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달려 온

  • 장르: 판타지, SF
  • 평점×24 | 분량: 116매 | 성향:
  • 소개: 끝나지 않는 밤이 찾아오면 별을 보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있어야 하는지 매일 스스로 물어야 하지요.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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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달려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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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시작되기 전에.

그래, 밤이 오면 말이야.

 

요사이 빈번히 들려오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틈만 나면 밤에 관해 떠들었다.

 

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밤이 온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지 않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계속 상기하기 위해서. 경계를 다지기 위해서. 그 정도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귀동냥으로 듣는 ‘온’도 알아챌 수 있는 기운이었다. 사람들은 밤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게 굼떠서는 너, 한밤중에 누군가 공격해도 몸도 못 추릴 거야.”

 

조리장 린그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느려터졌구나! 온. 너 때문에 이 저택 사람들 모두 굶어 죽겠어. 당장 그 게으른 팔다리에 날개를 달지 못해.’가 아니다. 밤이 등장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린그가 돌아오자마자 부엌 하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온은 설거지 하던 손을 일부러 큼직하게 놀리며 그릇이 달그락대는 소리를 요란하게 냈다. 어차피 다른 하인들은 온이 어리다며 대화에 끼워주지도 않기에 처음부터 조용히 있었지만, 이야기를 듣고자 할 땐 저도 모르게 손이 멈춰 있곤 한다. 아이의 호기심은 집중력이 강하다.

 

다만 린그의 겁박은 온에게 효과적이진 않았다. 아직 밤을 경험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일부러 공격을 받을 만큼 온이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굶어 죽는다면 모를까, 자신 같은 아이에게 해를 끼쳐 얻을 수 있는 이득이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없다. 온은 부엌의 하인 중 말단일 뿐이다.

 

“그리고 설거지를 끝내면 루폴 씨를 찾아가라.”

 

“네?”

 

평소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온이지만 이번에는 확인해야 했다. 지금 설거지를 하는 하인은 온뿐이었고 린그는 분명히 온을 향해 말했다. 루폴은 주인의 비서장이다. 온이 알기로는 저택의 행정을 돌보는 집사장보다 높은 직책이며, 실제로 나가 싸우지는 않아도 원래는 군인이었다고 들었다.

 

그런 루폴이 온 같은 아이를 지목하여 찾을 이유 역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없다. 하지만 어서 설거지를 마치고 팔다리에 날개를 단 듯 서둘러 가야 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인의 신분이 아닌 누군가 온을 긴히 부른 것도, 루폴의 집무실에 들어가 본 것도 처음이었다. 온이 쭈뼛이 노크하자 문이 활짝 열리며 루폴이 나타났다.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을, 밤을 몇 번 경험해 보았을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주인의 업무 대리인답게 느긋하거나 인자한 인상은 아니다. 온 따위가 저택의 주인을 마주칠 일은 없지만, 루폴 역시 마주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온이라고 했지?”

 

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버릇이 없구나. 대답을 바로 하거라.”

 

“죄송합니다.”

 

“몇 살이지?”

 

“열 살이요.”

 

루폴은 뒷짐을 진 채로 머릿속으로 무언가 계산하는 듯 온을 잠시 굽어보더니 말했다.

 

“그럼 아직 밤을 모르겠구나.”

 

온은 다시 고개를 끄덕하다 멈추고 네, 라고 작게 대답했다. 이번에 루폴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너를 부른 건 일을 하나 맡기려고 해서다. 린그 부인은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했지만, 모를 일이지.”

 

루폴은 빙글 돌아서며 집무용 책상 앞에 앉았다. 맞은편에 손님용 의자가 있었으나 온에겐 권하지 않았다. 볕이 잘 드는 커다랗고 안락한 방인데도 온에게는 지하의 퀴퀴한 제 쪽방보다도 편안하지 않았다.

