옆을 지나고 있었다.

 

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일말의 원망이나 동요도 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진홍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일 년 전 그날, 먼동이 터 동녘 가장자리가 불그스름하던 하늘에서 난데없이 바람비가 퍼부었다. 그 탓에 성급하게 핀 꽃 몇 송이가 우수수 떨어진 것을 아침잠이 없는 노인들은 알아보았으리라. 하지만 비는 금세 걷히고 아침녘에는 날씨가 개어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진홍으로서는 절대 잊지 못할 날이었다. 동무들이 잔칫상에 달라붙어 아귀다툼을 벌이는 동안, 진홍은 마당 한가운데서 구경꾼들과 어깨싸움을 하며 필사적으로 발돋움했다.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대끼는 사이, 눈을 내리깐 연화의 얼굴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거듭했다.

 

매해 봄의 가취는 풍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의례였다. 이 섬에 처음 발을 내린 이래로 부락민들은 한 해도 식을 거른 적이 없다고 했다. 다음 봄이 올 때까지 풍요와 번영이 지속되길 빌며 용왕님이 간택한 각시와 신랑을 내세워 그들의 결합을 축복했다.

 

한편, 이는 섬사람들 모두가 고대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날 하루만큼은 아이들은 어떤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매질을 당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흥청망청 취했고 가축들은 매일의 노역에서 해방돼 실컷 여물을 먹었다.

 

연화는 지난해 용왕님의 점지를 받아 신부로 추대받았다.

 

연화는 진홍의 이종사촌 언니였다. 남자 형제밖에 없는 진홍에게 하나뿐인 자매나 다름없었다. 세 살 터울이 나는 연화는 자기도 아이인 주제에 진홍이 엄마를 찾으며 울먹일 때마다 세상살이에 도통한 늙은 아낙처럼 그를 안고 토닥여주었다.

 

진홍이 아는 한, 연화는 이 섬은 물론이고 세상천지에서 최고로 고운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미(美)라는 것이 단순한 눈의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할지언정, 진홍은 아름다움이란 종종 미물마저 감동시킨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다. 연화가 호미질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 풀잎들이 그 소리에 맞춰 앞뒤로 기분 좋게 살랑거린다는 것을. 바짓단을 걷고 갯벌을 거닐 때 바닷물이 그의 발을 적시지 못하고 수줍게 물러난다는 것도.

 

의식은 끝났고 부른 배 역시 꺼진 지 오래이건만, 진홍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아무리 뒤척여 봐도 머릿속에 켜진 불은 사윌 기미가 없었다. 동생들은 무슨 꿈을 꾸는지 이불을 걷어차 배를 드러낸 채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엿보아서는 안 되는 밤이었다. 문풍지에 난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마저 모른 척해야 하는 밤. 모두가 증인이자 또한 범인이며 방관자인 밤. 두 귀로 틀림없이 들었으되 못 들은 시늉을 해야 하는 밤. 두려운 동시에 기꺼운 밤.

 

섬이 인간 신랑과 꽃잠을 자는 밤.

 

평소 어머니가 주무시는 문가 자리는 비어 있었다. 보윤은 지금쯤 다른 여자들과 더불어 그 집에 가 있을 것이다. 진홍에게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바깥출입을 하다 들킨다고 해도 핑계를 댈 수 있었으니까.

 

미닫이문을 닫고 나온 진홍이 짚신을 끌고 금줄이 쳐진 울을 돌아 나갔다. 무수한 발자국이 찍힌 길을 걸어 밭두렁을 넘어 서쪽 숲으로 나아갔다.

 

진홍은 연화가 가는 길을 지켜보고 싶었다. 서쪽 포구에서 흰 돛을 올리고 육지로 떠난다는 돛단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싶었다. 이 섬으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신랑 각시의 앞날을 축복해주고 싶었다.

 

진홍은 뱃머리에 선 연화가 먼 발치에서 자신을 배웅하는 그를 알아봐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진홍이 껑충껑충 뛰어 징검다리를 건넜다. 마지막 디딤돌을 잘못 밟는 바람에 냇물에 짚신을 적시자, 욕설을 삼키며 발을 털었다. 대숲에서 노루가 울었다. 서쪽 해안에 자리 잡은 그 집은 이 섬에서 유일하게 암키와, 수키와를 얹고 막새를 드리웠다. 크고 오래됐으며 솟을대문은 굳게 잠겨 있어 누구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이 밤, 일 년에 딱 한번 열리는 그 기와집에서 진홍은 신랑과 함께 몸을 누일 것이다. 장지문 밖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교합할 것이다. 그런 다음, 붉은 댕기일랑 벗어던지고 긴 머리를 틀어 쪽을 진 채로 새벽동이 트기 전 백이 띄운 배를 타고 이 섬과 영영 작별할 것이다.