 

“오늘이 지나기 전 저택에 손님이 하나 도착한다. 얼마나 머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몸에 부상을 좀 입은 분이라 회복할 때까지 네가 곁에서 시중을 들어야 한다. 식사를 나르거나 거동을 돕거나 말벗이 되거나. 알겠느냐?”

 

작게 네라고 대답했다. 망설이거나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온에겐 없었다. 그 손님이 누구인지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지만, 어째서 많은 하인 중 자신 같은 아이가 지목되었는지는 묻고 싶었는데 루폴의 눈은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 줄 그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과를 마치면 내게 와서 오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려다오. 그게 네가 할 일이다.”

 

 
*
 

 

여러 명의 병사와 함께 저공비행 기체를 타고 도착한 ‘손님’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들것에 실린 그가 옮겨져 뉜 곳은 주인이 머무는 층의 손님용 침실이 아닌, 꼭대기 층의 잠금장치가 달린 방이었다. 유사시 망루로 쓰는 공간이었는데 방으로 급히 개조한 것이었다.

 

손님은 서 있었다면 어깨에 가벼이 닿았을 길이의 까만 머리카락에 잘 마른 면포처럼 창백한 피부의 청년이었다. 나이는 아무리 많아야 밤을 두 번 지냈을 정도다.

 

이곳은 열두 해를 주기로 낮과 밤이 바뀐다. 온이 살고 있는 연방 ‘라클’은 지금 십 일 년째 낮이 이어지는 중이다. 별의 반대편은 그와 반대로 긴 밤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일 년 후, 주기에 다다르면 이제 라클은 밤에 들어가고, 반대편 저쪽은 낮이 시작된다. 즉, 다가올 밤은 온에겐 태어나 처음 맞는 것이었다.

 

배움이 적다 못해 부엌 허드렛일을 제외한 지식이랄 게 없는 온은 자연의 이런 변화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그저 우리별이 빛을 내는 해님을 바라보며 따르는 방향이 여느 별들과는 크게 다르다고만 들었을 뿐이다.

 

손님은 경비병의 감시가 붙은 방에서 나흘을 꼬박 잤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온의 시선으로도 그는 영락없는 인질이었다. 루폴은, 아니 그에 앞서 명령을 내렸을 주인은 어째서 이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걸까. 이 사람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온은 그저 잠든 손님의 이마 언저리와 목덜미에 난 땀을 닦아주는 일 말곤 달리 할 것이 없었다.

 

부상은 손님의 오른팔과 가슴께에 크게 번져 있었는데, 그건 하루 한 번 의무인이 와서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깨끗한 천으로 갈아주었다. 화상으로 입은 상처였다. 두 연방의 경계, 즉 공동구역에서 루폴의 병사들이 이 사람을 공격했다. 섬광처럼 빛나는 무기가 쏘아져 소형 비행 기체를 뚫고 손님의 몸 오른편에 내리꽂혔다. 다른 비행체로 나란히 따르던 그의 동료는 즉사한 것 같다. 그들은 별의 반대편 연방 ‘데인’ 사람이다. 손님의 머리카락처럼 까만 밤의 세계에서 왔다.

 

일과를 마치고 잠을 자러 가기 전 루폴에게 들렀을 땐 특별히 전할 말이 없었다. ‘손님이 악몽을 꾸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을 흘렸어요. 땀도 좀 흘렸고요.’가 고작이었다. 루폴은 ‘네가 땀을 계속 닦아드렸느냐?’ 물었고 온이 그렇다고 하자 손님이 잠꼬대는 하지 않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잠꼬대는 없었다. 그런데 루폴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가 무의식중에 네게 들려준 말이 없는지.

 

“아뇨.”

 

조금 망설이다 온은 그렇게 대답했다. 거짓말하는 게 아닌데도 마치 그런 것처럼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루폴의 녹색 눈이 온을 꿰뚫을 듯했다.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이다. 손님은 잠꼬대 조차로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공동구역에서의 공격, 그리고 손님이 데인 사람이란 건 누구도 온에게 말로 일러준 적이 없다. 그저 온이 보았을 뿐이다. 그의 땀을 훔치면서, 뒤척임에 몸이 침상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힘껏 추어 올려주면서.

 

온은 사람과 닿으면 그의 의식을 전이 받는다. 상대의 생각과 마음을 눈으로 보듯 읽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다. 엄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 아직 이 저택의 하녀로 있을 때 늘 신신당부했다. 네 힘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고. 곤란에 처할 거라고.

 

그 말을 매일 기억하며 항상 입을 꼭 닫았다. 나도 모르게 말해버리는 일이 생길까 봐. 그래서 엄마가 숨을 거둔 후로도 이 저택에서 누구보다 고요하게 지냈는데, 어째서 루폴은 그런 눈으로 자신을 추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디선가 알아챌 만 한 행동을 무심코 하고 만 걸까? 내가 무언가 실수라도 한 걸까?

 

“정말 내게 말할 게 아무것도 없느냐?”

 

온은 두 손으로 치마통을 꼭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지금껏 엄마의 당부를 지키기는 어렵지 않았다. 작고 비천한 아이에게 무얼 궁금해할 사람이 달리 없던 까닭이다. 시키는 일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루폴의 이런 질문 공세는 무척 당혹스럽기만 하다.

 

“실은…….”

 

온은 덜덜 떨며 풍성한 치마의 주머니에서 꼬깃하게 접은 누런 종이를 꺼냈다. 루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펼쳐진 종이를 본 루폴은 작게 실소를 터뜨렸을 뿐이다. 식재료를 쌌던 종이인지 기름기가 스민 종이에 그려진 것은 잠든 손님의 스케치였다. 정교한 그림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이목구비를 통해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린그가 쓰다 버린, 손가락 한 마디 만큼 작아진 연필을 주워 그렸다. 글자는 모르는 온의 유일한 놀잇감이다.

 

“곁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시간이 도무지 흐르지 않아서…….”

 

“됐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날카로웠던 시선을 거두며 루폴이 나지막이 말했다.

 

“하던 대로 하면 돼. 궁금한 것은 내가 매일 물을 테니 숨기지만 않으면 된다. 일이 잘 풀린다면 밤 동안 네가 좀 더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마. 가도 좋아.”

 

온은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쥐고 있던 그림의 양쪽엔 동그란 물기가 얼룩져 있었다.

 

 
*
 

 

손님의 방에 어둠이 드리웠다.

 

밤이 찾아온 것은 아니다. 아직 본격적인 밤이 찾아오려면 한 해는 더 남았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양쪽 밤낮이 완전히 뒤집히는 방식은 아니다. 일 년에 걸쳐, 하루 중 밤이 차지하는 조각이 조금씩 조금씩 커지다가 어느덧 완전히 캄캄해지는 때가 올 거라고 부엌의 다른 하인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로 계산하자면 스물이 채 안 된 그 하인도 지난 한밤에 태어났을 테니, 아주 어릴 때라 정확한 기억이 없을 거면서 잘 아는 듯 으스대는 것이었다.

 

손님방의 어둠은 암막의 힘을 빌렸다. 악몽을 헤매던 손님의 땀을 닦는데 지난 나흘간은 없었던 의식이 불쑥 드러나 온에게만 들리는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 너무 밝다. 눈을 뜨기가 힘들어.

 

손님의 의식이다. 그렇지. 손님은 데인에서, 그러니까 밤으로부터 왔다. 근 십여 년을 어둠 안에서 지냈다. 이곳의 밝은 낮이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다.

 

발돋움해도 암막을 말아 올려놓은 매듭까지 손이 닿지 않아 온은 의자를 끌어와 밟고 올라가 그것을 풀어야 했다. 그렇다고 완연한 어둠을 초대하기는 어렵다. 해님의 기운은 강하다.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서로의 윤곽을 충분히 더듬어 볼 수 있는 빛의 끝자락까지 거두기는 무리다.