 

달빛을 머금어 희붐한 광채를 내는 담과 지붕, 해안에 숨어 있다시피 한 포구를 가늠하며 진홍은 두려움보다 격렬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더는 언니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다니. 함께 멱을 감으며 물장구칠 수 없다니. 수풀 속에 떨어진 밤송이를 줍다 시린 손을 감싸 쥐고 호호, 입김을 불어넣어줄 수 없다니. 붉어진 코끝에 입맞춰줄 수 없다니.

 

별 것 없는 사내놈에게 언니를 빼앗겨야 한다니.

 

진홍이 앙갚음이라도 하는 것처럼 매화나무 가지를 잡아채 툭 부러뜨렸다. 여기서부터 쭉 둔덕을 따라 걷다 언덕을 타 넘으면 섬의 서쪽 면을 이룬 소나무 숲에 이를 수 있었다. 진홍이 너럭바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달이 어디쯤에 더 있나 밤하늘을 살필 무렵, 바로 옆 가지에 어떤 형상인가가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진홍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팔을 뻗어 그를 끌어내리고자 안간힘을 쓰지도 않았다. 눈물을 쏟으며 허물어지지도 않았다.

 

진홍은 그것이 끝난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낯을 가리고는 있었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자명해 보였다. 벗겨진 당혜 한 짝이 바닥에 잔돌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연화는 나무에 목을 매 숨져 있었다. 활옷은 벗지도 않은 채였다. 바람결에 버선을 신은 발이 앞뒤로 살짝 흔들렸다. 그 모습이 느리고 고통스러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진홍이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사람처럼 두 팔로 힘껏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의 뺨은 빨갰고 입술은 그보다 더 빨갰다. 어찌나 세게 이를 악물고 있었던지 고통스러울 지경이었지만 그 자신은 정작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진홍이 힘 빠진 다리를 놀려 허우적허우적 비탈길을 걸어 내려갔다. 슬픔이 무기력으로, 종내는 분노로 바뀌어 그를 점점 더 빠르고 난폭하게 움직이도록 했다. 진홍이 성난 눈초리로 짙고 빽빽한 숲 저편을 쏘아보았다. 마을에서 유일무이한 기와집의 용마루가 우듬지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했다.

 

진홍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애도는 이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 평생에 걸쳐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 순간의 결정이 그를 파멸로 이끈다고 할지라도 진홍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이 밤의 비밀, 연화가 자신을 해친 이유를.

 

 

 

 

아침볕은 맑았다. 시냇물에 꽃잎 한 장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

 

진홍이 냇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수면에 비친 그의 얼굴이 물살에 따라 미묘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목덜미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올을 만지작거리던 진홍이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손가락을 튕겨 냇물 위에 떠올라 있던 제 상(像)을 흩어버렸다.

 

흐르는 내에 머리를 감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날씨였다. 진홍이 저고리 소매를 걷고 낯을 씻었다. 살얼음은 진즉에 녹아 없어졌으나 물은 여전히 서늘해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진홍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한편으로는 조금 즐거웠다.

 

진홍이 내처 저고리 고름을 풀어 목을 훔치려고 할 때, 어디선가 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진홍이 저고리 앞섶을 붙들고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주먹손을 입 앞에 댄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고는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무율이 제 등장을 이제야 눈치챘느냐고 핀잔이라도 주는 것처럼 앞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 섬에서 나고 자란 사내치고 무율은 제법 번듯했다. 키는 컸고 팔은 길었으며 어깨는 단단해 보였다. 잘난 얼굴만큼 목소리 역시 굵고 깊어 누구의 이름이라도 호명할라 치면 상대가 얼결에 시선을 피하며 수줍어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달이가 무율에게 목을 매는 것도 영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진홍이 용건이 뭐냐고 묻는 것처럼 턱을 들었다. 무율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뜸을 들였다. 진홍에게는 상대를 기다려주는 아량을 베풀 생각이 없었다. 진홍은 달이와는 달랐다. 선량한 체 하는 저 몸짓 뒤에 감추어진 진의가 단순한 선의가 아님을 꿰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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