 

그 그림자 안에서 손님은 비로소 눈을 열었다. 먼저 손으로 자신의 몸통과 침상을 천천히 더듬었고, 고개를 틀어 창가에 선 온을 발견했다. 손님은 곧장 상체를 일으켜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힘을 준 팔꿈치가 무색하게 침상으로 도로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온은 재빨리 손님의 곁으로 돌아가 그를 부축했다. 침상의 머리에 등을 기대앉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었다.

 

“고맙습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온에게 속삭였다. 굳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온은 알았을 것이다. 손님은 지금 몇 가지 생각에 동시에 사로잡혀 있었다. 낯선 아이에 대한 고마움과 더불어 배고픔, 부상에 대한 고통, 그리고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고 싶다는 질문 등에 빙 둘러싸여 있었다.

 

온은 부축하던 손을 얼른 뗐다. 이제 의식이 돌아온 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손님에 대해 많이 알아서 좋을 것은 없다. 알면 알수록 루폴에게 숨겨야 할 것만 많아질 뿐이다.

 

그래도 그의 심각한 허기만은 무시하기가 어려워서 온은 잠시만 기다리시라며 얼른 부엌까지 뛰어 내려가 저장 빵과 치즈와 물을 가져왔다. 환자이기도 하니 따뜻하고 부드러운 요리라면 더 좋겠지만 요즘은 긴 밤을 대비해 호론을 아낀다. 호론은 이 별에서 불을 피우거나 빛을 내고 그것을 지속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광물이다.

 

손님이 눈을 떴다고 루폴에게 먼저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 뒤늦게 생각했을 땐 이미 경비병이 호출을 넣은 후였다. 아무튼 온의 임무는 손님의 곁을 지키는 것이므로 거기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온은 손님이 다치지 않은 쪽의 손으로 음식을 집어 천천히 삼키는 모습을 묵묵히 보았다. 허기를 달래기가 아니라, 있었던 일을 더듬고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연료를 집어넣는 듯 내내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여기는 라클 서측 경비대장의 저택인가요?”

 

시선은 빈 접시에 머물러 있었기에 처음엔 질문인지 몰랐다. 주인은 서측 경비대장이 맞다. 얼굴을 보는 일은 드문 주인이지만 온도 주인의 신분 정도는 안다. 그러나 온이 그렇다 아니다 대답해도 괜찮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붙잡혀 온 건 나 혼자입니까?”

 

계속된 질문에 대답을 망설이던 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주인의 대리인, 즉 비서장 루폴이 의무인을 데리고 나타났다. 온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낮잠이 부디 편안했기를 바랍니다. 나기.”

 

루폴은 다소 어두운 방 안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암막을 절반쯤 걷어 올렸다. 방에 다시 빛이 침투하자 손님은, 그러니까 나기는 눈을 가늘게 하며 고개를 아래로 꺾었다.

 

의무인이 지난 며칠 하던 대로 다시 나기의 상처를 살폈다. 옷을 걷고 소독을 시작하자 나기의 눈은 가늘어지다 못해 찡그려졌다. 고통이 큰 것 같았다.

 

“다행히 저희 의무인은 연방 안에서도 손꼽는 실력을 자랑합니다. 머무시는 동안 각별히 부상을 잘 돌봐드릴 겁니다.”

 

“기습해오는 작전도 각별하시더군요.”

 

온이 알던, 다소 온화한 인상이었던 나기의 안색이 일순 변했다.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루폴의 입매도 편평해졌다.

 

“라클의 경비대로선 전략상 놓치기 어려운 기회였으니까요.”

 

“정찰기 두 대를 기동부대 하나가 달려들어 격추한 걸 기회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기 님 정도라면 호론과의 교환가치로는 상당하지 않겠습니까. 데인 연방 재정국장의 소중한 자제분이니까요.”

 

“그걸 세간에서는 납치라고 합니다, 루폴. 게다가 거기는 평화협정을 맺은 공동구역이었어요.”

 

“이런, 저는 호론을 독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데인 연방을 향한 관대한 협상안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마는.”

 

“아홉 번 이전의 밤, 이 땅에서 우리 종족을 추방한 건 당신들이라고 배웠습니다. 라클은 그때도 충분히 이기적이었고요.”

 

“역사는 변할 수 있지요.”

 

“아니. 똑같습니다. 그대들만 살아남고자 하는 이기심은요.”

 

“나기.”

 

“데인은 독립연방입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게 협박이라 해도 말입니다.”

 

한 마디씩 오갈 때마다 온은 고개를 휙휙 돌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이 인질극의 이유를 하나둘 깨달아 갔다.

 

라클은 데인과 호론을 거래할 목적으로 공동구역에 정찰을 나온 나기를 납치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온은 그런 인질을 감시하는 밀사다.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 옳지 않은 일에 가담하는 중이었다.

 

“라클은 이제 호론이 거의 바닥났고, 우리는 긴 밤을 지낼 빛과 열이 필요합니다.”

 

“데인을 경계하고 공격할 무력을 보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요.”

 

“밤을 앞둔 라클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주시지요, 나기.”

 

“페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정찰대원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안타깝게도, 저희가 공동구역에 잘 묻어드렸습니다.”

 

그 말에 평정을 유지하던 나기가 눈을 감았다. 두 손이 머리를 가만히 감쌌다. 곁에서 만지지 않아도 그의 슬픔과 고통이 온에게까지 밀려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붙잡혀 온 것은 자신뿐인지 온에게 물었었다.

 

“당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협상은 진행될 겁니다. 데인에서 교섭인을 파견할 테니, 후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회복에 전념하셔도 좋겠지요.”

 

그 말을 남기고 루폴과 의무인은 방을 떠났다.

 

무서운 침묵의 손길이 공기를 붙들었다. 온은 이대로 나기가 울음이라도 터뜨리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했는데,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로 아주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마음인지 알 것도 같았다. 온도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며칠을 울었다.

 

“손님.”

 

감히 이름을 부를 수는 없기에 그렇게 운을 떼며 온은 나기의 심사를 살폈다.

 

“잠시 혼자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고개를 들지 않은 그대로 목소리만이 흘러나왔다. 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기는 온 같은 아이에게도 존중어를 쓴다. 이 저택의 사람 중 누구도 온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이는 없었다. 명령과 재촉, 질책 아닌 말이 새삼스러울 정도다.

 

온은 처음으로 데인이라는 곳은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천하고 성가신 인접 연방이라고만 듣던 그곳이.

 

온은 다시 암막을 드리우고, 그의 바람에 따라 그를 혼자 두었다.

 

방 밖에는 아직 떠나지 않은 루폴이 서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온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루폴은 바로 아래층에 위치한 집무실로 온을 데려갔다.

 

나기와 나눈 대화가 달리 없었으므로 오늘은 또 어떻게 그 숨 막히는 순간을 견뎌내야 할까 생각하며 그의 책상 앞에 섰을 때다. 오늘은 루폴이 다소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우리는 데인 연방의 호론 저장고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고.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다고 들었으나 단 한 곳이라도 알아낸다면 네게 큰 공을 돌릴 거라고. 그러면서 기다란 새 연필을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위치를 말로 하기 어렵다면 그림으로 그려도 좋다면서.

 

“저 따위에게 손님께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하실 리가 없잖아요.”

 

태어나 처음으로 긴 연필을 손에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루폴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알 수 있을 거다. 분명.”

 

 
*
 

 

인질이라고 하기에 나기는 대체로 안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을 연 며칠 후 이제는 낮의 세상에 어느 정도 적응했는지 얼굴을 덜 찡그렸고, 암막을 내리지 않아도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다.

 

덕분에 온은 시시때때로 그의 얼굴을 더욱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반듯한 인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말없이 있으면 근원 모를 슬픔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이기도 했다. 데인 사람이라서일까. 기운차고 목소리가 큰 라클 사람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다. 고요하다. 사람에게 어울리는 표현인지는 몰라도 다른 수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체격은 다부지다고는 못해도 키는 커다란 편이었다. 적어도 루폴 보다 반 뼘은 더 컸으니까.

 

오늘은 열흘 만에 불을 쓸 수 있게 된 날이라 그에게 데운 죽과 빵을 비롯한 따뜻한 식사를 가져다줄 수 있었다. 저택에는 중앙연소기관이 있는데 그곳에서 호론을 태워 생기는 힘으로 따뜻한 물을 쓰고 불을 쓰는 요리를 할 수 있다. 밤이 되면 저택 곳곳의 등을 밝힐 수도 있다고 들었다.

 

이제 상처 소독은 나기 스스로 했다. 그가 의무인을 거절했다. 그래서 곁에서 온이 도왔고, 오늘은 그의 어깨에 깨끗한 새 천을 감아 매듭을 지으며, 나기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어 한다는 생각을 읽었다.

 

데운 물에 찻잎을 띄워 가져갔다. 나기는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오늘은 불을 쓸 수 있어서요.”

 

“친절하시군요. 참, 그러고 보니 제가 아직 그대의 이름을 모릅니다.”

 

“앗, 저는.”

 

온은 안절부절못했다. 가끔 착각하고 만다. 제가 상대방을 알고 있는 만큼 상대방도 온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라고.

 

애초에 깊은 바닥이랄 게 없는 신분이니 드러낼 것도 많지는 않았으나 이름조차 알리지 않은 것은 분명 예에 어긋나는 일이긴 했다.

 

“오, 온입니다.”

 

“온. 소리가 좋은 이름이네요.”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기가 말했다.

 

“이상하지요. 온이 이렇게 저를 잘 돌보아 주고, 여긴 분명히 데인보다 따뜻한데 기운이 영 돌아오지 않아요.”

 

“손님은 많이 다치셨으니까요.”

 

“아마도요. 그리고 오랫동안 밤에 익숙해져 버린 거겠죠. 어둠만 줄 수 있는 안락함에요.”

 

순간 온은 그를 가까이 만져 그가 지금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밤의 풍경을 엿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저택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 밤과는 사뭇 다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인질이어도, 나기는 지체가 높은 사람이다. 한낱 하인 아이가 먼저 손을 댈 수 없다.

 

“온도 밤이 오는 게 두렵나요?”

 

온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버릇없는 행동이란 걸 잊었으나 나기는 꾸짖지 않았다.

 

“밤은…… 캄캄한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무섭지 않아요. 지금도 제 방은 언제나 밤이니까요.”

 

온의 지하 쪽방은 긴 낮에도 불구하고 빛이 한 자락도 들지 않는다. 어둡고 서늘하고 습하다. 그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약간 더 길어진다고 상상하면 될 터였다.

 

나기가 낮게 웃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예?”

 

다름 아닌 그림 이야기에 온은 화들짝 놀랐다. 잠든 나기의 스케치가 베개 밑에서 나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칠칠치 못하게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다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온의 얼굴이 빨개졌다. 제가 그러듯, 누군가에게 제 머릿속을 들킨 기분이었다.

 

“미안해요. 금세 돌려줘야지 했는데.”

 

나기가 그림을 내밀었다. 온은 멋쩍게 다가가 그림을 받아 들었다. 건네고 받는 손이 가벼이 스치고 온은 나기에게서 자신을 향한 따뜻한 빛을 읽었다. 어둔 밤이 아니라, 등불 하나를.

 

“좋은 솜씨에요. 감탄했어요.”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온만을 위해 말했다.

 

루폴이 말한 호론의 저장고란 게 정말로 있다면 데인 저 바깥이 아니라, 이 사람의 속에 있다고 믿고 싶을 정도로 온화하고 따스한 빛이었다.

 

 
*
 

 

주기에 가까워질수록, 저택은 자꾸만 술렁거렸다.

드디어 밤의 조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첫날의 밤 조각은 몇 분 정도로 아주 짧았지만, 온에게는 더없이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지하 쪽방이 아닌데도, 빛이 아주 잘 드는 복도를 걷던 중이었는데 지금까지 모르던 거대한 어둠이 순식간에 세상을 집어삼켰다.

 

너무 놀라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버렸다. 들고 있던 쟁반에서 그릇들이 치르르 떨렸다. 정말이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의 집안사람들과 부하들, 하인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충격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짧은 밤이 물러갈 때까지 온은 제 숨소리를 벗 삼아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쪽방처럼 당장 문을 열어젖혀 빛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불가항력이었다.

 

십여 년 만에 나타난 밤 조각에 들썩이는 저택이 평정을 채 찾아가기도 전에, 새 손님의 방문 예고가 날아들었고 저택은 다시 술렁거렸다. 루폴이 말했던 교섭인이었다. 이 저택에 또 다른 데인 사람이 찾아오다니, 그 사실만으로 온의 마음도 어쩐지 부산스러웠다.

 

교섭이 잘 되어 나기가 얼른 자유의 몸이 되어 데인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그가 떠나버리면 엄마와의 작별만큼은 아니겠으나 꽤 커다란 상실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동시에 마음을 차지했다.

 

루폴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교섭인은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틀어 올린 여성으로 수행원 몇 사람을 데리고 저택에 도착했다. 그들은 온이 나기의 기억에서 본 비행체보다는 훨씬 위엄 있고 단단해 보이는 기체를 타고 왔다.

 

교섭인을 비롯한 다른 데인 사람들은 모두 나기처럼 어두운색의 머리카락과 흰 피부, 잿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은 침울해 보이는 표정도 모두가 닮아 있었다. 붉은빛이나 갈색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라클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생김새였다.

 

비행체에서 내려와 라클의 땅에 발을 디디며 그들은 모두 긴 망토에 딸린 모자를 머리에 깊게 드리워 써서 눈앞에 작은 그늘을 만들었다. 루폴이 직접 나와 안내를 맡았고, 교섭은 주인과 루폴, 교섭인의 삼자대면으로 응접실에서 이루어졌다. 이날은 응접실 주변에도 저택의 입구에도 복도에도 온통 라클의 경비대가 기둥처럼 서 있었다. 이렇게 삼엄한 경비는 온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것이었다.

 

당연히 온이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이 전부였다. 온은 그날도 변함없이 나기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건강을 조금 회복하는가 싶었던 그는 최근 급격히 기운을 잃었다. 상처가 덧나버린 탓이다.

 

하루는 나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여 그의 뜻과 상관없이 의무인을 불러 달라고 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루폴에게 보고를 갔을 때 어째서 의무인이 오지 않았느냐고 조금은 버릇없이 묻고 말았는데, 루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되물었다. 호론 저장고의 위치를 알아냈느냐고.

 

마치, 네가 그걸 알아내기 전에는 나기의 상처를 돌봐주지 않겠다는 협박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맹세코 온은 몰랐다. 나기가 말한 적도 없고, 온과 닿았을 때 그곳을 떠올리고 있던 적도 없었다. 모른다고 하자, 루폴은 무서운 목소리로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 다음날도 의무인은 오지 않았고 나기는 밤새 고열을 앓았다.

 

온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곁에서 땀을 닦아주고, 그가 오한으로 떨 때 담요를 좀 더 신경 써서 감아주는 것 정도였다. 울고 싶었다.

 

도대체 교섭인이라는 작자는 언제 나타나는 거야. 나기가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려는 걸까. 이 사람보다 호론을 한 바구니라도 더 차지하고 있는 일이 데인에겐 중요한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며칠간 반복했고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